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의 봄은 올까? 인적이 끊긴 지 오래다. 관광 재개의 기회는 사라져가고 있다. 북한은 아예 금강산에서 나가달라고 한다. 시름시름 앓던 남북관계가 결국 금강산 사업에 직격탄을 쏘았다. 남쪽 사람들이 사라진 금강산은 조만간 중국 관광객 차지가 될 전망이다. 이래도 되는가? 정주영의 꿈이 사라지고 있다. 비극적 삶의 흔적이 묻어 있는 정몽헌 회장의 비석이 울고 있다.
합의대로 이행됐다면 1989년 7월 시작금강산은 남북관계의 무대다. 당국자가 만나고, 이산가족들이 얼싸안는 만남의 광장이다. 평범한 남쪽 사람들이 북쪽 사람을 처음으로 접하는 접촉의 공간이며, 통일 체험의 현장이다. 물론 관광 사업은 정치·군사적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남북관계가 악화되면 가슴을 졸이고, 좋아지면 발걸음이 가볍다. 그것이 금강산이 걸어온 길이다. 그렇게 비틀거리면서도 여기까지 왔다. 남쪽 사람 195만 명이 발자국을 찍었는데 여전히 불신의 계곡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현실이 답답하다. 금강산 관광을 조금 더 일찍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어느 누구도 지울 수 없는 접촉의 길, 희망의 길을 좀더 일찍 다졌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금강산 관광은 1998년 11월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9년 전인 1989년에 시작될 수도 있었다. 정주영 회장이 북한을 방문해서 금강산 관광 사업을 합의한 것이 1989년 1월이다. 당시 북한은 금강산 개방을 결정했다. 사회주의권의 위기가 본격화되면서, 외화를 벌 수 있는 방법으로 금강산 개방을 결정한 것이다. 처음에는 일본 쪽 기업을 찾았다. 그러나 당시의 한반도 상황에서 투자할 기업은 많지 않았다. 결국 몇 다리를 건너 임자가 나타났다. 금강산에 투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가 바로 정주영 회장이었다. 금강산이 지척인 통천에서 나고 자랐고, 그곳에 친척들이 살고 있고, 꿈과 추억이 어린 고향이었다. 수구초심이라고 했던가? 정주영 회장은 사업적 이익보다 고향 투자로 접근했고, 단기적인 계산보다 장기적인 공적 공헌을 우선했다.
물론 1989년의 남북관계는 봄이었다. 노태우 정부가 북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전두환 정부에서 시작된 박철언과 북한 수석대표 한시해의 비밀 접촉이 활기를 띠었다. 한반도에서 냉전의 두꺼운 얼음들이 녹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주영 회장의 방북이 이루어졌다. 노태우 대통령도 격려했고, 박철언 팀이 지원했다.
정주영 회장은 1989년 1월24일 방북해서 2월2일 서울로 돌아왔다. 고향 통천을 방문해 그의 오래된 이산의 한을 풀기도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금강산 관광 사업에 대한 합의였다. 북한은 그해 7월부터 관광을 허용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외금강과 명사십리에 호텔 2개, 삼일포·시중호·내금강·동중호에 각각 호텔 1개씩을 짓겠다고 약속했다. 남한 기업인을 비롯해 국제자본을 유치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합의사항이 그대로 이행되면, 1989년 7월에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눈꽃 속에 핀, ‘때 이른 동백’이라고나 할까? 한반도의 국제정세는 봄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국내적으로는 여전히 겨울 공화국이었다. 정주영의 방북을 받아들이는 우리 정부 내부의 기류는 복잡했다. 1989년 2월18일 박세직 안기부장이 주재하는 북방정책조정위원회는 정주영 회장이 북한의 최수길 조선아시아무역촉진위원회 고문과 합의한 의정서를 ‘사문서’로 규정했다. 법적 효력이 없는 민간 차원의 합의라는 것이다. 여기에 1989년 3월25일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공안 정국이 조성되었다. 금강산 관광 사업에 대한 합의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1990년 남북 고위급 회담이 시작되고,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가 채택되는 상황에서도 금강산 사업의 불씨는 살아나지 못했다. 그렇게 첫 번째 기회는 피지도 못하고 사그라졌다.
