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11일 대구에 봄비가 내렸다. 평일 오전인데도 중구 대신동 서문시장에는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흥정하는 이는 찾기 어려웠다. 서문시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정치적 고향 같은 곳이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의 역풍을 맞아 위기에 빠졌을 때, 2012년 대선에서 지지율이 주춤했을 때, 지난해 12월1일 국회 탄핵소추안 의결을 앞두고 찾은 곳이 서문시장이었다. 박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진공상태가 된 보수의 심장에서 홍준표 전 경남도지사가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 출마 선언을 했고, ‘배신자’라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유승민 바른정당 대선 후보는 서문시장 곳곳을 누볐다.
안철수 지지율 3주 만에 19%→48%“말 안 할라칸다. 찍을 사람이 어딘노. 터 자체가 그런 터다. 나가서 물어봐라.”
30년 넘게 잡화점을 운영하는 60대 초반 ㅇ씨는 10여 분째 지지 후보를 말하느니 마느니 간보기를 계속했다. “말 붙이지 마라”면서도 기자를 내치지 않던 ㅇ씨의 눈에 방영 중인 드라마 한 대목이 흐르고 있었다. 조조에게 잠시 의탁하던 관우가 조조를 위해 전장에 나서며 도원결의를 떠올리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청룡언월도를 들고 적토마에 탄 관우가 원소의 대군에 단기필마로 나서려는 찰나, ㅇ씨는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거 주는 거보다 여 주는 게 나은 거 아이냐고….”
거(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빨개이”이기 때문에 “거가 되면 안 되니까” 여(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를 찍겠다는 뜻이었다. 홍준표 후보에 대해선 “되겐나”, 유승민 후보에 대해선 “못 쓴다”며 짧고 분명한 평가를 남겼다. 다음편 예고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린 뒤 가까스로 “터가 그렇다”는 답을 들었다. 반기문, 황교안, 안희정을 돌고 돌아 가까스로 찾은 답이 안철수라는 것이다. 박근혜라는 상징을 잃은 대구·경북이라는 핵심 보수의 표심은 안철수 후보를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한국갤럽이 4월11~13일 전국 성인 남녀 101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결과(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를 보면, 안철수 후보 지지도는 지난주 무려 19%포인트 급등해 35%로 올랐고 이번주에도 다시 소폭 상승해 37%를 기록했다. 이에 견줘 문재인 후보는 한국갤럽 조사에서 처음 40%를 기록했다. 안 후보로 보수 중심 표가 결집하는 데 따른 ‘역결집’의 결과였다. 안 후보의 지지율 급등세는 2%포인트 하락한 서울을 비롯해 4%포인트 상승에 그친 인천·경기 등 이번주 들어 조정 국면에 들어선 듯 보인다.
이 가운데 유독 가파른 상승세를 보인 지역이 있다. 대구·경북이다. 지난주 19%에서 38%로 급등세를 기록한 데 이어 이번주 들어서도 다시 한번 10%포인트 상승해 48%까지 올랐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www.nesdc.go.kr) 참조). 채장수 경북대 교수(정치외교학)는 “대구·경북 지역 보궐선거 결과가 말해주듯 이 지역 사람들은 언제라도 자신을 대변할 후보가 있으면 표를 줄 준비가 돼 있다.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 상승도 바로 이런 민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촛불집회의 영향이 대구·경북 민심을 많이 바꿨다는 평가가 있지만, 최소한 50대 이상은 박 전 대통령의 실정에도 지금까지 이어온 정치적 입장을 바꿨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4월12일 경북 상주·군위·의성·청송 지역 국회의원 재선거에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보수세력 분열이라는 불리한 6자 구도에서도 친박 핵심인 김재원 자유한국당 후보가 당선됐다.
“문재이니는 못 믿는다”안철수로 모여드는 밑바닥 표심은 감지됐지만 ‘왜 안철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중구난방이었다. ㅇ씨처럼 “빨갱이”라는 거친 말을 토해내는 이들도 있지만,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박 전 대통령의 잔상은 여전히 강력했다.
서문시장에서 아들과 함께 옷·신발을 판매하는 김양수(58)씨도 마찬가지였다. “왜 안철수를 지지하냐”고 질문하자 돌아온 답은 ‘박근혜’였다. 그는 “사실 구속까지 했어야 되겐나”고 했다. 불쌍해서 뽑고, 불쌍해서 돕고….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대구·경북의 습관적 연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래야 되겐나”라던 김씨는 “안 후보는 용서해줄 줄 안다”고 말했다. 안 후보는 4월13일 첫 대통령 후보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대통령 사면권에 대한 질문에 “지금 사면이 된다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국민의 뜻에 따라 원칙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대구·경북이 안철수란 ‘답’을 내놓는 과정 곳곳에는 논리적 오류와 비약이 눈에 띄었다. 서문시장에서 만난 황아무개(58)씨에게 ‘북한에 퍼다줄 빨갱이라서 싫다고 하는데,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수행한 핵심 인물 아니냐’고 물었다. 황씨는 “그 점이 마음에 걸린다”면서도 “그래도 문재인보다는 낫지 않겠나”라고 답했다. 문 후보는 박 대표가 대북 송금 사건으로 구속될 때 민정수석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그때는 그때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대구의 이러한 모순을 가장 잘 인식하는 것은 어쩌면 대구 사람 자신일지도 모른다. 황씨가 말을 이어갔다. “지금까지 나는 대구를 한 번도 안 벗어났고, 내가 찍는 후보도 한 번도 바꾼 적이 없다. 솔직한 말로 그 테두리에서 살아왔는데…. 답답하다. 분명한 건 문재이니는 못 믿겠다. 안철수도 뚜렷하게 내가 좋아할 사람은 아니지만 대안이 없다.”
