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정연주가 돌아왔다. 해직 기자, 논설주간, 한국방송 사장 등은 언론인 정연주를 설명하는 작은 수식어일 뿐이다. 1970년 이래 그는 매양 ‘언론인’이었다. 오직 지난 1년은 예외다. 말과 글을 놓았다.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를 업무상 배임 혐의자로 지목한 권력과 검찰에 맞서느라 법정만 오갔다.
지난 8월18일 서울중앙지법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검찰의 모든 기소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의 완전한 결백은 양심의 심급에 이어 법률의 심급에서 다시 한번 입증됐다. 그리고 그는 무척 오랜만에 글을 썼다. 8월31일, 엄기영 문화방송 사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에 기고했다.
“온갖 인간적 모멸과 비난, 겁박”이 있더라도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말라”고 썼다. 도종환 시인의 시도 인용했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돌아온 언론인 정연주를 9월2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 모처럼 쓴 글이 엄기영 사장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 사람, 지금 굉장히 외로울 것이다. 나도 지난해 비슷한 처지에 있었으니 안다. 모든 걸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주변에서 격려해줄 것 같지만, 의외로 그런 사람이 많지 않다. 지난해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3명이 격려 메시지를 보냈다. 리영희 선생이 떨리는 손으로 직접 쓴 팩스를 보냈다. “당신은 지금 12척의 배를 가진 이순신과 같다. 마지막까지 지켜라.” 백낙청 선생은 전화를 했다. “정형, 장렬하게 전사하시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다른 사람을 중간에 넣어서 말씀을 전해왔다. “지금 정 사장은 참 의로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세 분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됐다. 최근 문화방송 상황을 보면서 그때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힘을 보태려고 편지를 썼다.
- 편지에서 “오만한 정권에는 반드시 국민의 심판이 따른다”고 썼다.
= 나한테 그리고 미네르바, , YTN, 문화방송 등에 저지른 행태를 봐라. 인간의 권리, 프라이버시, 인격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온갖 무리한 짓을 하면서 나를 강제 해임했다. 이제라도 부끄러움이나 미안함을 느낀다면 그 집단에 희망이 있다. 그런 게 안 보인다. 굉장히 안타깝다. 역사는 폐쇄에서 개방으로, 경직에서 유연으로, 획일에서 다양으로, 독점에서 분산으로 발전한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의 흐름을 분명히 거스르고 있다. 그 권력은 오래 못 간다.
- 이번 무죄판결을 예상했나.
= 재판부가 상식적인 판단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했다. 검찰의 기소가 워낙 일방적이었다. 그러나 재판부가 검찰의 10개 공소 항목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부인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판결 이후 어느 원로 법조인을 만났다. 40여 년의 법조 생활에서 검찰 주장을 이처럼 일일이 반박한 판결을 처음 봤다고 했다. 그만큼 검찰의 공소 자체가 비상식적이었다.
‘정연주 축출’에는 모든 권력 집단이 총동원됐다.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은 정연주 사장을 ‘퇴출 0순위’로 지목하는 논평과 사설과 기사를 대선 직후부터 연일 쏟아냈다. 지난해 5월, 뉴라이트전국연합이 부실경영·편파방송을 이유로 국민감사를 청구했다. 감사원은 엿새 만에 특별감사에 착수한 뒤 정 사장의 해임을 정부에 권고했다. 6월엔 한국방송 외주제작사 7곳에 대한 국세청 조사가 시작됐다. 8월에는 한국방송 이사회가 정 사장 해임을 제청했고, 대통령이 이를 승인했다. 그 직후인 8월12일 검찰은 자택에서 그를 긴급체포했다.- 예전에도 체포당한 적 있지 않나.
= 1978년 박정희 정권 시절,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해직 기자 시절이었다. 지난해 체포는 30년 만에 다시 겪은 일이다. 이제는 표현·사상의 자유를 다투는 영역에서 잡혀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사회가 그 정도는 성숙했다고 봤다. 아니었다. 이렇게 시대가 거꾸로 가고 있구나 싶었다.
- 검찰 조사 때 분위기는 어땠나.
= 차장검사는 “조사 잘 받고 가시라”고 인사했다. 나는 줄곧 진술을 거부했는데, 부장검사가 와서 진술을 권유했다. 조사는 담당 검사가 맡았다. 내 인신을 구속하는 것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마음은 평온했다. 부끄러운 게 없었으니….
- 30년 전과 다른 게 있었나.
