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트에 기록된 소년의 나이는 7살, 그리고 몇 개월이 더 지났다. 자기 키만큼이나 커 보이는 목발을 짚고 버겁게 진료실로 걸어 들어왔다. 아이의 엄마는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수심이 가득했고, 아빠는 그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다른 병원에서 찍은 자기 공명영상을 가져왔다. 모니터에 띄웠다. 어떤 질환이 보였다. 흔치 않지만 그 또래 아이들이 간혹 걸리는 병이었다.
증세가 처음 시작된 것은 4월 중순부터였다고 한다. 어느 날 별다른 까닭 없이 다리가 아프다고 했고 며칠이 지나자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부모는 아이를 근처 의원에 데려갔고, 그 의원에서는 좀더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좀더 큰 병원에서는 아주 큰 병원으로 가보라 했고, 아주 큰 병원에서는 대한민국 굴지의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거기에서는 고가의 정밀검사를 시행했고 수술 얘기가 나왔다. 또 다른 굴지의 대학병원에 갔는데 그곳에서는 어서 입원해서 물 빼고 깁스하자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잘아는 베테랑 교수의 이름이 나왔다.
“전문가 중의 전문가를 찾아가셨네요. 저한테 먼저 오셨어도 아마 그 선생님을 추천해드렸을 겁니다. 잘하셨어요. 이미 진단도 받았고 설명도 다 들으셨을 테고요, 그쪽에서 계속 진료받는 게 좋으실 것 같은데요….” 말꼬리를 흐리며 아이의 부모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마도 ‘그런데 왜 여기 왔느냐’는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이어진 아이 아빠의 말은 뜻밖에도 다음과 같았다. “애엄마가 그래도 선생님 말씀은 꼭 들어봐야 한다고 우겨서 여기 오게 됐어요. 저희는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할 작정입니다.” 먹먹해지는 순간이다. 어떤 연유에서건 이들은 내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병원쇼핑’이니 ‘닥터쇼핑’이니 하는 말이 이젠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들린다. 병원 한 곳의 얘기를 듣고는 왠지 미덥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고 또 주위에서 용하다고 권하는 곳에 가본다. 가는 곳마다 검사와 처방이 반복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런 현상은 사그라지지않는다. 특히 암이나 수술 같은 뭔가 큰 얘기가 나오면 기꺼이 발품을 팔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빚어낸 불안과 불신과 우상을 탓하기 전에, 그 기저에는 병원과 의사들이 신뢰를 잃은 까닭이 크다.
대화는 계속됐다. “그렇게 크게 걱정할 병은 아니에요. 몇 년간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녀야 하는 것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잘 치료해 나으면 후유증 없이 지나갈 수 있습니다. 안심하고 치료받으세요.” 몇 마디 더 얘기가 오갔고, 그 가족은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진료실을 나섰다.
오래전 수련 시절, 한 선배 의사에게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던 말이 생각난다. “환자가 네 선생이다. 환자가 하는 얘기를 성심을 다해 들어라. 그 환자가 어느 교과서보다 더 정확하게 더 생생하게 병증이며 치료 경과며 모두 얘기해줄 것이다. 의사한테 환자보다 더 위대한 스승은 없다.” 이 말은 두고두고 지침이 되었다. 환자는 병증과 경과에 대해서만 스승인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치료 해법에 대해서도 의사가 미처 생각 못했던 힌트를 준다. 의사로서의 내 모습을 반추해보도록 따끔하게 일깨워주기도 한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돼요?” 진료실을 나서던 환자가 멈칫 돌아서서 미안한 듯 눈치를 보고는 조심스레 물어온다. 아차, 내가 바쁜 척을 했구나 싶다. 하던 동작을 멈추고 마음을 다잡아 빙긋 웃으며 대답한다. “그럼요, 두 가지 여쭤보셔도 됩니다.”
일상의 타성에 지쳐갈 때 의표를 찌르는 환자의 일성이 졸고 있는 내 ‘의사행’을 깨운다. 반성하라. 나는 정말 믿을 만한 의사인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환자를 건성건성 보고 있진 않은가? 매 환자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내게는 환자가 죽비처럼 아프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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