대구 사정에 밝은 한 민주당 관계자는 “김부겸 의원을 찍은 지지자들조차 문재인은 싫다는 것으로 돌아서는 분위기에 딱히 방법을 찾기 어렵다”고 난감해했다. 그는 이런 현상을 두고 “싫다는 한마디에 모든 게 담긴 것 같다. 감정적인 것을 분석해야 한다. 대구 사람들에게 ‘적폐’라고 공격하는 것은 이쪽 정서를 잘 몰라서 하는 얘기다. 울고 싶은데 뺨 때리는 격”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감정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더라도 일단 역지사지해보려고 해야 하는데, 촛불 민심을 앞세워 일방적으로 당위만 내세우면 표심이 돌아설 리 없다. 김부겸이 몇 차례 낙선 끝에 대구에서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를 빨리 깨달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4·13 총선에서 김부겸 의원을 찍었다는 한 60대 전문직 남성은 “2012년 박근혜 대통령과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문재인은 우리 편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샤이 진보, 샤이 문재인이런 흐름과 관련해 김태일 영남대 교수(정치외교학)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연민과 보수정당 붕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응축된 곳에 빨갱이라는 이념적 판단이 더해진 상황이다. 대구의 선택이 정서적 판단을 근거로 했다고 해서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물론 호남에 ‘샤이 보수’가 곳곳에 있듯, 대구·경북에도 ‘샤이 진보’ 또는 숨은 문 지지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대구 시내의 한 40대 상인은 “문재인 지지자”라고 했다. 이어 “처음에는 안희정 지지자가 굉장히 많았다. 안 지사가 경선에서 탈락하고 나서 문 지지자가 되지 못하고 침묵하는 사람이 다수”라며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문재인을 지지한다고 하는 순간, 박 전 대통령을 구속하도록 한 장본인을 지지하는 배신자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쉽게 말하지 못할 뿐”이라고 했다.
문제는 투표다. 문재인 후보가 ‘싫다’는 감정만으로 안철수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게 가능할까. 차악을 선택해 최악을 피하겠다는 전략적 선택은 선거 역사에서 낯선 풍경이다. 당선 가능성을 보고 차선도 기꺼이 선택하는 호남의 비판적 지지와는 결이 다르다. 투표 참여 여부에 대해서는 황씨처럼 “나는 단 한 번도 빠져본 적이 없다”는 쪽과 ㅇ씨처럼 “투표해야지 않겐나”면서도 “대구가 투표율이 제일 낮을 거라 카대”라는 쪽으로 의견이 갈렸다.
의견이 엇갈리기는 지역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채장수 교수는 “지지 후보에게 일정하게 자신의 욕망이 투영돼야 하는데 안 후보에게는 ‘문재인을 잡아달라’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이 감지되지 않는다. 포지티브한 지지가 아니라서 앞으로 얼마나 더 구심력이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태일 교수는 “대구·경북에선 전통적으로 집단성이 굉장히 강하다. 그냥 이 상황을 회피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겉으로 드러난 안철수 돌풍의 물밑에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보수의 혼돈’이 잠복해 있었다.
50대 이상과 달리 40대 이하에선 어느 누구에게로의 쏠림이 관찰되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촛불집회 경험이 정치적 관심을 환기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젊은 세대들은 지역공동체 안에서 구전을 통해 정치색을 단일하게 만들어가는 윗세대와 달리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여러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대구 시내에서 자영업을 하는 박정원(39)씨는 이번 촛불집회에 탄핵을 앞두고 단 한 번 참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 “꼭 투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지난 선거에서 박근혜씨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지난 촛불집회 기간 동안 박씨는 이재명 성남시장의 지지자가 됐다. 가게를 운영하는 틈틈이 스마트폰으로 이 시장의 정책을 찾아보고 공감했다.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경선이 끝난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문재인”이라고 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정책은 비슷비슷하고, 다만 무엇을 하겠다고 하면 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국민의당보다 민주당의 세가 더 크고 뭔가를 할 수 있을 거 같아서”다.
촛불 세대의 선택은 다를까경북대 캠퍼스에서 만난 최우찬(24)씨는 “촛불집회를 겪으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 투표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왔으니 진도가 많이 나간 것”이라고 했다. 최씨는 문 후보를 지지했지만 대선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남은 만큼 다른 선택을 할 여지도 있어 보였다. 권회윤(23)씨처럼 촛불집회에서 후보를 정한 경우도 있었다. “슈퍼우먼 방지법을 만들겠다는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좋아 보인다. 내 표가 사표가 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심 후보를 향해 지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대 갈등에 대한 걱정도 나왔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다는 오수진(20)씨는 “어른들은 왜 저렇게 싫어할까 싶을 정도로 문재인 후보를 싫어한다. 이해하기 힘들다”며 “선거가 끝난 뒤 지역 내에 갈등이 남을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세대 간 투표 행태의 극적 갈림이 향후 이 지역에서 ‘정치적 효능감’(자신의 정치적 참여가 실제 정치 과정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주관적 믿음)을 불러일으킬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김태일 교수는 “대구·경북에서는 항상 선거가 시작도 하기 전에 게임이 끝난 것처럼 보였는데 표가 갈리니 정치적 다양성이 실현될 가능성이 생긴 것”이라며 “다양성 속에서 경쟁이 생겨나고 경쟁 과정에서 각 정당들은 유권자가 선택의 가치를 느낄 만큼 정책을 준비할 것이다. 이는 긍정적 효과”라고 말했다.
대구=글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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