=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검찰도 미안해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번에는 검찰이 당당하더라. 처음부터 검찰이 언론에 공소 내용을 흘렸다. 구속감이라는 둥, 배임이 확실하다는 둥의 이야기를 검찰 간부들이 흘렸다. 보수 언론을 통해 나는 이미 회사에 1800억원의 손해를 끼친 중죄인이 돼 있었다. 조사받을 때도 검찰은 구속시킬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44시간 조사 끝에) 풀어주더라.
- 구속되지 않은 이유를 짐작하나.
=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검찰이 예전 검찰 출신 법조 인사들에게 의견을 물어봤다고 한다. 정연주를 구속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 문의를 받았던 사람이 나한테 직접 전한 이야기다. 처음부터 구속영장을 청구하려고 움직였다는 증거다. 나한테 그 이야기를 전한 사람은 “(세금 소송에서) 법원이 조정한 걸 수용했는데, 어떻게 (그것을 배임이라고 보고) 구속영장을 청구할 수 있느냐”고 답했다 한다.
- 검찰이 예단을 갖고 움직였다는 건가.=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권력기관이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다. 검찰·경찰·국세청·국정원·감사원·기무사 등이 정치 권력에 적극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문화방송 사건을 봐라. 작가의 전자우편을 뒤져서 증거로 삼는다. 그런 짓을 하면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나.
- 기소 주역들이 영전했다.
= 검찰이 배임 혐의로 기소한 대목은 나를 한국방송 사장에서 해임하는 데 중요한 근거였다. 이번 재판에서 그 기소가 일일이 반박당한 건 검찰 처지에선 수치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당시 지휘 계통에 있던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모두 승진했다. 인사상 불이익은커녕 보상을 받은 것처럼 됐다. 재판에선 지더라도 그저 기소한 것만으로 검찰의 역할을 다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정말 비극적인 일이다.
- 검찰과 국세청 등이 여러 ‘뒷조사’를 했다던데.
= 상상을 초월한다. 참 야비한 사람들이다. 국세청이 외주사 세무조사를 했는데, “정연주 비리만 불면 모두 봐주겠다”고 회유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의 조사로 아예 문 닫은 외주사도 있다. 감사원 감사 때는 내 운전사를 세 번이나 불러 조사했다. 전체 한국방송 직원들의 주민등록번호를 내놓으라고도 했다. 법인카드는 당연히 뒤졌다. 전북 부안에 드라마 세트장을 지었는데, 그곳이 아내 고향이라는 점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도 조사했다. 내가 사는 동네 슈퍼마켓도 탐문했다. 자기들은 그런 방식으로 살아왔으니, 나 역시 뒤지면 당연히 (비리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집요했다.
- 군사정권 때의 언론 탄압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단순 무식했다. 그냥 (사무실에서) 끌어냈다. 대신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교묘하면서도 저질스럽다. 온갖 권력기관을 동원해 뒷조사를 하고 전자우편을 뒤져서 파렴치범을 만들고 여론 조작을 한다. 그러다 안 되면 무능하다는 구실을 대서 사람을 인격적으로 살해한다. 차라리 대통령과 국정 철학을 함께하는 사람을 사장 시키고 싶어서 나를 해임하는 것이라고 했다면 문제가 단순했을 것이다. 지금 문화방송에 하는 짓도 마찬가지다. 엄기영 사장한테 무능경영·방만경영이라고 하지 않나.
그는 2003년 4월 한국방송 사장에 취임했다. 2006년 11월 연임에 성공해 두 번째 임기를 맞았다. 참여정부 시절 조·중·동이 가장 많이 비판하는 인물이 노무현 대통령, 두 번째가 정연주 한국방송 사장이라는 농담 같은 진실이 인구에 회자됐다. 그들은 임기 초반에는 ‘코드 인사’라고 비판했고, 지난 대선 이후에는 ‘방만경영’이라고 트집을 잡았다.- 방송 경력이 없는데 방송사 사장이 됐다.
= 방송 경험 없고, 경영 경험 없고, 논설주간이 경력의 전부라고 처음부터 말이 있었다. 방송은 언론의 한 부분이다. 언론의 정도를 걷는 게 중요하다. 전문성을 따지는데, 나는 방송 전체, 언론 전체에 관심이 많았다. 사장이 되고 만난 자칭 방송 전문가의 대부분은 자기 분야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험구에 구구하게 대응하진 않았다. 기자가 기사로 말하듯 나는 방송으로 보여주려 했다.
- 당시 보수 언론은 ‘코드 인사’라고 비판했는데.