‘접촉을 통한 변화’ 정책의 상징
그리고 정주영 회장이 정치에 뛰어들면서 금강산 사업은 결과적으로 위기를 맞는다. 정 회장은 1992년 1월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그해 3월 총선에서 31석을 얻었다. 창당 45일이 된 신생 정당치고는 대단한 성과였다. 그리고 대선에 출마했다. 가족은 모두 말렸다. 그러나 정 회장은 “모두 우거짓국 먹고 살 각오해라. 죽으면 맨몸으로 가는 게 인생인데 망한다고 해도 아까울 거 없다”며 배수진을 쳤다. 대선전에 나선 정 회장의 공약은 거침이 없었다. “공산당 결성 막을 이유 없다”는 말로 홍역을 치렀지만, ‘아파트 반값 공급’ 같은 공약은 대중적 호응을 얻었다. 물론 허경영식 공약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남북관계’에 대한 공약에는 진정성이 묻어 있었다. 정 회장은 “집권하면 2년 이내 금강산과 명사십리 관광을 시작하고, 이산가족이 자유 왕래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금강산 사업에 대한 의지는 그가 정치를 결심하게 된 동기 중 하나이기도 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그는 16.3%를 득표했고,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정 회장의 말처럼 후회는 없을지 모르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1993년 1월 정 회장은 선거법 위반과 횡령 혐의로 소환되었고, 결국 2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정 회장의 도전은 실패했다. 금강산 관광 사업이 꽃피울 기회도 사라졌다. 김영삼 정부 초기 금강산 사업은 거론조차 할 수 없었다. 정치적 낙인이 찍힌 셈이었다. 1995년께 김영삼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과의 관계를 복원했지만, 그때는 남북관계가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태였다. 김영삼 대통령과 회동하고 한 달쯤 뒤인 1995년 9월 정 회장은 방북 승인 신청서를 통일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정부는 그의 방북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대북정책에서 정치와 경제를 연계하는 전략을 고집했다. 핵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경제협력과 민간교류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남북관계의 ‘잃어버린 5년’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금강산 사업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이 되어서야 시작될 수 있었다.
금강산 관광이 9년, 아니 최소한 5년 일찍 시작되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때를 놓치면 치러야 할 비용이 높아진다. 금강산 관광은 ‘접촉을 통한 변화’ 정책의 상징이다. 접촉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기회다. 동시에 상호 이해의 계기이다. 한반도는 전쟁을 겪었고, 동·서독처럼 분단 초기부터 인적 교류가 허용되지도 않았다. 통일 논의는 정부가 독점했고, 국가보안법의 서슬 퍼런 칼날이 민간교류를 원천 봉쇄했다. 냉전의 세월이 남아 있는 현실에서 접촉의 풍경은 복잡하다.
접촉 초기에는 충돌이 불가피하다. 관광이 시작되고 우리가 겪었던 소동들, 예를 들어 금강산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는 사람, 탈북자 얘기를 꺼냈다가 억류된 사람, 교통사고로 북한 군인이 사망하고, 총격 사건으로 관광객이 사망하는 사건·사고들, 일찍 시작했어도 우리가 겪어야 할 통과의례였다.
그러나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라면, 차라리 일찍 겪는 게 났다. 돌이켜보면 노태우 정부에서는 너무 일렀다. 김영삼 정부에는 과도한 기대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에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면, 남북관계는 조금 일찍 불신의 계곡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불신의 계곡에는 과거가 미래를 지배하고, 오해가 이해를 앞서며, 이념이 이익의 자리를 차지한다. 분단의 세월을 넘어 평화통일의 미래로 가기 위해 우리는 그 계곡을 통과해야 한다. 신뢰의 언덕으로 올라서야 한다. 그러자면 차이를 인정하고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
금강산 관광은 분단의 선을 관통하는 평화의 회랑이다. 핵 문제를 둘러싼 국제 환경 속에서, 남북한의 정치·군사적 불신의 늪에서, 소통의 회랑이 있다면 그만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가 많아짐을 의미한다. 북한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국제 외교무대에서 한국의 발언권은 높아진다. 김영삼 정부 때 금강산 관광을 시작했다면, 1994년 제네바 회담 당시 “협상에 끼지 못하면서 비용만 지불했다”는 비판은 면했을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한-미 관계는 피했을 것이다. 강경한 대북정책으로 미국의 발목을 잡는 남-북-미 삼각관계의 악순환이 아니라, 클린턴 행정부와 함께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선순환을 이루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남북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북핵 문제도 조기에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조금 일찍 시작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금강산에서 벌어진 ‘오해가 빚은 소동’을 극복할 용기와 철학이 있었다면 한반도 정세는 달라졌을 것이다.
