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삼성에버랜드 노조 와해 사건’과 관련해 삼성 미래전략실·삼성에버랜드(현 삼성물산) 임직원 12명이 서울중앙지법에서 무더기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이날 법정에 서지 않았지만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된 삼성 고위 임원들도 있다. 삼성 미래전략실(이하 미전실) 문건에서 노조 와해 전모가 드러났는데도 “보고받지 못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이들은 책임을 회피했다. 삼성 임직원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로 검사와 나눈 질문과 답변(피의자신문조서)을 정리했다. 이 자료는 <한겨레21>이 입수한 재판기록 3만3천 쪽에 포함돼 있다.
삼성 임원들의 유체이탈
김봉영 현 삼성물산 상담역은 에버랜드에 삼성노동조합(현 금속노조 삼성지회)이 설립된 지 5개월 뒤인 2011년 12월, 삼성에버랜드 대표이사로 취임(2018년 1월 퇴직)해 검찰 조사 대상이 됐다. 김 전 사장이 취임했을 때 에버랜드에선 삼성노조 탄압이 진행 중이었고, 재임 기간에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에버랜드 노조 와해 관련 내용이 담긴 ‘S그룹 노사전략 문건’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노조와 관련해 어떤 보고를 받았는지 검사가 묻자 “노조가 2개 있다 정도의 보고를 받았다”고 답했다. “사장들은 매출과 이익에만 관심이 있지 노조에는 관심이 없다.”
검사는 김 전 사장 스스로 2014년 삼성지회의 부당노동행위 혐의 고소로 인해 고용노동청 조사를 받았던 사실을 들어 캐물었다. 그는 당당했다. “나는 노조원들이 없애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조원이 경영진을 감시하는 것이 당연한데, 내가 왜 쳐내려고 하겠나. 검사님이 나를 보는 시각과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호기는 여기까지였다. 2012년 12월 삼성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연 ‘CEO 세미나’ 동영상을 검사가 틀어줬다. 영상에선 ‘노조 설립 후 CEO의 고충’이라는 제목으로 김 전 사장의 발언이 흘러나왔다.
“지난해 7월 문제인력 4명이 회사의 징계를 회피하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외부 세력과 연대해서 노조를 설립했다. 이로 인해서 그동안 유지해오던 비노조 경영 체제가 깨지면서 그 자체만으로도 임직원에게 많은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중략) 아주 사소한 사안도 노동부라든지 경찰, 검찰 등 관련 기관에 고발을 남발하고 있다. 현재도 25건의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소요되는 비용, 시간의 손실이 굉장히 많이 발생되고 있고, 특히 회사가 부당노동행위로 제소를 당할 경우에 대표이사가 조사에 출석해야 되는 부담감이 있다.”
김 전 사장이 노조 활동을 알았을 뿐 아니라 노조가 생기지 않도록 하라고 다른 CEO에게 당부한 것이다. 이 동영상을 본 뒤 김 전 사장의 대답이 짧아졌다. “기억이 안 납니다.” “보고받은 적 없습니다.” 때로는 말줄임표로 대신했다. 검사가 “‘모르겠다’는 말로 부하 직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 하지만 그의 책임회피형 진술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노조가 와해됐을 때 대표이사였는데도 검찰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기승전 ‘책임회피’
“보고받지 못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는 책임회피형 답변은 노조 와해 전략을 세워 진두지휘한 미전실 임원도 마찬가지였다. 경찰대 출신으로 오랜 기간 미전실에서 노사 업무를 맡고, 노조 와해 내용이 담긴 그룹 노사 전략을 짠 강경훈 당시 미전실 인사지원팀 노사담당 부사장(삼성전자서비스·에버랜드 노조 와해 두 사건에서 기소돼 1심에서 도합 징역 2년10개월 실형 선고)은 검찰 조사에서 자신의 이름과 행위가 적힌 증거에 대해서만 “인정한다”고 답했다. “삼성전자서비스는 삼성전자의 자회사였기 때문에 노조 관련 전략은 삼성전자에서 담당했지 미전실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강 부사장의 상급자였던 정금용 당시 인사지원팀장(현 삼성물산 리조트부문·삼성웰스토리 사장)도 다를 바 없었다. “강 부사장으로부터 ‘소수 문제인력이 노조를 곧 결성할 것 같은데, 큰 임팩트가 없기 때문에 잘 관리해서 문제없도록 하겠다’는 보고만 받았을 뿐 다른 보고를 받은 적이 없다.” 그는 노조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이유로 “삼성테크윈 경영 진단 결과 대규모 비리가 발견돼 (이건희) 회장님이 격노했다. 테크윈 사장 교체, 사장단 인사와 조직문화 개선이 당면 현안이어서 거기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에버랜드에서 발생한 사찰, 어용노조 설립과 관련한 문건을 검사가 보여주자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답했을 뿐이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노조 조합원 6명을 전방위적으로 사찰해 1년4개월이나 ‘일일동향’을 작성하는 등 ‘노조 와해 문건’은 꼼꼼하게 작성해놓고 그 누구도 보고받지 않은 것이다. 초일류기업 삼성의 “깨끗한 조직문화”가 삼성전자의 컨트롤타워인 미전실을 중심으로 훼손되고 있는데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법위의 미전실’ 연속보도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88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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