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심심한 떡라면’을 주문했다. 살짝 불은 라면을 먹으며 우리는 좀 심심하게 만났다.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의지의 한국인’ 같은 단무지 없이.
김재왕 변호사는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이하 희망법·www.hopeandlaw.org)에서 일한다. 2012년 3월 문을 연 희망법은 풀뿌리 후원, 출판, 교육사업 등 자체 수익으로 운영되는 비영리 단체다. 짬이 나서 ‘보기 좋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아픔에 조금이라도 공명하고자” 6명의 변호사가 전업으로 뛰어들었다.
<font size="3">10년 전 눈에 고장이 나다</font>“장애나 성적 소수자 인권 보호,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구제, 입법안에 대한 의견 제시, 공익인권단체 지원 등 다양한 일을 해요. 사건의 의미나 사회적 파급력이 중요한데, 저는 장애 분야를 맡고 있어요.”
요즘 그는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 중이다. 선거광고 방송을 하며 수화와 자막을 내보내지 않은 선관위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오늘부터 피고 대한민국이 보내온 답변서를 반박해야 한다. 잘되면 두고두고 보람이 클 일이지만 일의 양은 만만치 않다. 그는 일과 휴식을 어떻게 병행할까.
“음, 밤 11∼12시에는 자고 아침 7시에는 일어나고 싶은데, 할 일이 쌓여 있으면 기상 시간이 당겨지죠.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일할 때도 있으니까. 이런 몹쓸, 이제 보니 제가 집에 일을 싸오고 있군요. (웃음) 일은 사실 끝이 없어요. 더 잘할 수 있다 싶으니까 시간이 더 많이 걸리는 것 같아요.”
자주 밤늦게까지 애쓰는 그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아내는 짜증을 내기도 하는데 이 짜증이 부부 싸움의 빌미가 된다. “졸지 말고 그만 자라”는 아내에게 “내가 언제 졸았느냐?”며 화를 낼 때도 있단다. 아내는 진짜 안 졸았느냐고, 가재 눈을 뜨고 물었다.
“졸았어요. (웃음) 아내랑 저녁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퇴근 이후에는 회식이나 모임에 거의 참석하지 않아요. 딱히 일이 있어서가 아니고 그냥 같이 있을 시간이 그때밖엔 없으니까요.”
아내를 진짜 사랑하는 것 같다 하니, 이번엔 수줍게 웃는다. “아, 그렇게 되나요?” 아내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걸까. “호불호가 분명한 사람인데, 따뜻해요. 같이 있으면 편하고요. 내 모습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아도 되고, 일부러 과장할 필요도 없어요. 다른 사람에게 못하는 얘기도 다 할 수 있고요.”
결혼은 쉽지 않았다. 아내는 그보다 12살 연상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이 띠동갑 연상을 아내로 맞는 일, 어머니는 반대하셨다. “그래도 아들 고집을 못 꺾으셨죠. 사리 판단이 분명하신 분이에요. 결국 아들한테 지실 만큼. (또 웃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눈에 고장이 났다. 잘 부딪혔고, 달리기할 때는 아래를 봐야 했다. 징검다리도 건너기 힘들었다. 병원에서는 시야가 좁아져서 생기는 증세라고 했지만 그때까지도 심각한 줄 몰랐다. “시신경이 90% 가까이 죽었다 했어요. 녹내장이 원인인지, 뇌에 혹이 생겨선지 몰라 모든 검사를 했죠. 소용없었어요. 당시 대학원에서 생물을 전공했는데, 현미경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공부는 더 할 수 없었어요. 병원에선 좋아지진 않을 거다, 현 상태를 유지하는 수준이고 점점 나빠지는 일만 남았다고 했죠.”
점점 나빠지는 일만 남았다는 선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어 좋은 걸까, 아니면 날마다 슬픔이 자라나는 걸까. 그는 이 질문에 한참을 답하지 못했다.
“음, 지금은 이 정도 보이지만 앞으로는 더 못 보겠구나 싶은 마음에 그냥 좀 새록새록 해져요. 밤하늘의 별이나 달을 볼 때도 나중에 다시 못 볼 수도 있겠구나 싶고, 친구들을 볼 때도 ‘아, 눈으로 사진 찍듯이 저 친구의 모습을 기억해놔야겠다’ 그랬어요.”
