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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터로 못 가게 잡을걸, 널 계속 만져볼 수 있게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의 기록⑤— 김도희씨 인터뷰
등록 2026-04-02 20:18 수정 2026-04-05 20:22
2024년10월 전남 장성에서 김성호씨. 김도희 제공

2024년10월 전남 장성에서 김성호씨. 김도희 제공


179명이 사망한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사고기 잔해 재조사가 시작된 가운데, 사고 현장에서 희생자 추정 유해 65점과 유류품 722묶음, 휴대전화 5대가 발견(2026년 3월19일 기준)됐다. 유가족들이 “수습 과정이 충분치 않았다”고 비판하자 3월19일엔 국무조정실 2차장이, 3월20일엔 청와대 경청통합수석이 무안공항 현장을 방문했다. 국토교통부 산하에 있어 ‘셀프 조사’ 논란이 있던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는 관련 법 통과에 따라 국무총리실 산하로 이관됐고, 현재 국무조정실과 유가족들이 조사단 구성을 논의 중이다. _편집자

저희는 삼 남매예요. 여동생은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요. 어릴 때는 두 살 터울 남동생밖에 없어서 항상 제가 어디 가면 성호가 쫓아다니며 같이 세트로 다녔죠. 32년 동안 같이 살았어요. 성호 군복무랑 저 유학 간 1년 빼고는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어요.

성호가 밝고 애교도 엄청 많았어요. 술 먹고 오면 엄마한테 뽀뽀하고, 안고, 사랑한다고 하고. 그런 아들이 가버리니까 엄마는 온종일 울기만 하지, 아빠는 말은 안 하지만 살이 계속 빠지고. 아빠는 완치 판정을 받긴 했지만 암수술 환자거든요.

사실 성호가 몇 년 전에 독립하고 싶어 했어요. 집까지 알아봤는데 아빠가 수술하니까 자기도 그냥 더 돈을 모으는 게 낫겠다고. 자기가 결혼할 때까지 같이 살아도 아빠랑 보내는 시간이 적다고 본인이 생각해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죠. 남동생과 여동생이 다툴 때 “빨리 둘 다 나가라” 하면 성호가 “같이 살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너무 그러지 마쇼” 이랬거든요. 그 말이 엄마 아빠한테는 한이 된 것 같아요. 이렇게 가버릴 줄 모르고, 말이 씨가 된다고. 이 자식 맨날 그런 소리 하더니 이렇게 돼버렸다고.

그 말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성호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요. 한 번도 남동생한테 (고마움을) 갚아주지 못한 것 같은데 가버렸어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요. 중고등학교 때 제가 공부 끝나고 늦게 오면 엄마 아빠는 자고 있어도 성호는 기다렸다가 데리러 오고, 항상 밤에 고생한다고 간식 사서 책상에 놓고 갔어요. 저는 유학도 갔는데, 집이 아주 잘사는 게 아니어서 성호가 알바해서 돈을 보내서 공부하고 그랬거든요. 집이 힘들 때도 서로 많이 의지했던 동생이에요. 여행 가기 전날에도 같이 옷장을 정리하면서 내년에 결혼하면 선물해줄 거 이야기했는데. 갑자기 아무것도 준비를 안 했는데 가버려서 빚진 사람이 돼버렸어요.

제가 원래 주말에 늦잠을 자거든요. 그날따라 저랑 딸이 먼저 일어났어요. 평소 같으면 뉴스를 보는데 그냥 딸이 만화 보는 것 같이 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여보, 처남 언제 오는 거야?” 물어봤어요. 그래서 “일요일에 온다고 했던 것 같아” 하니까 어디 공항이냐는 거예요. 무안에서 탄다고 했던 것 같다니까 뉴스를 좀 보라고 해서 네이버로 봤죠. 순간 머리가 멍해졌어요.

