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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돌아간 고려공산당의 목숨 건 외교전

이동휘와 박진순, 육로 대신 뱃길로 간 모스크바서 레닌 만나…국제공산당 내 한국문제위원회 설립 끌어내
등록 2026-09-03 22:37 수정 2026-09-0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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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순. 20대 후반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임경석 제공

박진순. 20대 후반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임경석 제공


 

박진순(25)은 중국 상하이를 떠나서 인도양과 지중해를 경유하는 뱃길을 이용해야만 했던 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2만㎞에 이르는 머나먼 길이었다.

“그해 5월 말에 우리 당의 제3차 대회를 국제당에 보고하고 국제당 제3차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이동휘 동무와 함께 모스크바로 떠났습니다. 그때 하얼빈과 이르쿠츠크를 경유하지 않고, 유럽을 통하여 모스크바로 되돌아갔습니다.”1

‘그해 5월 말’이란 1921년 5월 말을 가리킨다. 모스크바를 향해 상하이에서 출발한 시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고려공산당 창립대회가 끝난 직후였다. 5월20일부터 23일까지 상하이 시내의 한 호텔에서 비밀리에 열린, 한국 역사상 최초의 공산당 창립대회였다. 그 대회가 끝난 직후 모스크바행을 서둘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박진순의 기억은 약간의 착오를 안고 있다. 실제 상하이에서 출발한 날짜는 6월18일이었다.2 프랑스 여객선 르폴르카(Le Paul Lecat)호를 통해서였다. 1911년 건조된 이후 프랑스 마르세유와 중국 상하이 사이를 오가던 대형 증기 여객선이었다.

‘이동휘 동무’와 함께 떠났다는 언급이 눈길을 끈다. 박진순과 이동휘(48)는 상하이에서 결성된 고려공산당 중앙간부의 일원으로서, 모스크바 국제당에 외교교섭차 선발된 대표단이었다. 이동휘는 고려공산당의 위원장이고, 불과 넉 달 전까지 상하이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재임하던, 한국 독립운동계의 거물이었다. 러시아어에 능통한 박진순도 그에 못지않았다. 국제당 제2차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고, 국제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됨으로써 한국인으로는 국제당 최고위직에 선임된 사회주의자였다.

 

정적을 피해 머나먼 바닷길로 우회

 

의문이 든다. 왜 육로를 택하지 않았을까? 하얼빈과 이르쿠츠크를 경유하는 철도를 이용할 수 있지 않은가. 그 경로라면 넉넉잡고 2주면 모스크바까지 갈 수 있었다. 이런 이점이 있는데도 머나먼 해로를 택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박진순의 말을 들어보자.

국제당의 한국 지부인 우리 당이 이미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국제당 극동비서부의 지도자들 슈먀츠키, 보이틴스키 등은 이르쿠츠크에서 두 번째 고려공산당을 결성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이시당’(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출현했습니다. 슈먀츠키는 이르쿠츠크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지시에 따라서 여러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총살당했습니다. 그는 아무르주에서, 우리 당 영향하에 있는 100인 이상의 한인 혁명 빨치산을 총살했습니다. 또 박애, 계봉우, 장도정, 김진 등을 비롯한 러시아 극동의 우리 동무들을 근 110명이나 투옥했습니다.”3

바로 정치적 반대파의 억압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 반대파란 그해 2월에 설립된 국제당 극동비서부를 뜻했다. 슈먀츠키(부장), 보이친스키 등을 비롯한 시베리아 거점의 러시아인 사회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이 기구는 상하이에서 결성된 고려공산당(상해당)을 적대시했다. 그 대신에 한명세와 남만춘을 중심으로 하는 한인 이주민 2세 위주의 고려공산당(이시당)을 육성하고자 했다.

양자 간 갈등은 극단적으로 악화했다. 치명적 성격을 띠었다. 슈먀츠키는 자신이 쥔 지방 권력을 휘둘렀다. 그로 인해 한인 독립군 100명 이상이 총살됐고, 상해당 간부 110명이 반혁명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바로 1921년 6월 일어난 자유시 참변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동지 사이에 있을 수 없는 살육과 박해였다. 그와 같이 처참한 분위기가 조성돼 있는 시베리아를 거쳐 모스크바로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상해당의 모스크바 파견단은 3명이었다. 세 번째 인물 홍도(27)는 두 동료와는 다른 길을 택했다. 단독으로 육로로 나아갔다. 그는 다른 두 사람보다 덜 알려진 인물이었으므로 위험성이 적었다. 은밀하게 이르쿠츠크를 경유하는 것이 가능했다. 시베리아 현지 사정을 조사한 뒤 모스크바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했다.

