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들은 조기 대선을 앞두고 거대 양당이 앞다퉈 상속세 개편을 이슈로 띄우는 데는 부동산 가격 급등에 따라 자산 가치가 늘어난 사람이 많아진 사정과 깊이 닿아 있다고 본다. 사진은 서울 송파구 서울스카이 전망대에서 바라본 강남·송파 일대 아파트 모습. 연합뉴스
※기사에 나오는 인물들의 개인정보가 드러나 있어 부득이하게 모두 가명을 씁니다.
32살 김현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부모에게 ‘빚’부터 물려받았다. 경제력이 없는 부모는 대학생이 된 김현제의 명의로 대출을 받아 월세와 생활비로 썼다.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의 유명 사립대에 입학했지만, 대학 생활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럼에도 졸업 때 김현제의 자산은 ‘마이너스 2천만원’이었다.
부모의 그늘부터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몸 누일 방 한 칸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꼬박 6년 동안 친구 집을 전전하며 일했지만, 200만원 남짓한 월급으로는 자산이 모이지 않았다. 독립하고 나서도 가족 생계비를 몇 번 보냈는데, 그러다보면 곧 계좌가 비었다. 아르바이트와 중소기업 직장생활을 하며 서울 영등포구에 허름한 1.5룸 집 보증금 8천만원을 마련하는 데 13년이나 걸렸다. 월세 20만원씩 내는 ‘반전세’ 집인데, 그나마 보증금의 80%(6400만원)는 중소기업청 대출로 조달했다. 최근 서른 살 남동생과 1.5룸에서 함께 살게 된 김현제는 “평생을 원룸에서 가족들과 살아서 그런지 제 소원은 ‘혼자 쓰는 방’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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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제는 주변에 부모의 도움을 받아 집을 구한 친구들을 보면 씁쓸함을 느낀다고 했다. 자신은 반전세 보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13년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하고 대학원 진학도 포기해야 했는데, 부모에게 집값과 생활비를 지원받은 친구들은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하거나 전문직 자격증을 따기 위해 손쉽게 퇴사를 선택했다. “결국 스펙도, 그 스펙을 쌓을 시간도 부모의 자산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주변 친구들이 부모님께 상속받게 될 거고, 그래서 자산이 생길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걸 들으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끼리 ‘계급통 느낀다’고 표현해요.” 김현제가 말했다.
25살 취업준비생 조진수도 김현제와 똑같이 “계급통을 느낀다”는 표현을 썼다. 조진수는 경기도의 작은 변두리 도시에서 겨우 인서울 대학에 진학했지만, 학원 강사와 호텔 직원으로 일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해 휴학과 복학을 반복했다. 최근 다행히 청년공공임대주택 거주자로 선정돼 보증금 60만원 월세 33만원 집에 살게 됐다는 조진수는 자신과 너무 다른 삶을 사는 주변 친구들을 보면 자신은 여전히 서울이 아니라 변두리에 사는 것처럼 느낀다고 털어놨다. “목동이나 대치동 이런 부촌에서 자란 친구들은 부모의 자산을 증여받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더라고요. 월세 33만원짜리 집에 사는 제겐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이 10억원을 넘었다거나 수십억원 자산 규모를 스펙으로 내세우는 연애 프로그램 출연자들을 보면 역시 계급통을 느낍니다.”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임대료가 올라 떠돌이 생활을 하는 청년 여성 노동자(이솜 분)가 주인공이다. 씨지브이 아트하우스
“2025년. 부유해지려면 스펙은 잊어라. 중요한 건 상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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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마지막 주,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도발적인 제목의 특집 기사를 썼다. 이코노미스트는 2025년 한 해 세계 선진국에서 약 6조달러(약 8795조원) 규모의 상속이 이뤄질 것이라고 추산하면서 이는 이들 국내총생산(GDP·지디피)의 10%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20세기 중반 선진국들의 지디피 대비 상속 규모는 5% 수준이었는데, 21세기의 4분의 1이 지나면서 상속 규모가 두 배에 이르게 됐다는 거다. 특히 독일의 경우 1960년대 이후 지디피 대비 상속의 비중이 거의 세 배가 됐다. 이렇게 각 국가의 경제 규모 대비 상속 비중이 증가하면서 자산 불평등이 심해졌고, 젊은 세대는 열심히 노력해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거나 전문직종 자격증을 가져도 부모가 도와주지 않으면 집을 사고 안정적인 자산을 보유하기 어려워졌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런 현상을 ‘상속계급사회’(Inheritocracy·영국의 역사학자 엘리자 필비가 2024년 9월 펴낸 책 제목)라고 명명했다.

