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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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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공산당 통합의 적, 극동비서부와 이시당

이동휘와 홍도가 이뤄낸 큰 성과에도 갈등과 긴장 완벽히 극복 못해
등록 2026-09-24 22:48수정 2026-09-29 14:31
고려공산당 연합중앙위원회의 두 위원인 이동휘(왼쪽)와 홍도. 임경석 제공

고려공산당 연합중앙위원회의 두 위원인 이동휘(왼쪽)와 홍도. 임경석 제공


 

이동휘(48)와 홍도(27), 두 사람은 러시아 이르쿠츠크시에 도착한 정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국제당 동방부 앞으로 제출하는 러시아어 타자본 문서에서였다.

“올해 12월2일 밤에 이르쿠츠크시에 도착했습니다. 이튿날 국제당 극동비서부에 가서 그리고리 보이친스키 동무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전권위원 슈먀츠끼 동무는 당시 치타시에 체류하고 있었습니다.”1

‘올해’란 1921년을 가리켰다. 12월2일 밤에 도착했다고 한다. 매섭게 추운 때였다. 12월에는 통상 오후 4시30분께 해가 떨어지고 최저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곳이었다. 낮에도 기온이 영상으로 오르는 법이 없었다. 최고기온이라야 영하 10도 안팎에 머물렀다.

국제당의 1921년 11월 한국문제결정서가 채택된 지 불과 보름 뒤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그 결정서에 따라 신설된 고려공산당 연합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이제 막 취임한 상태였다. 결정서 제5항을 보면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을 종결짓기 위해 상해당(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시당(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두 그룹을 통합하여 같은 수의 대표자로 구성되는 새로운 임시중앙위원회를 구성”하라고 명시돼 있었다.2

연합중앙위원회는 양 그룹에서 각 4명씩 8명의 위원으로 이뤄졌다. 이 중에 상해당 쪽을 대표해 이동휘와 홍도가 포함됐음은 명백하다. 다른 6명은 어떤 사람인가.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 명단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이동휘의 증언에 따르면, “내분 과정에서 양측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덜 증오받는 인물들이 위원으로 임명됐다”고 한다.3

나머지 6명의 위원은 모스크바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국과 중국 등지에 체류 중인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밀사를 보내 그들을 러시아 영내로 불러들여야 했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연합중앙위원회 설립 직후인 1921년 12월에는 이동휘와 홍도 두 사람만이 적법한 자격을 갖춘 위원이었다. 두 사람은 고려공산당의 당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모든 위원이 한자리에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당무 수행에 나섰다. 두 사람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최고위 간부로 취임하자마자, 모스크바를 떠나 이르쿠츠크로 향했던 것이다.

 

이동휘·홍동, 연합중앙위원회 위원 선출

 

이르쿠츠크시는 두 사람에겐 낯설고 냉랭한 곳이었다. 단지 차가운 기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곳은 이시당의 아성이었다. 그 도시에는 이시당의 주요 멤버들이 웅거해 있었고, 그들을 후원하는 국제당 극동비서부가 소재해 있었다. 이동휘와 홍도 두 사람에게는 적지(敵地)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이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이튿날 가장 먼저 수행한 업무는 국제당 극동비서부 수뇌부와 대면하는 일이었다. 극동비서부장 슈먀츠키(37)는 치타시에 출장을 간 까닭에 그를 대신해 2인자인 보이친스키(28)가 영접에 나섰다고 한다. 국제당에 가입한 한 공산당의 중앙간부와 국제당 동아시아 파견기관의 책임자 사이의 회합이므로 마땅히 동지적 우의가 넘치는 회합이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냉담하고 불편했다.

양쪽은 서로 믿지 못했다. 진심을 토로할 생각도 없었다. 특히 극동비서부의 태도는 노골적이었다. 극동비서부장은 거짓말을 했다. 12월3일 현재 슈먀츠키는 이르쿠츠크시에 체류하고, 그 날짜에 본부 동방부장 사파로프 앞으로 편지를 쓴 게 남아 있다.4 극동비서부 간부들의 속마음이 여기서 잘 드러난다. 고의로 이동휘 일행과의 면담을 기피했던 것이다. 부도덕한 행위였다.

