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도 솔송주. 확 쏘는 맛에 은은한 솔향기가 난다. 사진 김학민
서울 양재동 옛골에서 청계산을 오르다 보면 망경대 못 미쳐 이수봉(貳首峰)이 있다. 이 봉우리에는 지난 2000년 산 아래 상적동 주민들이 세운 이수봉 유래 기념비가 있는데, 그 내용인즉 “조선 연산군 때의 유학자인 정여창(鄭汝昌) 선생이 스승 김종직(金宗直)과 벗 김굉필(金宏弼)이 연루된 무오사화의 변고를 예견하고, 한때 이 산에 은거해 생명의 위기를 두 번이나 넘겼다 하여 후학인 정구(鄭逑) 선생이 ‘이수봉’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정여창은 1450년 세종 때에 태어나 성종을 거쳐 1504년 연산군 10년에 죽은 학자이자 문신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다. 정여창은 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깊이 탐구해 나라 안에 명성이 드높았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지리산 아래 섬진 나루에 집을 짓고 대나무와 매화를 심으며 평생을 마치려 했다. 1490년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 검열을 거쳐 시강원 설서로서 동궁(연산군)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으나, 연산군은 정여창의 정도(正道)를 좋아하지 않았다.
1494년 성종이 죽자 연산군이 즉위하고 1498년 을 편찬하기 위해 실록청이 개설됐다. 이때 춘추관의 사관인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 속에 김종직의 (弔義帝文)이 실려 있었는데, 유자광 등 훈구파는 이 글이 세조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내용이라 문제 삼아 김종직 이하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미 죽은 김종직은 대역죄로 부관참시하고,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 등 6명이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능멸·무고하였다는 죄명으로 능지처참됐다. 이때 정여창도 불고지죄로 곤장 100대를 맞고 함경도 경성으로 귀양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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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창은 1504년에 죽었지만, 그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여창이 죽은 직후 연산군이 자기의 생모 윤씨의 복위 문제를 거론하면서, 윤씨를 폐비하고 사약을 내려 죽인 성종 때의 사건을 다시 조사해 당시 이를 주장한 사람이거나 방관한 사람들을 모조리 처형한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이 사화로 김굉필 등 10여 명이 사형됐고, 이미 죽은 한명희·정여창 등 8명을 부관참시했다. 정여창이 청계산 아래에서 두 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그의 죽음 또한 이렇게 두 번이었으니, 하늘이 하는 일은 참으로 기이하다.
경남 함양군 지곡면에 가면 백성들에게는 끝없이 어질었지만 옳고 그른 일을 가리는 데는 추상같았던 선비 정여창이 산 500여 년 된 고택이 있다. 하동 정씨 집성촌인 이 마을에는 아직도 200~300년 된 기와집들이 즐비해 마치 민속촌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정여창 고택은 십수 년 전 한국방송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 의 최참판댁 촬영지이기도 하다. 대전~진주 고속도로 지곡 나들목으로 나가 10분쯤 가면 있다.
정여창 문중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가양주(家釀酒)가 있다. 소나무처럼 늘 푸르름을 잃지 않고 꼿꼿하게 절개를 지켰던 선조들의 선비정신을 기리려 했음인지 이름하여 ‘솔송주’다. 지곡의 정씨 문중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종중이나 집안의 제사 등 대소사가 있으면 꼭 이 술을 빚어 사용했지만, 세월이 지나 농촌이 피폐해지고 술 담그는 일이 번거로워 그 맥이 끊어질 지경이 됐다. 정여창의 16대손 정천상씨와 그의 부인 박흥선(58)씨가 이를 안타까이 여겨 현재 100살 된 어머니 이효의씨로부터 가양주 담그는 법을 배워 조심스레 상품화하니, 이것이 명가원의 솔송주다.
솔송주에는 발효주(약주)와 증류주(소주)가 있다. 함양에서 나는 찹쌀에 누룩·솔잎·송순을 잘 버무려 지리산 자락의 지하 암반수를 부어 발효시키면 13% 약주가 되고, 함양 토종 멥쌀에 누룩·솔잎·송순을 원료로 하여 20여 일 발효시킨 뒤 증류해 숙성시키면 도수는 높지만 부드럽고 향기가 은은하며 뒤끝이 깨끗한 40% 소주가 나온다. 현재 며느리 박흥선씨가 솔송주 명인으로 지정돼 있으며, 맏딸 정가영(32)씨가 그 뒤를 이을 준비를 하고 있다. 문의 명가원 055-963-89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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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민 음식 칼럼니스트 blog.naver.com/hakmi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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