‘상속계급사회’, 엘리자 필비 지음
‘상속계급사회’란 표현,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정확히 10년 전 ‘수저계급론’이 조명받았던 한국 사회에선 이미 이 표현이 더는 도발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한겨레21이 접촉한 사회경제 학자들도 대체로 한국이 상속계급사회가 이미 됐거나, 상속계급사회로 이행하고 있다는 데 공감했다.
상속·증여 자산은 국내 부동산 가격이 상승한 2019년 이후 빠르게 증가했다. 국세청 통계를 보면, 2019년 21조5천억원이었던 전체 상속재산 가액과 28조3천억원이던 증여재산 가액이 2021년 각각 66조원과 50조5천억원으로 급증했다가 2022~2023년엔 다시 감소했다. 2021년과 2022년 상속재산이 급증가한 기저에는 이건희 삼성 회장과 김정주 넥슨 창업자가 작고하면서 발생한 대규모 상속 영향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부동산 가격 상승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국세청은 추정한다. 특히 상속세 신고 인원은 2019년 9555명에서 2023년 1만8282명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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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계급사회 통계
김낙년 동국대 명예교수(경제학)가 쓴 ‘한국에서의 부와 상속, 1970~2014’ 제목의 논문을 보면, 한국도 지디피 대비 상속(증여를 포함한) 규모가 1970년대 5.7%에서 1980년대 5.0%까지 낮아진 다음에 지속적으로 증가해 2010년 이후에는 8%까지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이코노미스트가 분석한 선진국의 흐름을 한국도 따라가고 있다.
인구 문제도 상속이 중요해진 원인으로 꼽힌다.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 출생)의 은퇴 시기와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인 에코붐 세대(1979~1992년)의 혼인과 자립 시기가 맞물리면서 자산의 세습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 인구구조상 상속과 증여가 중요해진 시기에 때마침 자산 가격이 상승한데다 과거에 견줘 자녀가 많지 않은 ‘핵가족화’도 상속의 중요성을 키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은 1983년부터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와 함께 ‘산아제한 정책’의 고삐를 이전보다 바짝 당겼다. 신광영 중앙대 명예교수(사회학)는 “지금 60대 이후 사람들은 한국 사회가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시기에 대체로 가난하게 자랐고, 형제가 평균 4~5명씩 돼서 상속·증여 재산을 유의미하게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며 “하지만 이들의 자녀(에코붐 세대)는 외동이거나 형제자매가 한 명인 경우가 대부분인데다 맞벌이 가구가 늘면서 부모의 자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지가 큰 차이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낮아진 경제성장률도 원인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청년이었던 1980년대에는 연도별 경제성장률이 10% 안팎을 넘나들었던 ‘고성장’기였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2%를 맴돌았다. 윤석열의 12·3 내란 계엄 이후엔 더 낮아져 한국은행은 2025년 경제성장률이 1%대에 그칠 것으로 예상한다. 저성장 국면에선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길 기대하기 어렵다. 좋은 일자리가 적다는 것은 사람들이 (노동)소득을 쌓아서 자산을 만들기도 어렵다는 걸 의미한다.
아울러 저성장이 지속되면 가구마다 지출을 줄이고 자산을 축적하려는 동기가 강해지면서 자산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격차가 더 커지기 쉽다. 상속·증여가 정점을 찍었던 2022년 3월 말 기준 국내 순자산 지니계수는 0.606으로 역대 최고치(조사 첫해인 2012년을 제외한)를 기록했다. 통상 지니계수는 1에 가까울수록 적은 가구가 많은 자산을 보유해 불평등이 크다는 의미인데, 2022년 상위 20% 가구(소득 기준)의 평균 자산 보유액은 12억910만원으로 하위 20%(1억7188만원)의 7배에 이르렀다.

상속 관련 공통질문애 대한 응답 분포
부모의 상속(증여 포함) 자산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가르는 불평등은 미래 세대를 얼마나 옥죄고 있을까. 한겨레21은 자산·직업·성별로 다양한 계층의 청년 세대 12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한국의 자산 불평등과 대물림 등을 두고 4점 척도(매우 아니다·아니다·그렇다·매우 그렇다)로 질문을 던지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도 물었다.