“뭐지? 아빠, 성호 언제 와?” 물었더니 아빠가 “오늘 온다고 했는데 어째 연락이 없다? 8시 반인가 도착인데 연락이 없네?” 이러셨어요. 그때 진짜 머리가 새하얘졌어요. “아빠, 엄마한테 말하지 말고 뉴스를 봐. 빨리 티브이(TV) 틀어서 뉴스를 보고 전화하세요. 나 옷 입고 준비할 테니까. 엄마랑 이야기하고 전화해.” 그 뒤 5분쯤 지나 아빠가 전화해 “준비해라, 가자” 이러시는 거예요. 그때 이미 엄마는 악쓰며 울고 계셨고. 엄마랑 우리 딸은 놔두고 아빠랑 남편, 저 셋이 출발했죠.

무안공항에 오전 10시30분쯤 도착했는데 사람들이 이미 와 있더라고요. 탑승자 명단도 안 주고, 계속 별관에 앉아 있었어요. 저는 추가 생존자가 나올 줄 알고 계속 ‘너 운동 잘하고 체력도 좋은 거 누나가 아니까 제발 여자친구랑 빨리 손잡고 나오라’고 기도했어요. 아빠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계속 활주로를 보고 있고. 그런데 가망이 없어 보인다고 하는 거예요. 누가 구해졌으면 소방차가 나와야 하는데 안 나온다고. 시신도 못 찾을 것 같다고.

그 순간 아빠가 무너졌다

제주항공 직원이 와서 브리핑을 했어요. “비행기가 전소됐습니다”라는 말에 아빠가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어요. 아빠와 저는 서로 손을 꽉 잡고 울었어요. “네 엄마 어떡하냐? 네 엄마 어떻게 해야 되냐.” 첫날은 잠을 아예 못 잤어요. 우는 소리 때문에. 그냥 24시간 계속 곡소리가 났어요. 이틀이 지나 텐트에 뚜껑이 생겼어요. 그때 기자들이 지나다니면서 이렇게 위에서 찍고, 마이크를 밑에 놓고 대화 내용을 녹음하고…. 제주항공 본사에서 직원을 내려보내 피해자 가구마다 안내하고 돌본다는 명목하에 2명씩 다 붙였거든요. (제주항공 직원들이) 계속 텐트 주변에서 보고 있다가 우리가 나오면 “뭐 필요하냐?” 쫓아다니고. 그런데 막상 장례를 치르고 오니까 다 끝난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공항에 왔는데 너무 허무했어요. 원래 하던 브리핑도 안 하고, 데스크나 직원도 갑자기 짐을 다 빼버리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브리핑도 한다고 했는데 안 하더라고요. 뭐지? 왜? 사고 조사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러면 우리 성호 죽은 거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결과도 안 내고 왜 갑자기 다 없어진 거지?

세월호 참사 때도 유족들이 (전남 진도) 팽목항에 오래 계셨잖아요. 우리도 그렇게 되겠다, 쉽게 안 끝나겠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어요. 사고가 막 나서는 사실 뭘 해야 하는지, 뭐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유가족 입장에서는 알 수가 없잖아요. 장례 치르는 과정까지는 별 의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때까지는 정부 주도 아래 착착 진행됐으니까. 당시에는 시신을 빨리 찾아 데리고 가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고, 시신이 부패되지 않게 냉동도 빨리하고 이런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어요.

사고 조사도 제주항공 압수수색했다, 무안공항 압수수색했다, 이런 뉴스가 나오니까 ‘조사는 잘되고 있네’라고 여겼어요. 그리고 믿었던 것 같아요. 잘될 거라고. 그런데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보니 너무 아무렇지 않게 다 없어져버렸어요. 앞으로 어떻게 하라는 거지?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뭔가 물어보면 ‘하고 있다, 나중에 공지하겠다’ 이런 이야기만 하니까.

3살 때 김성호씨(오른쪽)가 누나 김도희(당시 5살)씨와 함께 찍은 사진. 김도희 제공

3살 때 김성호씨(오른쪽)가 누나 김도희(당시 5살)씨와 함께 찍은 사진. 김도희 제공


슬픔 위에 견뎌야 했던 ‘말’들

이미 잘못 끼워진 단추가 너무 많았죠. 너네 돈 때문에 그러지? 왜 아직도 무안공항을 안 놔주냐? 이런 이야기도 많이 하고.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걱정이 많이 들었어요. 광주 시민들도 국제선이 없다는 것 때문에 우리 유가족을 미워하는 듯한 느낌이 많이 들고요. 지금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요. 광주에서도 관심이 없는데 이걸 서울에서 이야기하는 게 가능할까? 상처받고 오지는 않을까?

