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슬픔들을 조목조목 써서 읽었는데, 반향이 있어서 감사했어요. 외면받는 발언이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2024년 12월17일 부산 동래구의 한 카페에서 김유진(가명)씨를 만났다. 유진씨는 12월11일 부산 번화가인 서면에서 열린 내란죄 피의자 대통령 윤석열 탄핵 집회에서 주목을 끈 청년 여성이다. “저는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소위 말하는 술집 여자입니다. (…) 많은 사람이 편견을 가지고 저를 경멸하거나 손가락질하실 것을 알고 있지만, 오늘 저는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그 권리와 의무를 다하고자 이 자리에 용기 내 올라왔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한 유진씨 연설 장면은 큰 화제가 됐다. ‘엑스’(X·옛 트위터)에서 유진씨 영상 조회 수는 500만 회를 훌쩍 넘겼다.
(⇒ 김유진씨 인터뷰 전문 읽기 :“‘500만조회’ 부산 집회 여성 , 변희수 하사님 돌아가셨을 때 너무 가슴 아팠다”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6594.html )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린 유진씨의 연설은 ‘윤석열 퇴진’만을 말하지 않았다. 쿠팡 택배노동자의 과로사 문제, 경기 파주시에 있는 성매매 집결지 용주골에서 재개발 명목으로 진행되는 일방적인 철거(행정대집행)로 ‘성노동자’ 여성들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문제, 학생을 탄압하고 학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동덕여대의 일방적인 남녀공학 전환 추진,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 문제, 교제폭력, 이주노동자 자녀가 겪는 차별, 지역 혐오 등을 차례로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완벽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유진씨 말은 연설이라기보다는 대화다. 같이 지혜를 모아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차별받고 배제된 사람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해나가자는 제안이다. 이러한 방식의 연대는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며 2016년 10월29일부터 2017년 3월11일까지 진행된 ‘촛불집회’를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집회와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비롯한 과거의 민주화운동과 구별 짓는 특징 중 하나다. 독재정권 타도와 민주정부 수립을 추구한 과거 민주화운동은 ‘민주 대 독재’ ‘자본 대 노동’이 주요 의제였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집회 의제는 하나였다.
반면 촛불집회에서는 다양한 시민 일상과 연결된 문제가 이슈로 부상했다. 정치학자 고원은 저서 ‘촛불 이후: 새로운 정치 문명의 탄생’(2017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촛불혁명에서 의제를 설정하는 과정을 보면 새로운 시대의 특성이 관찰되는데, 민주 대 독재, 개혁 대 수구, 보수 대 진보, 자본 대 노동, 영남 대 호남과 같은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구조적 요소와 관련된 이슈가 쇠퇴하고 생명, 건강, 환경, 주거, 교육, 일자리처럼 대중의 일상 속에서 제기되는 쟁점이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새로운 정치 주체로 부상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특징은 대통령 윤석열이 선포한 비상계엄이 해제된 12월4일부터 12월14일까지 서울 여의도 국회 등 전국에서 열린 ‘윤석열 탄핵’ 집회에서도 나타났다. 앞으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릴 집회도 마찬가지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 2차 표결을 진행한 12월14일 집회에서 20대 청년 여성 송예은씨는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희생자 및 유가족, 일터에서 숨진 노동자들, 2015년 11월 경찰 물대포를 맞고 이듬해 사망한 백남기 농민,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피해자와 성폭력 피해자들, 현장학습 실습 중에 사망한 고등학생들, 성확정 수술을 받은 뒤 2020년 1월 육군으로부터 강제 전역 처분을 당한 고 변희수 하사 등을 차례로 불렀다. “우린 이들의 피눈물 위에서 살아갑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동료 시민을 기억해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박경석 대표는 무대 위에 엎드린 자세로 몸을 부르르 떨며 비장애 시민들에게 간곡히 청했다. “장애인도 이동하게 해주십시오! 장애인도 교육받게 해주십시오! 장애인도 노동하고 싶습니다! 장애인도 감옥 같은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바로 여러분이 사는 지역사회에서 함께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집회 참여자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요구사항을 외친 박경석 대표를 향해 환호와 큰 박수를 보냈다. 12월4일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주최로 ‘윤석열 대통령 사퇴 촉구 탄핵 추진 비상시국대회’가 열린 국회에 간 박경석 대표를 향해, 당시 비상시국대회 참여자들이 야유를 보낸 것과 대조적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당시 박경석 대표에게 마이크를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 옆에 박경석씨가 뭐 할 말 많다고 계속 저한테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박경석 선생님, 뭐 이런 행사 하는 데 와서 그렇게 하면 그게 호소력이 있겠어요? 더 미움 받지. 이 마이크로 할 얘기를 하고, 그다음에 조용히 하세요.”