= 당시 시민사회단체에서 나를 포함해 3명의 언론계 인사를 사장 후보로 추천했다. 자천타천 포함해 모두 20명이 넘는 인사가 후보였다. 이사회에서 투표를 하는데, 이사 11명 가운데 직접 출마하거나 후보자와 친인척인 2명을 제외하고 9명이 투표했다. 내가 5표, 다른 후보가 4표를 얻었다. 이걸 왜 자세하게 설명하는지 아는가. 내가 사장이 된 과정은 결코 (청와대에 의한) ‘낙점’이 아니었다.
- 사장 재임 시절, 한국방송 내부의 ‘반대파’까지 품어안았다면 어땠을까.
= 어떤 가치를 우선할 것인지의 문제가 있다.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공영방송이 본연의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현업 언론인의 자율성을 확대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을 누린 사람들이 직함을 잃었다. 그것을 모두 아우르지는 못했다. 그들에 대한 ‘정치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막상 정치력을 잘 발휘했다면 내부 갈등은 줄었을지언정 언론 본연의 역할을 끌어올리는 데는 소흘했을 것이다. 거기까지가 내 한계다. 그 선택에 대해선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 형식논리를 따지자면, 지금의 보수 세력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견을 다 품어안지 못하지만 공영방송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려 한다고….
= 형식논리로는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판단해보자. 내 재임 시절에는 한국방송의 영향력과 신뢰도가 1위였다. 지난 1년 동안 그 지위를 다 놓쳤다. 현재의 한국방송에 대한 평가는 내가 직접 내릴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사회적 평가가 있다. 한국방송의 보도와 프로그램이 국민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지가 중요하다. 나는 권력을 모두 아래로 내렸다. 복잡한 의사결정 구조를 없애고 팀장 중심의 체제를 만들었다. 자율권 확대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일선에서 결정하면 나는 추인했다. 그 결과 좋은 프로그램과 힘있는 보도가 나왔다. 그게 독선인가.
- 편향방송·방만경영 등의 비판은 어떤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게 (지금은 해체된) 탐사보도팀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비판했는데, 참여정부가 매우 불편해했다. 그러나 공영방송의 핵심은 비판적 저널리즘이다. 영국의 가 대표적이다. 보수 세력은 가 ‘리버럴’하다고 욕하지만, 사회 현안과 권력에 대한 비판 보도를 그 나라 사람들이 신뢰한다. 경영 면에서는 2004년과 2007년 두 해에 적자가 난 것은 맞다. 그러나 재임 5년 전체로 보면 흑자다. 오히려 이익잉여금은 재임 이전보다 늘었다. 무엇보다, 공영방송을 어떻게 수익성의 잣대로만 평가하나. 한국방송이 만들어진 뒤 처음으로 신뢰도 1위, 영향력 1위를 차지했다. 그게 진짜 경영 성과 아닌가.
- 에서 글 쓰는 언론인으로 계속 남을 생각은 없었나.
= 2002년 11월에 를 떠났다. 한국방송 사장 이야기가 나오기 훨씬 전이다. (창간 주역이던) ‘동투’(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투’(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세대가 떠나고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봤다. 장차에 대한 대책 없이 그냥 신문사를 떠났다. (한국방송 사장은) 글을 쓰는 것과 다른 차원에서 언론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봤다. 언론계 후배들이 더 넓고 자유로운 공간에서 보도하고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게 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후배를 만났고 행복했다. 그들과 동지가 되고 벗이 됐다.
이번 판결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국방송 사장에 복직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검찰이 항소했으므로 2심 재판이 예정돼 있다. 해임무효 소송은 아직 1심도 끝나지 않았다. 원래 그의 임기는 올해 11월까지다. 사법부의 최종 판단은 11월을 넘길 전망이다.
요즘도 그는 느닷없는 전화를 받는다. 그때마다 1989년 미국에서 산 17달러짜리 카시오 손목시계는 어김없이 자정 또는 새벽을 가리킨다. “정 선배, 뭐하세요? 벌써 주무세요? 나오세요. 한잔 같이 하게.” 혀에 잔뜩 취기가 오른 한국방송 후배 기자들의 전화다.
그에게도 푸른 시절이 있었다. 1975년 입사 5년차 기자였던 정연주는 박정희 정권과 맞섰다. 정권에 아부하는 사이비 언론인과 맞섰다. 언론자유 투쟁이었다. “이제는 후배들이 그 길에서 스스로 이겨낼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글과 말의 힘을 믿는” 언론인 정연주는 그들 곁에서 계속 칼럼을 쓸 생각이다. 과거를 증언하고 현재를 비판할 생각이다.
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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