먼저 “한국 사회가 상속·증여를 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생기는 상속계급사회라는 말에 동의하느냐”는 질의에는 ‘매우 그렇다’가 10명(83%), ‘그렇다’가 2명(18%)이었다. ‘아니다’라고 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한국이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라는 데 얼마나 동의하는지 묻는 말에도 4명(33%)이 ‘매우 아니다’, 8명이 ‘아니다’(67%)라고 답했다. 역시 ‘그렇다’는 답변은 없었다. 부의 상속이 계급을 가르는 척도가 됐고, 계층 이동은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8살 때 자립했고 직장 생활을 하며 부모의 사업 빚 2천만원을 갚아야 했던 35살 이명훈은 한국이 상속계급사회라는 말에 적극 동의했다. 그는 “경제적 자립을 일찍 해본 입장에선 숨 쉬는 것도 돈이었다”며 “‘부모 찬스’가 없는 사람은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투입할 수 있는 시간과 자원부터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명훈씨 계좌에서 매달 전·월세 보증금 대출 이자가 빠져나가는 화면(왼쪽). 명훈씨는 올해 들어 부모의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적금을 해지해 돈을 부모에게 드려야 했다. 이명훈씨 제공
이런 박탈감은 대기업에 다니며 안정적 일자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지역의 한 광역시 출신인 41살 정연수는 서울의 한 대기업 계열 금융사에 취업해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나름대로 ‘자수성가’했지만 “더 많은 자산과 좋은 스펙을 물려받는 사람들에 대해 격차를 느끼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저는 꽤 많은 연봉을 받지만 이른바 ‘스펙이 예쁜’ 사람은 아니에요. 혼인 시장에선 그리 매력적인 상대가 아니죠. 돈이 들어오는 대로 대출금이나 집 밑으로 계속 들어가요. 빚만 없어도 제 삶은 훨씬 평화롭고 여유로울 것 같거든요.” 정연수가 말했다.
지역에 살아 주거 비용이 적게 드는 이들은 그나마 상대적 박탈감이 덜할까. 하지만 이들에겐 일자리 안정성이 중요했다. 충남의 한 지역에서 하청업체 노동자로 일하는 31살 김영진은 일터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보증금 2500만원 전셋집에 살고 있다.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회사에서 숙소를 제공하는데, 하청업체 노동자는 그런 혜택이 없다. “저희 같은 하청업체 노동자들 월급으로는 사실상 주택을 살 수 없죠. 서울 집값 상승 뉴스를 보면 로또가 당첨되지 않는 한 집을 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김영진이 말했다.
특히 청년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상속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고 봤다. 부의 상속으로 인해 출발선이 달라지는 현상에 대해 12명 가운데 5명이 ‘심화하고 있다’, 7명이 ‘매우 심화하고 있다’는 답을 내놨다. 멀어지는 출발선 앞에서 청년들은 의욕을 잃는다. “전체적으로 평균이 너무 높아진 느낌이에요. 평균 같지 않은 평균이랄까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평균에 이르기 힘들다는 생각에 박탈감이 더 커지는 것 같아요.” 25살 취업준비생 신송주의 말이다.
문제는 청년들이 점점 상속계급사회를 체감하며 절망하고 있는데, 정치권은 여야가 앞다퉈 상속세 완화 카드를 내밀며 청년들의 박탈감을 더욱 키우고 있다는 점이다. 2025년 6월3일로 예정된 제21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3월7일 회의에서 “(국민의힘 쪽에서) 상속세 공제(기준을) 올리는 것에 동의하는 것 같으니 (민주당도) 배우자 상속세 면제·폐지에 동의하겠다. 이번에 상속세법을 처리하자”고 제안하며 “배우자에 대한 상속세 면제는 (세대 간 부의 수직 이동이 아닌) 수평 이동으로, 이혼 등으로 재산 분할을 하는 것까지 고려하면 타당성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민주당은 상속세 일괄 공제액을 현행 5억원에서 8억원으로 높이고, 배우자 공제액을 현행 5억원에서 10억원까지 올려 상속세 면세점을 18억원까지 높이는 법 개정을 추진해왔지만 시민사회에서 ‘부자 감세’라고 반발하자 배우자 상속세 면제로 슬그머니 방향을 돌렸다.