고려공산당 대표 이동휘와 박진순, 통역 이극로가 1921년 6~7월에 탑승했던 프랑스 대형 여객선 르폴르카(Le Paul Lecat)호. 이 기선을 타고 중국 상하이에서 지중해 포트사이드 항구까지 이동했다.

고려공산당 대표 이동휘와 박진순, 통역 이극로가 1921년 6~7월에 탑승했던 프랑스 대형 여객선 르폴르카(Le Paul Lecat)호. 이 기선을 타고 중국 상하이에서 지중해 포트사이드 항구까지 이동했다.


 

일본 경찰에 발각됐지만 체포 위기 모면

 

이동휘·박진순에게는 유럽 언어를 구사하는 통역이 필요했다. 때마침 적임자가 떠올랐다. 독일 유학을 떠나기 위해 암중모색하던 젊은 이극로(25)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뒷날 저명한 언어학자로 성장하는 이극로는 독일어와 중국어가 능숙했다. 1912년 이후 약 1년간 러시아 치타에 머문 때를 제외하고는 줄곧 중국에 체류했고, 독일인이 경영하는 동제대학 예과에서 4년6개월간 수학한 경력이 있었다. 영어와 일본어도 통했다. 안성맞춤인 인물이었다.

세 사람이 일행이 되어 긴 항해에 올랐다. 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다. 신변의 안전을 위해 중국인으로 위장했다. 카이저수염을 기른 부유한 중년의 중국인과 그를 수행하는 두 젊은이로 행세했다. 중국식 성명으로 불렀고, 중국 여권을 썼다. 티켓도 값비싼 이등실을 끊었다. 다행히 그들의 수중에는 소비에트러시아 정부가 지원한 40만 금화 루블의 혁명 자금이 남아 있었다. 그 일부를 비밀 활동의 안전 보장에 투자했다.

일본 외무성 경찰은 불온한 한국인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경찰은 영국 정부의 협력을 얻어 그들을 체포하고자 했다. 기선이 홍콩과 사이공을 거쳐 싱가포르 항구에 이르렀을 때다. 박진순과 이동휘는 위기를 겪었다. 싱가포르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이 영국인 경관 2명의 협력을 받아 배에 올랐다. 결국 두 사람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러나 경찰은 끝내 두 사람을 구금하지 못했다. 프랑스인 선장이 예정된 출항 시간을 지키려 했고, 경찰은 한정된 시간 내에 필요한 수속을 마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한국에서 간행되는 신문 지면에는 이때 이동휘가 체포됐다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 동아일보 1921년 7월27일치에 “지난달에 아라사(러시아)에서 열리는 공산당대회에 출석키 위하여 가던 도중에 신가파(新嘉坡)에서 체포된 조선임시정부 국무총리라 하는 이동휘”4 운운의 기사가 실렸다. 오보였지만, 이 기사를 읽은 같은 당원 조응순은 억장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느꼈다고 한다.

항해는 계속됐다. 콜롬보, 지부티, 수에즈를 거쳐 운하의 지중해 쪽 출구인 포트사이드 항구에 닿았다. 르폴르카호 탑승은 거기까지였다. 이집트 카이로를 거쳐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다른 기선을 탔다. 이탈리아 시라쿠사를 거쳐서 나폴리 항구에 닿았다. 그렇게 인도양, 홍해, 지중해를 건넜다.