다만, 소수자들 목소리에 많은 사람이 더욱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윤석열 탄핵’ 집회가 2016~2017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와 다른 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촛불집회 때는 ‘다양한’ 목소리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20대 여성 이다슬(22)씨는 “중3 때 촛불집회에 참여했는데, 그땐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 저절로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도 그렇고 집회 분위기도 다른 의제를 제치고 ‘정권교체’라는 의제에 많이 집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소수자를 향한 차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많은 시민이 ‘윤석열 퇴진’ 이후의 사회는 어떤 사회여야 하는지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30대 여성 김아무개(34)씨는 “촛불집회가 끝나고 집권한 문재인 정부와 집권여당(민주당)마저 차별과 편견에 짓눌려 사는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노동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해결할 어젠다(의제)를 나중으로 미루며 뭉개고 가는 게 심했다. 대표적인 게 차별금지법”이라며 “시민들이 주도한 이번 집회에서는 그 실망감과 피로감을 어느 정도 해소한 것 같다”는 소감을 전했다.
“12월11일 ‘윤석열 즉각 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하 비상행동) 발족식이 열렸는데, 참석자들 맨 앞줄에 박한희 변호사가 성소수자 단체 대표 자격으로 앉아 있었어요. 전국 시민사회단체 1500여 곳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모두 한마디씩 하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박한희 변호사가 발언할 수 있는 포지션을 얻었다는 것이, 옛날이었다면 글쎄요. 성소수자 단체에 과연 마이크를 줬을까요?” 김씨의 말이다.
이처럼 촛불집회 때 외면당한 ‘주변부’의 이야기가 이번 집회에서 조명받을 수 있었던 건, 사회 여러 분야의 활동가들이 소외된 동료 시민들의 문제를 알리기 위해 “애써온 덕에 이뤄진 진보”라는 게 유진씨 생각이다.
“(12월7일) 국회 앞 집회에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분(심미섭 페미당당 활동가)이 무대에 올라 퀴어, 페미니스트, 성평등을 말했더니 몇몇 남성분이 ‘지금 왜 얘기하냐’는 식의 발언도 있었대요. 그런데도 (저처럼) 이렇게 발언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자체가 예전이랑 다른 것 같아요. 촛불집회 때 같으면 엄청나게 비난을 들었을 거란 말이에요. 제가 ‘2등 시민’에서 ‘동등한 시민’의 일부가 되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감격을 좀 받았어요.”
유진씨는 이번 집회 현장에서 혐오발언이 줄어든 것도 괄목할 만한 변화로 꼽았다. 촛불집회 때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혐오적 표현이 난무했다. ‘개같은 ×’이라는 욕설뿐만 아니라 박근혜 전 대통령 얼굴과 나체 사진을 합성한 사진이 등장했고, 박 전 대통령을 ‘미스 박’으로 호칭하거나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와 같이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이 속출했다. 여성적인 것을 남성적인 것보다 낮게 평가하는 가부장제가 광장에 스며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언론은 평화시위를 말했지만 그 평화는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여성 대통령의 잘못이 곧 여성의 잘못이 되는 혐오발언이 쉴 새 없이 등장했고, 여성을 향한 언어적·신체적 폭력에 시시각각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우지안 페미당당 활동가가 2018년 문화과학지 ‘문화과학사’에 쓴 글 ‘미투, 살아남은 자리에서 말하기’의 일부 내용이다.
‘윤석열 탄핵’ 집회를 주최한 비상행동은 참여자들에게 ‘평등하고 민주적인 집회를 위한 모두의 약속’을 강조했다. 집회 발언시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 이주민 등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말을 하지 않을 것, 욕설이나 차별, 혐오, 외모 평가 발언 없이도 싸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제안이다. 우지안 페미당당 활동가는 “이미 각자의 광장에서 목소리를 낸 사회적 소수자 당사자들이, 많은 규모의 대중이 모인 광장에서 발언하는 정치적 주체로서 전보다 더욱 가시화됐다”며 “촛불집회 때보다 이번 `윤석열 탄핵' 집회에서 소수자 당사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면서 광장에 존재할 수 있는 건, 다양성을 포용하라는 소수자들 요구와 동료 시민들의 연대가 만든 변화”라고 밝혔다.
