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대립과 갈등의 노사관계를 종식시키고, 대화와 타협을 통한 상생의 노사관계로 변화해야 할 때입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누리집에서 손경식 회장이 전하는 인사말 가운데 일부다. 경총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등 사회적 대화기구는 물론 전국 단위 노사관계에서 ‘사용자’와 ‘경영계’의 입장을 대변해왔다. 그러나 경총 회장의 ‘상생의 노사관계’ 선언에도 불구하고 경총 임직원 3명이 집단적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의 부당노동행위 혐의로 2019년 12월17일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한겨레21>이 입수한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사건 재판기록을 보면, 경총이 삼성 편에 서서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고 상생을 부정해왔음을 알 수 있다.
협력사로부터 교섭권 위임받아 삼성의 뜻대로
1심 법원이 유죄로 인정한 경총 임직원(당시 직책 기준 노사대책본부장 남아무개, 노사대책2팀장 황아무개, 팀원 한아무개)들의 범죄행위는 ‘단체교섭 지연’이다. 노조법은 노조가 요구하는 단체교섭을 고의로 지연시키면 부당노동행위로 봐 처벌한다.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사 소속 엔지니어들이 2013년 7월14일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를 창립하자, 경총은 협력사로부터 교섭권을 위임받아 대신 교섭에 나섰다. 이는 경총이 회원사에 제공하는 서비스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교섭은 협력사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삼성의 뜻대로 움직였다.
잠시 노조 설립 이전으로 돌아와보자. 2013년 6월17일 국회에서 민주당 을지로위원회가 삼성전자서비스 불법파견 의혹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연다. 이에 부응해 고용노동부가 6월24일 수시근로감독에 착수하자, 삼성은 근로감독 결과 불법파견이 아니라는 판정을 얻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경총은 주요 회원사인 삼성을 위해 여론 조성을 비롯한 여러 활동을 벌여왔다. 검찰이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고용노동부의 삼성전자서비스 근로감독에 대한 건의’라는 경총 문건을 보면 “고용부가 (민주당의) 잘못된 주장을 바로잡지 않고 오히려 근로감독을 실시함으로써 기업들로 하여금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을 유발한다”며 “노동계 및 좌파 세력은 고용부의 불법파견 판정을 계기로 동시다발적으로 대규모 악성 분규를 야기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히고 있다. 건의치고는 사용하는 표현의 수위가 매우 높은 이 문건은 누구에게 건의할 목적으로 작성됐을까? 경총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는 “이 문건은 ‘포지션 페이퍼’(입장 문서)라 불리는데, 경총이 정부 내에서 고용부를 압박할 목적으로 청와대와 국가정보원, 경찰 정보국 등에 전달하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노조가 생기자 삼성은 협력사들을 경총에 가입시키고 단체교섭 권한을 경총에 위임하도록 한다. 이때부터 삼성과 경총이 ‘공모’한 부당노동행위가 시작된다. 노조 설립 초기 노조 와해 계획을 담은 ‘서비스 안정화 마스터플랜’을 보면, 조합 활동 대응 기본방향으로 “서비스에 대한 단체교섭 요구는 무대응, 협력사에 대한 단체교섭 요구는 최대한 지연, 지연 전략 실행시 부당노동행위 논란이 발생할 수 있으나, 강경대응을 통해 조속히 노조 와해 추진”이라고 적고 있다. 교섭을 요구하더라도 법적 절차에 따라 15일 이상 지연할 수 있다는 점을 적극 활용한 것이다.
교섭 지연 전술은 이랬다. 금속노조의 교섭 요구가 들어오면 “종업원이 금속노조에 가입했음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이유로 노조법상 단체교섭 절차에 해당하는 ‘교섭요구사실 공고’를 미룬다. 노조가 노동위원회에 시정을 요청할 경우에도 같은 이유로 소명하며 미룬다. 사실 당시 협력사는 물론 삼성전자서비스는 조합원 가입 현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교섭요구사실 공고 이후엔 ‘교섭참여 노동조합 확정’ 공고도 해야 하는데, 이 역시 “공고문 오타, 교섭일자 미기재 등으로 의도적 부실 공고”라는 계획을 세운다. 이렇게 교섭 시작을 미룬 뒤 노사 상견례를 하게 되면, “교섭 및 협약체결권 경총 위임사실 공지”를 하기로 했다. 애초부터 경총이 개입했으면서 뒤늦게 알리겠다는 것이다.