북한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쿠바의 사례처럼, 관광 개방은 산업시설이 부족하고 단기간에 수출산업을 육성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외화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다. 북한은 금강산에서 얻은 달러로 식량을 사오거나, 중국산 소비재나 생산재를 구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북한이 겪었던 최악의 경제위기인 ‘고난의 행군’을 피했을 수 있다.
금강산은 또한 경제협력이다. 현대라는 민간기업의 대북사업이다. 현대가 앞장을 섰지만, 이는 다른 기업의 대북 진출에도 긍정적 자극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금강산 관광이 잘되면, 당연히 남북 경제협력도 활성화되게 마련이다. 경제협력에서 적정한 시점은 매우 중요하다. 남북한의 경제력 격차가 벌어지면, 그만큼 협력의 공간도 줄어든다. 기술 격차가 조금이라도 덜 벌어졌을 때 협력해야, 서로 이익을 볼 수 있다. 지금 한국 경제는 중소기업이라도 자동화율이 높다. 과거 사람이 맡던 공정을 이제는 기계가 대신한다. 북한의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분야가 신발이나 봉제, 혹은 초보적 기계 조립 분야로 한정되는 이유는 경제협력의 적정한 시점을 놓쳤기 때문이다. 국제적 비교우위의 사이클을 봐도 그렇다.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산 저가 상품이 세계 시장을 휩쓸기 전에, 남북 경제협력이 활성화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노태우 정부에서 김영삼 정부로 넘어가던 시점에 한국 경제가 북한 노동력을 활용했다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금강산은 이산가족들의 만남의 광장이다. 시간, 이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 고령의 이산가족들이 이승에서 마지막 소원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있다. 5년 혹은 9년 일찍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 일찍부터 상봉이 이루어졌다면, 이산가족 면회소도 좀더 일찍 만들어졌을 것이다. 한 번의 상봉은 가혹하다. 만나자 이별이라니, 기다림의 세월보다 아프다. 이산가족 면회소가 그곳에 있으면 금강산 관광도 하고 보고 싶은 가족을 다시 만날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산가족 면회소는 노무현 정부가 끝날 때쯤 완공됐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는 사용할 일이 없어졌고, 결국 최근 북한의 자산 동결 대상에 포함되었다. 몇 년이라도 일찍 완공되었다면, 지금처럼 개점도 못하고 휴업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 것이 아니게 된 금강산의 봄금강산 관광은 조금 더 일찍 시작할 수도 있었다. 1998년 11월18일 첫 번째 관광객을 태운 배가 동해의 푸른 물결을 헤치고 역사적 고동 소리를 울릴 때, 늦었지만 다행스러웠다. 물론 그때부터가 또 다른 시련이었다. 두 번 서해에서 군사적 충돌이 벌어졌고, 북핵 문제의 롤러코스트가 몇 번이나 반복되었고, 현대의 재정적 어려움도 있었다. 관광객이 빚어내는 문화적 충돌은 또 얼마나 많았는가. 그러나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금강산의 봄은 남쪽 관광객의 것이었다. 평화의 회랑을 지키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고, 현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금강산의 봄은 우리 것이 아니다. 관광객 총격 사건이 계기가 되었지만, 관광대금이 북한의 핵개발에 사용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관광 재개를 원치 않는다. 게다가 남북관계의 앞날에 짙은 어둠이 내리고 있다. 중국 관광객이 차지하게 될 금강산, 지켜보아야만 할까? 남북관계를 책임진 정부 당국자들은 ‘잃어버릴 시간’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 평가를 두려워해야 한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통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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