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28일, 삼성 미래전략실(미전실)이 공식 해체됐다. 삼성은 이날로 ‘삼성그룹’이라는 이름도 더는 쓰지 않겠다며 ‘계열사 자율경영 체제’를 선언했다. 1959년 창업주 이병철 선대 회장 시절 ‘비서실’로 시작해 ‘구조조정본부’(1998∼2006), ‘전략기획실’(2006∼2008) 등 수차례 이름을 바꿔가며 그룹의 컨트롤타워 구실을 해온 참모조직의 질긴 역사가 끝나는 날이었다.
삼성바이오 증거인멸 주도한 조직
그로부터 2년2개월이 지난 2019년 5월7일, 인천 송도의 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바이오)의 공장 바닥에서 수십테라바이트(TB)의 회사 공용 서버와 수십 대의 노트북이 발견됐다.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 업체인 삼성바이오가 회계 부정으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자, 직원들이 공장 바닥에 내밀한 정보가 담긴 서버와 노트북을 숨긴 것이었다. 이어진 검찰 수사와 법원의 재판 과정에서 삼성바이오의 조직적인 증거 인멸·은닉이 ‘삼성전자 사업지원티에프(TF)’의 주도로 일어났다는 게 밝혀졌다. ‘계열사 간 중복되는 업무를 조율’한다던 조직이 미전실을 대체하는 새로운 참모조직으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미전실 해체 9개월 만인 2017년 11월, 삼성전자는 ‘사업지원TF’라는 소박한 이름의 조직을 신설한다. 미전실에서 인사지원팀장과 경영지원팀장 등 핵심 보직에 있다가 미전실 해체와 함께 일선에서 물러났던 정현호 사장을 수장으로 하는 조직이었다. 최지성 전 미전실장이 ‘이건희의 사람’이라면, 정 사장은 1990년대 중·후반 이재용 부회장이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함께 공부할 때부터 인연을 맺은 ‘이재용의 사람’이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사업지원TF 힘의 원천에 이 부회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정현호 사장이 있다”고 짚었다.
삼성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삼성전자 사업지원TF는 각 계열사 ‘경영지원실장·재경팀·지원팀장’의 인사권을 통해 그룹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한다. 계열사 핵심 보직인 최고재무관리자(CFO)나 재경팀장 등이 사업지원TF가 고른 인물로 채워지기 때문에, 이들이 계열사 상급자의 요구보다 공식 지휘체계에는 없는 사업지원TF의 요구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삼성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사업지원TF의 지시로 보고서를 쓸 때는 계열사 대표이사에게 따로 보고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여전히 과거에 붙들린 이재용
삼성전자 사업지원TF가 계열사 재경팀을 통해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과정은 삼성바이오에서 벌어진 증거인멸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이때 삼성바이오에 증거 인멸·은닉 지시가 하달됐던 통로가 ‘사업지원TF-바이오 재경팀’ 창구였다. 증거인멸 사건의 1심 판결문을 보면, 삼성전자 사업지원TF 임원들은 검찰 수사가 가시화하던 2018년 5월부터 삼성바이오와 삼성바이오에피스의 재경팀 임직원에게 검찰 수사에 대비해 자료를 삭제하라고 지시했다. 직접 삼성바이오·에피스 본사를 찾아가 김태한 삼성바이오 대표, 고한승 에피스 대표를 비롯해 임직원 60여 명의 컴퓨터와 휴대전화에서 ‘JY, 부회장, 콜옵션’ 등의 열쇳말을 검색해 관련 자료를 삭제하는 과정을 점검하기도 했다. 미전실이 ‘승계 작업’을 주도했다면, 미전실의 후신인 사업지원TF는 ‘승계 작업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을 주도한 셈이다.
이 부회장은 여전히 ‘2015년 미전실’에 붙잡혀 있다. 서울중앙지검 경제범죄형사부(부장 이복현)는 2015년 5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하는 과정에서 국민연금 등 삼성물산 주주들을 설득하기 위한 로비와, 주가 부양을 목적으로 한 시세 조종 등이 일어난 정황을 파악해 수사 중이다. 삼성바이오의 회계 사기도 합병 과정을 사후 정당화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이 부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당시 합병은 미전실 임원들이 주도한 일이지, 나는 보고를 받거나 지시를 내린 바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검찰은 당시 미전실이 합병 상황을 이 부회장에게 직접 보고하고 수정 지시까지 받은 수백 건의 문건을 확보한 상황이다. 검찰은 이 부회장, 최지성 전 미전실장, 김종중 전 미전실 전략팀장에게 자본시장법 위반 등의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하지만 법원은 6월9일 “기본적 사실관계는 소명되었고, 검찰은 그간의 수사를 통해 이미 상당 정도의 증거를 확보했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이 부회장으로서는 한시름 놓은 셈이지만, 이미 확보한 ‘상당 정도의 증거’가 앞으로 이 부회장의 발목을 붙잡을 가능성이 크다.
이 부회장이 삼성물산 합병 등 승계 작업에서 도움을 얻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 시절 ‘비선 실세’인 최서연(최순실)씨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를 핵심으로 하는 ‘국정농단 뇌물 사건’도 여전히 파기환송심이 진행 중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8월 상고심에서 “미래전략실을 중심으로 삼성그룹 차원에서 조직적인 승계 작업이 진행”됐다고 인정했다. 대법원이 ‘이 부회장이 승계 작업을 위해 뇌물을 건넸다’고 인정한 것이어서 실형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왔지만,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정준영)가 ‘준법감시기구 도입’을 독려하고 이를 양형 사유로 고려할 뜻까지 내비치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를 감지한 삼성은 지난 1월 ‘준법감시위원회’(위원장 김지형)를 출범시켰고, 이 부회장은 준법감시위의 요청에 따라 5월 “이제는 ‘경영권 승계’ 문제로 더 이상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며 사과문까지 발표했다. 박영수 특별검사는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대법원 상고심의 판결 취지를 거슬러 이 부회장에게 편파적인 재판을 하고 있다’며 법원에 기피 신청을 했고, 이 사건은 현재 대법원 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에서 재항고가 진행 중이다.
고개 숙여도, ‘참모조직’은 여전한데
사업지원TF를 통한 계열사 경영 관여는 ‘현재진행형’이다. 삼성바이오의 조직적인 증거인멸을 교사한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임원이 집행유예로 풀려나자마자 삼성바이오 경영에 다시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한겨레> 보도로 알려진 게 불과 지난 5월이다. 정현호 사장이 수차례 검찰 소환조사를 받고, 미전실에 ‘불법 승계’를 지시한 혐의를 받는 이재용 부회장의 검찰 소환조사가 ‘초읽기’에 들어간 바로 그 시기에도, 사업지원TF는 여전히 ‘살아 있는 미전실’로 기능했다. 재벌총수의 그룹 지배력을 보위하는 데 집중하는 ‘참모조직’이 여전히 이름을 바꾼 채 남아 있는 것이다. 삼성 안팎에서 “사업지원TF 수뇌부가 건재한 이상 삼성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임재우 <한겨레> 기자 abbad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