거기서 육로로 로마, 밀라노, 스위스 베른과 제네바를 거쳐 독일 베를린에 도착했다. 베를린에서는 혁명 직후 소비에트러시아 출입국 수속의 어려움 때문에 1개월간 체류해야 했다. 이동휘·박진순 일행은 독일공산당 대표 빌헬름 피크 등과 함께 모스크바로 동행할 수 있었다. 피크는 멀리 동아시아에서 건너온 한국 공산주의자들에게 호의를 표했고, 이런저런 편의를 제공했다. 독일 유학을 희망하는 이극로에게 베를린대학 입학을 권유한 것도 바로 그 사람이었다.5

일행은 슈체친 항구를 출발해 발틱해를 건넜다. 에스토니아 탈린 항구에 이르렀고, 거기서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까지 기차로 여행했다. 레닌그라드에 도착한 때는 9월16일이었다.6

박진순은 신상조사서에 에스토니아에서 국경을 넘어 러시아에 입국했노라고 썼다. 만 3개월의 여정을 거쳐서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국제공산당 본부 내 한국문제위원회 설립

 

이동휘와 박진순의 모스크바 외교가 결실을 본 것은 두 달 뒤였다. 9월16일 레닌그라드에 발을 디딘 때부터 11월15일 국제당의 한국 문제 결정서(11월 결정서)가 채택될 때까지 만 2개월 동안 쉼 없이 활동했다.

90도 뒤집힌 운동장을 바로잡고자 했다. 극동비서부는 동아시아 혁명운동을 현장에서 지휘하는 국제당 기구인데, 그것이 한국 혁명의 참모부를 자임하는 상해당을 적대시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 혁명운동의 본류를 계승한다고 자임하는 정치세력을 적대시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동휘와 박진순은 동아시아 현지 기관의 성향을 변화시킬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본부 기관을 움직이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두 방면이었다. 소비에트러시아 정부 기관과 국제공산당 본부 기관을 상대로 외교활동에 나섰다.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하는 외교교섭의 초점은 외무인민위원 치체린(Г.В.Чичерин)과 정부 수반 레닌(В.И.Ленин)이었다. 이들이야말로 1년 전에 한국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40만 금화 루블 지원을 선뜻 결정하고 집행한 핵심 인물이었다. 응답이 있었다. 1921년 11월28일 상해당 대표단은 레닌과 회견하는 데 성공했다. 이동휘는 뒷날에도 레닌이 말한 요점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의열투쟁 수단을 쓰지 말 것, 일본 무산자와 연대할 것, 대중 선전을 중시할 것, 3·1운동이 철도교통의 편의를 이용했음에 주목할 것, 한국 혁명의 첫 단계는 민족해방혁명이라는 것 등을 말했다고 한다.7

국제당 본부 외교의 초점은 상설 최고 집행기구인 간부회 구성원들이었다. 여기서도 응답이 있었다. 간부회는 한국 문제가 분규에 휩싸여 있음을 인정했다. 그리하여 쿠시넨, 벨라 쿤, 사파로프 세 간부회 위원으로 한국문제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위원들은 한국 사회주의운동 내부의 악성 분쟁에 대해 진상을 조사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동휘·박진순의 외교가 주효했다. 극동비서부가 반혁명 집단으로 지목한 상해당이 국제당 간부회 위원들로부터는 불화를 겪는 한국의 두 공산주의 단체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한국문제위원회 설립, 이것만 해도 절반의 성공이었다. 90도 뒤집힌 운동장이 수평을 되찾은 셈이었다. 인도양과 지중해를 거쳐 2만㎞의 기나긴 여행을 감당한 보람이 있었다.

 

참고 문헌

1. Пак Диншунь(박진순), Автобиографические сведения в Интернациональную Контрольную Комиссию(이력서, 국제통제위원회 앞), 5쪽, 1928년 12월22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81 л.76-82об

2. 날짜를 이렇게 특정할 수 있는 것은 연구자 반병률의 치밀한 사료 분석 덕분이다. 그는 셋 이상의 단편적인 정보를 연결해, 작지만 이 놀라운 추론을 이끌어냈다.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331쪽, 1998년.

3. 박진순, 앞의 글, 5쪽.

4. ‘近藤榮藏 불기소, 임시정부 총리 이동휘가 잡힌 것과 관계가 없다고’, 동아일보 1921년 7월27일.

5. ‘고투사십년’, 이극로 지음, 조준희 옮김, 아라, 75쪽, 2014년.

6. Аекета - Пак Диншунь(신원조사서, 박진순), 1921년 9월16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81

7. 誠齋 李東輝, ‘동아일보를 통하여 사랑하는 내지 동포에게(5)’, 동아일보 1925년 1월22일.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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