국제당 본부에서 채택한 11월 결정서에는 극동비서부가 취해야 할 태도를 명시한 문장이 있다. “극동비서부는 이 결정을 충실하게 이행할 의무를 진다”5가 그것이다. 슈먀츠키와 보이친스키 등 극동비서부 간부들은 국제당 본부 결정을 겉으로는 따르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상해당을 적대시하고 이시당을 중시하는, 종래 취했던 행동 양상을 되풀이했다. 상급 기관의 결정을 사보타주하는 하급 기관 간부들의 자의적인 관료주의 행위였다. 그것은 규율 위반이었다. 그로 인해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분쟁을 오래 지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르쿠츠크에서 몰두했던 현안 세 가지

 

이동휘와 홍도가 이르쿠츠크에서 몰두했던 현안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극동민족대회 한국대표단의 구성을 변화시키는 문제였다. 기왕의 대표단 구성은 전적으로 극동비서부와 이시당의 주관하에 이뤄진 것이었다. 따라서 극동민족대회 한국대표단 속에는 이시당에 우호적인 단체들만 참가하고 있다는 것이 두 중앙위원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극동민족대회는 수개월 전부터 준비된 행사였다. 대표자 선임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었다. 고려공산당 연합중앙위원회 몫으로 몇 사람의 대표자를 추가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극동민족대회 한국대표단의 구성원은 총원 56명으로 늘어났다. 그중에서 연합중앙위원회를 대변하는 대표자 수는 7명에 불과했다.6 전체의 13%에 지나지 않았다. 압도적 다수가 극동비서부와 이시당을 지지했다. 그것을 뒤집지는 못했다.

또 다른 현안은 이르쿠츠크에 주둔 중인 한인 무장부대 고려혁명군의 지휘권 문제였다. 1921년 6월 자유시 사변을 거친 뒤 단일한 대부대로 통합된 이 부대는 여단급 규모로 편성됐다. 여단장 오하묵, 정치부장 채동순의 지휘 아래 그해 10월 현재 군인 총수는 2100여 명이었고, 3개 연대로 편제됐다. 개인화기로 소총 한 자루당 150발의 탄약을 갖췄고, 공용화기로 기관총 36문을 보유하고 있었다.7

두 중앙위원의 견해에 따르면, 이 부대의 지휘권을 이시당의 독점 상태가 아니라 중립적 지위에 있는 군사 지도자에게 넘기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사령부 개조를 즉각 추진하지는 않았다. 자유시 사변과 유사한 또 한 차례 분쟁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피하고자 했다. 그 대신에 두 중앙위원은 고려혁명군 군인들과 직접 접촉하는 것에 주력했다. 이동휘는 고려혁명군 내 당원 집회에 참석해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열루열변(熱淚熱辯),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열변을 토했다는 평을 받았다.8

고려혁명군 장교들 가운데 연합중앙위원회를 지지하는 집단이 형성됐다. 채영, 이다물, 황하일, 김표돌 등을 중심으로 하는 ‘14인 그룹’이 그것이다. 이들은 자유시 사변을 일으킨 군사 간부들에게 복종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들은 자유시 사변에 책임 있는 자들이 고려혁명군 지휘부에 몸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반대편에는 고려혁명군의 지휘부를 옹위하는 또 다른 장교 집단 ‘17인 그룹’이 존재했다. 이들은 극동비서부와 이시당의 지휘 노선을 기꺼이 따랐다. 두 개의 장교 집단이 형성됐다. 이시당의 독주는 막았지만 고려혁명군 내부 분위기는 불안정한 상태로 빠져들었다.