<font size="3">대학원 다니다 로스쿨 지원</font>마지막으로 거울 앞에 서본 건 2009년. 이후로 그는 전맹(全盲)이 되었다. 살면서 보고 싶지 않은 일도 많았겠으나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은 순간도 마찬가지일 터. 완전히 보다가 완전히 못 보는 상황은 어떤 걸까.
“음, 그 상황은… 문득문득 한숨이 나죠. 한숨은, 눈이 안 보이는 걸 알게 된 뒤부터는 쭉 가는 거예요. 이건 변함없이 늘 있을 상황이니까. 일하다가도 ‘아, 내가 안 보이는구나’ 새삼스럽게 느껴요. 마치 창가를 바라보면서 ‘어, 밖에 뭐가 있네’ 이럴 때처럼. 아, 안 보이지 나는. 그렇게, 문득문득.”
그렇다면 삶의 동력은 어디에서 끌어다 쓰는 걸까. 욕망이 주로 눈으로 들어온다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온전히 욕망한다는 게 가능할까. 질문이 끝나자마자 그는 크게 웃었다. “아,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디 있어요? 이거 꼭 지면에 실어주세요.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다니, 이렇게. 여행의 맛은 아무래도 풍경을 보는 즐거움이겠죠. 그럼 저는 못 보니까 재미없을까요. 아니에요. 여행 가서 맛있는 걸 먹고, 걸으면서 좋은 공기도 마시고, 편안함도 느낄 수 있어요. 얼마든지 욕망하죠.” 망설임 끝에 골라낸 질문 앞에서 그는 자주 낄낄거리며 나를 놀렸다. “누가 먼저 프러포즈했어요?”라는 질문에도 “뭐예요, 바보 같아. 어리석은 질문이에요. 자석이 쇠붙이를 당기느냐, 쇠붙이가 자석을 당기느냐고 묻는 거죠.”
TV를 등지고 밥을 먹으며 드라마 속 배우들의 목소리만 듣고도 캐릭터를 짐작하고, 꿈결에는 그리운 이들을 본다는 김 변호사. 잘 웃고 순순히(?) 답하는 그는 너무나 동안이다. 어찌나 해사하게 웃는지 서른다섯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스스로를 어떤 상황에서든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는 타고난 낙천주의자라고 했다. 그런 이유로 일이 많다는 변호사가 돼도 괜찮다고 생각한 걸까?
“음, 이런 말 멋지게 잘하고 싶은데 잘 안 되겠죠? (웃음) 사회복지대학원에 다니던 차에 로스쿨이 있다, 장애인 특별전형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변호사, 판사, 검사 다 잘나가는 직업이잖아요. 대단한 고민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공익인권변호사모임을 택한 이유는 속도 때문이고요. 로펌이든 법원이든 고용돼서 일하면 의사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일을 해야 하고, 부담으로 쪼이고, 속도를 못 맞추면 불편하지 않겠어요? ‘희망법’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속도의 부담 없이 할 수 있어서 좋아요.”
볼 수 있다면, 다시 보고 싶은 건?
“음, 아내 얼굴,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그 얼굴인지 보고 싶더라고요. 그다음은 내 얼굴. 나는 얼마나 늙었을까 궁금해요.”
<font size="3">마음의 안중(眼中)이 열릴 때</font>태어나면서부터 고열로 시각을 잃은 스티비 원더. 그는 우리 인생에 얼마나 많은 노래가 숨어 있을까 궁금해하며 자신이 보는 내면의 감정을 곡에 표현해내려 했다. 말문을 열 때마다 김 변호사가 내뱉던 낮은 도 같은 ‘음…’도 그가 보고 느낀 내면을 세상에 전하는 미세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열린 만큼 분산되기 마련인 주의력은 생각 않고, 모든 감각을 다 써야 좋은 줄 알았다. 마음의 ‘안중’(眼中)이 열릴 때 진짜 세계를 보는 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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