교섭 지연하다가 노조에는 “성실교섭 촉구”
이 계획은 실제로 이행됐다. 한 협력사 대표는 법적 절차에 따라 교섭요구사실 공고문을 사내에 게시했으나, “경총의 코치에 따라” 다시 공고문을 떼기도 했다. 삼성과 경총은 협력사별로 노동조건이 유사하기 때문에 공동교섭을 하는 것이 효율적임에도 협력사 개별교섭을 이어갔다. 경총의 남아무개 본부장은 삼성과의 회의 자리에서 “개별교섭을 통해 교섭을 지연할 계획이며, 단체교섭은 최소 11월까지 지연 가능할 것으로 판단되지만 국정감사 일정을 고려해 수위를 조절할 예정”이라고 의견을 개진한다.
경총은 이렇게 교섭을 지연하면서도, 이듬해 5월 노조가 교섭 결렬을 선언하며 투쟁에 돌입하자 “노조에 성실교섭을 촉구한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 이렇게 교섭을 지연시킨 것은 삼성전자서비스의 성수기인 여름철에 쟁의행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며,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노조 조합원들에게 “노조에 가입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려던 것으로 보인다. 모두 노조 와해 전략의 일환이다.
문제는 고의적인 교섭 지연이 노조법이 금지하는 부당노동행위임을 아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용자단체인 경총이 노조를 와해하려는 목적을 가진 삼성의 요구에 따라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교섭 지연 전술이 담긴 삼성의 ‘서비스 안정화 마스터플랜’은 경총과 상의하며 작성됐으며, 일주일에 한 번씩 삼성과 경총은 교섭 진행 상황을 점검하며 회의했다.
검찰이 기소하고 법원이 유죄 판결한 혐의는 노조 설립 초기 교섭 지연에 그치지만, 경총은 교섭이 이뤄진 뒤에도 삼성과 부당노동행위를 공모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삼성이 노동운동권 출신에 노동부 장관 보좌관을 지낸 송아무개 자문위원을 영입해 세운 ‘노조 소진전략’에도 경총이 부응했다. 당시 삼성전자 문건을 보면 “경총은 투쟁지역 고립화 전략에 따라 지역별 차등교섭을 하며 (중략) 실리주의 성향을 보이는 금속노조 서울·경기 지역과는 교섭을 진척시키는 한편, 투쟁 성향인 남부 지역과는 대립구도 유지”라는 말이 쓰여 있다. 또한 노조 조합원들이 있는 협력사를 기획폐업시킬 때 역시 협력사 대표들과 폐업 일정을 조율하는 등 행동대장 노릇을 했다. 노조 와해 전략 전반에 개입한 것이다. 황아무개 팀장은 2014년 6월28일 노조와 첫 단체협약이 체결된 뒤에는 삼성에서 별도의 수고비로 500만원도 받는다.
팀장은 단협 뒤 수고비 받기도
경총 임직원들처럼 노조법이 규정하는 ‘사용자’가 아니면서 부당노동행위로 처벌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유성기업 등에 노조 파괴 컨설팅을 했다가 실형을 선고받은 창조컨설팅 심종두 노무사가 드문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공교롭게, 그도 경총 출신이다.
“책임 있는 사용자단체로서 기여해왔는데 오늘 같은 일이 있어서 국민에게 송구스럽다.” “크게 문제 되는 일들은 하지 않았다고 보고받았다. 검찰 조사 결과를 지켜보겠다.” 노조 와해 사건으로 경총이 압수수색을 당했던 2018년 4월26일 손경식 회장이 밝힌 내용이다. 그러나 ‘책임 있는 사용자단체’ 경총은 1심에서 임직원이 모두 유죄 선고를 받았음에도 현재까지 아무런 입장 표명이 없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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