 

국제당 극동비서부장 슈먀츠키(왼쪽)와 국제당 극동비서부 비서 보이친스키. 임경석 제공

국제당 극동비서부장 슈먀츠키(왼쪽)와 국제당 극동비서부 비서 보이친스키. 임경석 제공


 

역부족이었던 극동비서부 독주 견제

 

두 연합중앙위원이 역점을 둔 세 번째 현안이 있었다. 극동비서부와 이시당에 의해 박해받은 당원들을 석방하고 복권하는 문제였다. 1921년 이시당 중앙간부에 의해 출당 조처된 당원들이 있었다. 보기를 들면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 간부였던 박애, 김진, 장도정, 계봉우 등이다. 이들은 6~7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이르쿠츠크 감옥에 수감 중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르쿠츠크 감옥에는 자유시 사변으로 수감 중인 군사 간부 70명도 있었다. 1921년 11월 결정서를 통해 국제당은 자유시사변진상조사위원회 설립을 결정했고, 그 위원회의 심의를 통해 수감자들의 석방 여부를 판정하라고 결정했다.9

이동휘와 홍도, 두 중앙위원은 박해받은 당원들의 즉각적인 처우 개선을 추진했다. 먼저 옛 이시당 중앙간부가 제명했던 당원들을 복당시키는 것에 주력했다. 피해자들이 모두 이때 복당될 수 있었다.

자유시 사변으로 수감 중인 군사 간부들의 즉시 석방도 추진했다. 당시 이르쿠츠크 감옥에는 독립군 장교 약 80명이 수감돼 있었다. 자유시사변진상조사위원회가 도착하기 전에 수감자들을 선제적으로 석방해야 한다는 게 두 연합중앙위원의 주장이었다. 진상조사위원회가 명백히 잘잘못을 가리기 전에는 분쟁의 쌍방이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하지 않은가. 어느 한쪽이 유죄로 간주돼 수감된 상태로 진상조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고려공산당 연합중앙위원에 취임하자마자 이르쿠츠크로 달려간 이동휘와 홍도는 큰 성과를 거뒀다. 국제당 본부의 11월 결정서의 권위에 의거해, 극동비서부의 독주를 견제하는 데 성공했다. 슈먀츠키와 보이친스키가 뒤집어버린 무대를 바로잡았다. 반혁명 범죄자 취급을 받은 당원들을 석방·복권시켰고, 극동민족대회 한국대표단과 고려혁명군 지휘부가 이시당 일색으로 구성되는 것을 막아냈다.

그러나 어느 문제나 두 위원의 힘만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국제당 극동비서부와 이시당의 기득권을 손상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연합중앙위원회와 극동비서부 사이에는 여전히 갈등과 긴장이 계속됐다. 그것은 1922년 말이 다가올 때까지 계속됐다.

 

참고 문헌

 

1. Члены Обцека Коркомпартии Ли-Донхи·Хон-до(고려공산당 연합중앙위원 이동휘·홍도), Заведывающему Восточным Отделам Исполнительного комитета 3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го Интернационала, тов Сафарову(국제당집행위 동방부장 사파로프 동무 앞), 1쪽, 1921년 12월29일,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46 л.14-17об.

2. Члены комиссии Белакун·Куусинен·Сафаров, предств.РВСР Илюшин(한국문제위원 벨라쿤, 쿠시넨, 사파로프 및 군사혁명위원 일류신), В Президиум ИККИ и в ЦКРКП(국제당 간부회 및 러시아공산당 중앙간부 앞), 1921년 11월15일, с.3, РГАСПИИ, ф.495 оп.135 д.30 л.19-21.

3. Член ОБЦЕКΑ Корейской Компартии Ли Дон-Хы(고려공산당연합중앙위원 이동휘), Президиуму Исполнительного комитета 3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го Интернационала(국제당집행위 간부회 앞), 1922년 2월16일,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66 л.9об.

4. Щумяцкий(슈먀츠키), Письмо ИККИ тов.Сафарову(국제당집행위 사파로프 동무에게 보낸 편지), 1921년 12월 3일,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29 л.12.

5. Члены комиссии Белакун·Куусинен·Сафаров, предств.РВСР Илюшин(한국문제위원 벨라쿤, 쿠시넨, 사파로프 및 군사혁명위원 일류신), 앞의 글, 3쪽.

6. 임경석,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역사비평사, 520쪽, 2003년.

7. ‘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편 2)’, 고려대학교출판부, 45쪽, 1980년 12월.

8. 위의 글, 46쪽.

9. Члены комиссии Белакун․Куусинен․Сафаров(한국문제위원 벨라쿤, 쿠시넨, 사파로프 및 군사혁명위원 일류신), 앞의 글, 3쪽.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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