최근 ‘윤석열 퇴진’ 집회에선 유진씨처럼 20·30세대 청년 여성이 전면에 등장했다. 여성들은 전부터 광장에 늘 있었다. 기성세대와 기성 언론, 기성 정치가 보지 않았을 뿐이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투쟁하는 여성이 최근 들어 갑자기 많아진 게 아니에요. 1970~1980년대에도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계속 투쟁해오셨잖아요. 엠제트(MZ) 세대 여성이 어느 날 갑자기 ‘짜잔’ 하고 등장한 게 아니라 꾸준히 있었는데, 드디어 세계가 우릴 봐준 게 아닐까 싶어요.”
여성들은 촛불집회, ‘윤석열 퇴진’ 집회 전부터 일찌감치 정치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 집회, 2017년 형법상 ‘낙태죄’ 폐지를 촉구한 검은 시위, 2018년 서울 혜화역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집회, ‘버닝썬 성폭력 사건’에서 비롯된 2019년 ‘강간 카르텔’ 유착수사 규탄 시위 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엔(n)번방 성착취 사건, 불법합성물(딥페이크) 성폭력 사건 규탄 집회랄지 기후정의행진과 같은 여러 정치 현장에 늘 참여하며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를 외쳤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래 터져 나온 여성의 목소리와 행동은 생활세계, 사회세계, 지성 및 담론 공간, 제도정치의 공간 등에서 각각 다른 수준의 변화를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천정환 성균관대 교수 ‘촛불 이후, 케이(K)-민주주의와 문화정치’, 2020년)
그런데 기성세대와 기성 언론, 기성 정치는 이를 민주화운동으로 보지 않는다. 이들이 이번 ‘윤석열 탄핵’ 집회 때 청년 여성들의 참여가 많은 일에 대해 ‘민주주의가 당연하게 주어진 줄 알았는데 비상계엄 선포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상황이 현실에서 나타난 것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과 같은 안일한 평가를 하는 이유다. 마치 여성들이 평소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바라보는 잘못을 예전부터 계속 저지르고 있다.
20대 여성 강나라(21)씨는 “이번 집회에도 이삼십 대 여성이 많이 온 이유는 그동안 쌓인 울분이 터졌기 때문”이라며 “여성을 포함한 사회적 소수자는 평소 ‘사회가 안전하지 않다’고 인식한다. 혐오범죄랄지 차별, ‘페미사이드’(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살해)와 같은 죽음이 내 일상에서 아주 먼 이야기가 아니라고 여긴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를 겪은 세대여서 그런지 그런 감각이 더하다”고 말했다. 정성조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집행위원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들은 집회를 통해서, 혹은 온라인 공간에서 여러 목소리를 낸 경험이 있고, 빠르게 광장으로 결집할 수 있는 근육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며 “반면 이삼십 대 남성들은 ‘우리가 살면서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해결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를 겨냥해 전혀 생산적이고 건설적이지 않은 방식의 혐오를 드러내는 정치로 귀결되고 있다”고 밝혔다.
‘모두가 안전하고 평등한 사회’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하거나 없는 건 20·30세대 남성들이다. 30대 남성 안아무개(35)씨는 “게임을 하면서 만나는 주변 20~30대 남성들을 보면 (여성혐오나 여성차별이 생산되는 공간인) 오늘의유머, 에펨코리아, 디시인사이드와 같은 남초 커뮤니티 활동을 깊게 하는 사람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사회문제에 크게 관심이 없고 사회가 어떻든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 대개 이런 모습”이라며 “‘여자는 왜 군대에 가지 않냐’ 같은 안티페미니즘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본인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대통령 윤석열의 직무는 정지됐다. 헌법재판소(헌재)는 대통령 윤석열의 탄핵심판 절차에 돌입했다. 만일 헌재가 향후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주문을 낭독하며 탄핵을 결정하고, 우리 사회가 대통령 선거를 치러 새 대통령을 뽑으면 비극은 끝나는 걸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 촛불집회의 한계이고, 이번 ‘윤석열 퇴진’ 집회에서 극복해야 할 과제다. 천정환 교수는 저서에서 “촛불항쟁은 박근혜 퇴진-정권교체 이상의 (암묵적) 강령과 요구를 갖고 있었으나 그것을 구체화하는 데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정권교체가 아닌 진정 새로운 정체(정치체제)의 구성이나 신자유주의 극복, 복지 문제도 구호 수준 이상으로 제기되지 못한 채 촛불은 종결됐다”며 “촛불항쟁은 박근혜 탄핵을 성취한 후 급격히 선거 국면으로 빨려 들어가며 일단 중지됐다. (…) 촛불 속에 내장된 더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변화에 대한 열망의 실현은 뒤틀리고 연기됐다”고 진단했다.