애초부터 상속세 완화에 관심이 컸고, 상속세율 인하를 주장해왔던 국민의힘은 이 대표의 제안에 즉시 화답했다. 국민의힘은 3월17일 배우자 상속세 폐지를 당론으로 정하고 관련 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대표발의한 법안에 국민의힘 의원 108명 전원이 이름을 올렸다. 정부(기획재정부)는 3월12일 사망자가 남긴 상속재산 총액을 기준으로 과세하는 ‘유산세’ 방식의 상속세 제도를 개별 상속인이 실제 물려받는 금액에 과세하는 ‘유산취득세’로 전환하는 방안도 발표했다. 부모의 지원을 한 푼도 받지 못한 37살 대안학교 교사 김여름은 정치권의 상속세 감세 움직임을 “있는 사람이 마이크까지 잡으려 한다”고 평가하면서 “정부와 정당은 돈 가진 부자들의 불편한 부분에는 정말 민첩하게 움직이는데, 서민들을 위한 복지 정책에도 이렇게 기민하게 움직여주면 정말 좋겠다”고 말했다.
여·야·정이 각각 디테일이 다른 상속세 개편안을 들고 나섰지만,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부자 감세’라는 점이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 3월7일 개최한 ‘납세자의 날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연구를 보면, 성인 3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 응답자들이 추정한 상속세 납부 대상자 비율은 평균 35.2%로 나타났다. 한국인 다수가 10명 중 3명 이상이 상속세를 납부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2022년 사망자 기준, 실제 상속세를 납부한 사람은 4.5%에 불과하다. 20명 중 1명도 채 안 되는 것이다. 한국의 상속세 제도에 공제 항목이 많고, 공제 금액도 적지 않기 때문에 생긴 착시 현상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정치권이 앞다퉈 상위 4.5%를 위한 상속세 완화 정책을 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부동산 가격 상승에 힘입어 자산 가치가 늘어난 사람이 늘면서 이들의 상속세가 조기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쟁점이 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앞서 언급했듯, 상속세 신고 인원은 2019년 9555명에서 2023년 1만8282명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부 교수는 “상속세 납부 대상이 되는 인구가 많아진 것이 사실이고, 이들이 자신의 부를 보존하기 위해 정치적 힘을 발휘할 세력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실패한 부동산 가격 통제의 “면피용 카드”(신광영 교수)라는 지적도 나왔다.

김현제(32)씨의 계좌에서 빠져나가는 중소기업청 전세 대출 이자금 메시지. 현제씨는 종종 이자를 낼 돈이 없어 연체하거나 분할 납부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현제씨 제공
게다가 사회안전망이 부재한 한국에서 조금만 삐끗하면 금세 추락할 수 있다는 불안은 전 계층을 막론하고 존재한다. 이 불안이 저소득층뿐만 아니라 상속 자산을 풍부하게 받은 중산층과 고소득층까지 끊임없이 상승 지향을 꿈꾸게 한다. 상승하지 않으면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상속세 감세에 비판적이면서도 언젠가 자신도 상속세 과세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지니게 하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한겨레21이 인터뷰한 모든 청년이 부모의 자산 상속·증여 여부와 관계없이 한목소리로 불안을 호소했는데, 부모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들도 현재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2018년께 10억원을 증여받아 서울에 신축 아파트를 구매했고, 7년 사이 아파트 가격이 두 배 이상 뛰었다는 39살 정민용은 “언론에서는 부모부터 자식까지 대대로 잘사는 사람들을 조명하면서 계급 세습을 강조하지만, 부자들 사이에선 자산을 탕진하고 망하는 경우도 많이 보고 듣는다”며 “서울에 집이 한 채 있어 든든한 것은 사실이지만 받은 자산을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하고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했다. 부산에 살면서 수십억원의 재산을 부모에게 물려받았다는 36살 이성원도 “점점 서울과 부산(을 포함한 지역)의 격차가 커지는 느낌이어서 자녀를 데리고 서울로 터전을 옮기거나 외국으로 나갈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속 관련 심층 인터뷰 결과
자신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만큼 자녀에게 물려줄 수 없을지 모른다며 고민하는 경우도 있었다. 강남 8학군에서 자랐고 명문대를 졸업했으며 수억원의 상가 건물을 이미 증여받았다는 25살 이수현은 “전문직 자격증이 있었던 부모님은 내게 좋은 것만 물려주셨지만, 내가 아이를 낳아도 똑같이 좋은 것만 물려줄 수 있을지 마음 한편에 불안한 마음이 있고, 부모님보다는 적은 자산으로 아이와 살아야 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한국 사회에서 가구 자산 기준으로 최상위권에 속하는 부자들이다. 2021년 기준 순자산 상위 1% 기준이 29억원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이성원은 상위 1% 안에 드는 재산을 물려받아 사는 셈이다. 정민용도 부모에게 10억원을 지원받아 산 아파트가 두 배 이상 가격이 뛰어 20억원 자산을 보유했는데, 2025년 3월 기준 39살 이하 가구의 순자산 평균이 2억2158만원임을 고려하면 평균 자산의 9배가 넘는 자산을 출발선에서 지원받고 시작했다. 20대에 이미 수억원의 상가 건물을 증여받은 이수현도 말을 보탤 필요가 없는 최상위권 부자다. 