이거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서 서울 집회를 준비했어요. 국회에 갔는데 전혀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어요. 언론도 관심이 없고 행사 있을 때만 잠깐 반짝, 그것도 대통령이나 와야 기사 한 줄 나가고요. 지금 나가서 알리지 않으면 1주기까지 아무것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까지 참사가 발생해도 제대로 진상이 규명된 적이 없잖아요. 가장 최근에 있었던 오송 참사나 이태원 참사도 책임자 처벌도, 진상 규명도 안 됐고요. 우리는 왜 갑작스럽게 가족을 보내야 했는지 모른 채 집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의 상황, 책임자 처벌 같은 게 없는데 어떻게 집에 가서 발 뻗고 잘 수 있을까요? 저도 유가족이 될지 몰랐거든요. 그런데 되고 나니까 이게 한처럼 느껴져요.

유가족들이 정신과에 가도 심리적 벽이 커서 말을 잘 안 한대요. 그런데 공항 셸터(구호텐트) 안에서는 서로 잘 이야기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셸터가 필요하다고 봐요. 거기서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아요. 모든 게 당연시되는 그런 곳이죠. 그분들한테는 아직도 자식이 옆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도 셸터는 아직 못 뺄 것 같아요. 최소한 마음의 짐을 풀고 갈 수 있을 정도만 밝혀줘도 유가족들이 집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의혹이 있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밝혀져야 한다고. 둔덕의 책임자가 나오든가, 담당자들이 검찰로 넘어가서 입건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수사 단계가 되고, 의혹을 다 명확히 조사해서 결과가 밝혀져야 유가족들이 집에 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분들은 셸터를 버리면 다 버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게 아니면 안 된다고 여기는 것 같아요. 마지막 희망인 거죠.

2024년10월 여자친구와 전남 담양에서 김성호씨. 김도희 제공

2024년10월 여자친구와 전남 담양에서 김성호씨. 김도희 제공


내가 바빠서 널 잊는 건 아니겠지

초반에는 직장에서도 혼자 몰래 울었는데 점점 안 울게 됐어요. 어떤 날은 갑자기 너무 바빠서 오늘 종일 성호 생각을 못했다, 이런 게 딱 생각나면 죄책감이 느껴져요. 내가 너를 잊은 건 아니겠지, 내가 너무 바빠서 널 잊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모든 걸 잊고 싶지 않아요. 성호랑 있었던 모든 기억이 너무 생생해요. 둘이 엄마한테 벌받은 일도 기억나고, 같이 반찬 투정한 것도 떠오르고, 남동생을 데리고 다녔던 그 모든 일이 다 기억이 나요. 그냥 생생하게.

성호가 어릴 때 정말 백옥같이 하얬거든요. 진짜 찹쌀떡처럼 하얬어요. 그놈을 제 세발자전거에 태워 앞마당을 돌았어요. 달고나 만든다고 엄마한테 50원을 받아 문구점에 막 뛰어가서 둘이 달고나 막만든 일도 생각이 나고. 성호가 3학년 때 학교에서 야구 하면서 홈런 친 모습도 기억이 나고.

어떻게 남동생 없이 앞으로 30년, 40년을 살고 갈까요? 입관식도 기억이 나요. 그때 화장터로 관이 못 가게 세게 잡을걸, 내가 잡고 영안실에 안치해놓고 계속 만져볼걸.

정나라·이소아·허정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 활동가

*2025년 12월19일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 활동가들이 유가족 김도희씨를 인터뷰하고 기록했습니다. 이 글은 ‘무안공항 참사 이후를 사는 사람들’ 5회로, 한겨레21 누리집을 통해 이전 연재물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술기록은 2025년 4·16재단 부설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재난피해자 권리회복사업 지원을 받아 수행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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