유진씨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이 곧 ‘소외된 이들의 삶이 진보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차별금지법은 제정되지 않았고, 성소수자들은 여전히 사랑하는 동반자와 법률혼을 할 수 없다. 지하철 전 역사 엘리베이터 설치와 저상버스 확대와 같은 장애인 이동권도 획기적으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진씨는 ‘윤석열 탄핵’이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삶에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보고 있다. “사회에서 소외돼본 경험이라는 건 생각보다 굉장히 중요하더라고요. 노동자,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혹은 전라도 출신 같은 지역 차별까지…. 그런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차별이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알게 돼요. 국가가 소외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걸 계속 묵과하고 방치하고 있어요. (2021년) 변희수 하사님 돌아가셨을 때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그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죽음이 많아요. 존재 자체를 계속 부정당하는 경험을 하면 정신이 피폐해져요. 특히 이번 정권은 ‘동성애는 자유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줘선 안 된다’는 혐오발언을 하는 국가인권위원장(안창호) 임명, 여성가족부 폐지 추진 등을 통해 혐오와 성차별을 조장했어요.”
‘윤석열 퇴진’ 집회 과정에서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은 대통령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정하고 ‘질서 있는 퇴진’을 강조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탄핵소추안 가결을 밀고 나갔다. 유진씨는 어떤 정치를 바라고 행동한 것일까.
“가능하면 양당제가 아닌 다당제가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더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으니까. 국회 구성원을 보면 다주택자 비율이 굉장히 높고, 서울대·연대·고대 출신이 매우 많고, 또 여성 비율은 너무 낮잖아요. 국회가 실제 다양한 시민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구조예요. 인터넷에서 보고 감명 깊었던 글이, 국회에 쿠팡 노동자, 창녀, 가난한 사람, 고졸 이런 사람들도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야 사회를 대변할 수 있으니까.”
30대 남성 동성애자(게이) 송아무개(35)씨도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고 ‘윤석열 탄핵’ 집회에 참여했다고 한다. “박근혜 퇴진 집회 때는 저의 성소수자 정체성을 갖고 광장에 나간다는 생각을 아예 못했는데, 12월14일 집회 때 제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깃발을 들고 국회 앞에 나갔어요. 불안하기도 했어요. 누군가가 저에게 시비를 걸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성소수자인 우리도 ‘시민’이라는 것을 조금 더 보여주고 싶었어요. 촛불집회 이후 8년이 지났잖아요. 그 뒤로 지금까지 페미니즘 백래시, 성소수자 혐오 목소리가 더 커지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아, 내가 나를 더 드러내서 목소리를 내야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세계적인 석학 주디스 버틀러는 그의 책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에서 “여성, 퀴어, 트랜스젠더, 빈민, 장애인, 무국적자, 종교적·인종적 마이너리티”는 자신의 취약성 때문에 모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공공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정치적 의지를 가시화할 수 있다.(허윤 부경대 교수 논문 ‘87년 이후 광장의 젠더와 계보’(2020) 재인용)
20대 여성 홍은솔(24)씨는 “내가 원하는 사회는 특정 지도자와 특정 정당이 집권하는 사회가 아니다. 그런 납작한 말로 규정할 수 없다”며 “사회적 소수자 차별과 혐오, 백래시를 동력으로 삼지 않는 정치, 여성과 장애인·난민·성소수자 등 동료 시민을 적으로 삼고 갈라치는 정치가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안전하게 노동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가족을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고, 교육과 복지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있어서 비싼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유진씨는 성매매 여성 등을 향해 경멸의 의미를 담아 “쿠팡이나 뛰어라”라거나 “공장으로 가라”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인터넷에서 볼 때면 ‘이 사람은 얼마나 건강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길래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곤 한다. 자신이 주변에서 본 ‘성노동자’들도 대체로 부양할 가족, 특히 큰 병원비가 필요한 아픈 가족을 둔 경우가 많았다. 유진씨는 “늦었지만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학비를 모으고 있다”며 “사회학을 전공하고 시민활동가로 일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그 꿈을, 자신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도 안전한 사회에서 실현할 수 있기를 유진씨는 오늘도 바라고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부산=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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