김창환 미국 캔자스대학 교수(사회학)는 이러한 현상을 놓고 “한국은 삶의 안정성이 낮은 게 본질적인 문제”라며 “삶의 하한선이 너무 낮기 때문에 실패하면 삶이 크게 망가지니까 불평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계층 사이에 벽(Closure)을 쌓는 모순적인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답은 공공성 회복과 복지 강화, 지역 균형 발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선 조세를 더욱 많이 걷어야 한다. 세금을 더욱 많이 걷어서 공공주택과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고, 수도권에 지나치게 집중된 부를 분산해 서울·수도권이 아니어도 청년들이 골고루 잘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상속세 감세에 집중하는 정치권 논의에서 보듯, 정치는 이런 시민의 요구와 청년의 목소리를 듣고, 상속계급사회를 바꾸는 데 관심이 없다. 김유찬 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은 “문재인 정부는 정책 의도와 달리 결과적으로 부동산 가격 앙등 때문에 상속계급사회를 강화했고, 윤석열 정부는 종합부동산세, 양도세 등 각종 조세 부담을 낮추면서 정책적·의도적으로 상속계급사회를 강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거대 양당은 ‘불평등’을 언급조차 하지 않은 지 오래다. 2024년 8월 민주당은 전당대회에서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불평등을 극복하고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는 기본사회를 원한다”고 강령까지 개정했지만, 2025년 2월18일 이재명 대표는 돌연 “우리는 진보가 아니다. 민주당이 중도보수 정권으로 오른쪽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로 줄곧 ‘복지’보다는 ‘성장’에 무게를 두며 ‘우클릭’에 나서고 있다.
한국 정치사를 돌아보면, 정치권이 불평등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이렇게 외면했던 적은 없었다.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대통령이 된 박근혜는 임기 중에 기초노령연금을 큰 폭으로 올렸고,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 같은 보수 정치인이 ‘중부담 중복지’를 내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 10여 년이 지난 현재, 거대 양당은 상속세 완화에 올인하고 있고, 진보정당은 국회에서 의석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경기도 외곽에서 자라 서울에 있는 대학에 어렵게 진학한 조진수씨는 학원 강사와 호텔 직원으로 일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버느라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정치가 불평등을 외면하면서 사회도 불평등을 거론조차 하지 않고 있다. 한겨레21이 인터뷰한 청년들은 “더 이상 사람들은 불평등이 문제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신송주는 “불평등을 고민하려 해도 여유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며 “주변에 모두가 너무 경쟁에 몰두하는 분위기여서 ‘이 경쟁이 맞는 걸까?’라고 문제를 제기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공회 교수는 이런 체념에 대해 “한국 사회에서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지 오래됐고, 인공지능(AI) 발전 등으로 산업 구조가 빠르게 변하는 전환기에 청년들은 문제를 제기하기보단 체념하고 구조적인 불평등에 적응하는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진수는 “상속세 완화 논의를 보면 거대 양당은 모든 자원을 자신들이 사는 서울, 그중에서도 강남에 집중시키고 나머지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서민과 점점 멀어지는 이유”라며 “민주당은 이미 중도보수를 선언했고, 국회에서 진심으로 서민을 위하는 진보정당이 사라졌기 때문에 정치가 의제를 발굴하는 능력도 잃어버렸다”고 꼬집었다.
2025년 봄, 정치는 상속계급사회로 가는 한국 사회의 시계를 멈추고 불평등을 의제화할 수 있을까. 윤석열 탄핵으로 열린 조기 대선은 이제 시작됐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채윤태 기자 chai@hani.co.kr
도움 주신 분들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김병권 녹색전환연구소 연구위원
김유찬 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
김창환 미국 캔자스대학 사회학과 교수
류덕현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신승근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소장(한국공학대 복지행정학과 교수)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조돈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사장(가톨릭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홍정훈 한국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

상속 계급사회(Inheritocracy)를 다룬 2025년 2월 마지막 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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