남자는 쉰아홉 살이다. 걸음걸이가 영 불편하다. 절 룩거리며 보폭을 조금씩밖에 떼어놓지 못한다. 몇 해 전부터 다리가 아프고 저리고 하더니 점점 심해 지고 있다. 이제는 팔도 시원치 않고 손가락에도 마 비 증세가 나타난다. 여러 해 동안 약 먹고 물리치 료 받으러 다녔건만, 진통은 그때뿐이고 진행은 계 속된다. 젊어서 연탄 나르는 일을 많이 해서 그런가 혼자 생각해볼 뿐, 시원스레 무슨 병인지 설명을 들 어보지도 못했다.
그가 앓고 있는 병은 목에 생기는 ‘후종인대골화증’ 이라는 일종의 희귀 난치성 질환이다. 신경 압박 상 태가 상당히 진행돼 척수에까지 이차적 변화가 보 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수술이 필요하다. 마침 대학 병원에 있는 친구가 이 분야의 전문가여서 바로 전 화를 했다. 친구는 어서 환자를 보내라고 한다. 나는 약간의 설명을 덧붙였다. “의료급여 1종 환자라서 돈 이 별로 없으니 네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봐줘 야 할지 몰라.” 고맙게도 친구는 걱정 말라며 사회복 지팀에 연락해놓겠다고 흔쾌히 답했다. 검사 영상과 의뢰서를 갖고 남자는 대학병원으로 갔다.
수술 날짜를 잡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잘 치료받겠 거니 생각하고 있는데, 어제 남자가 우리 병원에 다 시 나타났다. 걸음걸이가 전보다 더 심하게 힘겨워 보였다. 6월17일이 수술 예정일이었는데 입원을 못 했다고 한다. “아니, 왜요?” 내가 묻자, 그는 “제가 변변치 못해서 그렇지요” 하면서 표정이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의 어린아이처럼 돼버리는 것이었다.
사회복지팀에서 친절하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떼어 오라는 서류가 많았지만 며칠을 힘겹게 다니며 모 두 떼다가 제출했다. 치료에 드는 예상 비용이 대략 600만원이라고 하는데, 구청 복지과에서 300만원, 한 자선재단에서 나머지 300만원 후원 약정을 받 게 되어 수술에 필요한 재원이 마련됐다. 이제 됐다 고 했고 수술 날짜를 잡았다. 수술을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 힘들지만 기쁘게 기다렸다. 그런데 입원을 하러 병원에 간 날, 그는 원무과 앞에 서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입원하려면 예치금 200만원을 먼저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확보된 재원은 사후 지불되는 것이어서 예 치금으로는 활용이 안 된다며 어쩔 수 없다고 했단 다. 그는 급히 돈을 구하러 이리저리 알아보았지만 200만원이라는 돈을 구하지 못했다. 병원 복지팀에 서도 안타깝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고 했고, 그 와중에 구청 복지과로부터는 수술이 긴급히 시행되 지 않는다면 긴급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해 예정된 지원을 취소하게 될지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 다. 남자는 크게 낙망했다. 자꾸만 자신 탓을 한다. “제가 변변치 못해서 그래요. 200만원이라도 제 힘 으로 마련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돼서요.”
생각지 못한 복병이었다. 재원이 마련됐는데도 예치 금 때문에 환자가 받아야 할 수술을 못 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납득해야 할까? 좀더 알아보자고, 분명 방법 이 있을 거라고, 수술 날짜는 새로 잡으면 된다고 환 자를 다독이면서도 의사 속도 타들어가긴 매한가지였 다. 돌아서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더디기만 하다.
우리나라는 좋은 의료제도를 갖추고 있다. 원칙적 으로 ‘누구나’ 원하는 병원, 원하는 의사한테 가서 치료받을 수 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여기에는 보 이지 않는 장막이 있다. 이를테면 그 장막이 어느 병원에는 ‘예치금’이라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누군 가에게는 더없이 가뿐한 문턱이 누군가에게는 한없 이 버거운 장벽이 된다.
친구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그도 환자의 이런 사연 을 촘촘히는 모르고 있었다. 알아보고 해결해보자 한다. 우리가 다녔던 모교 교가에는 이런 구절이 나 온다. ‘피와 땀을 흘려 육과 영을 건져내니 반도강산 에 새 생명이로다.’ 무엇인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우 리는 힘을 합해 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포기할 때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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