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적으로 고급호텔이란 200명에게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지도 않은 것에 터무니없는 호된 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 100명이 죽어라 일하는 곳이다.”
100여 년 전, 조지 오웰이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에서 한 이야기. 엊그제 누가 한 말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요즘은 고급호텔만으로 부족하다. 지상이 아닌 선상에서 즐기라 한다. 크루즈 여행 상품을 내밀며 일상에서 탈출하라고 권한다. 효도 상품이란 말을 덧붙인다. 돈이 없다면, 다달이 선불로 할부금을 납부해 다녀오라고 한다. 무엇이건 떠나라 한다. 워터파크와 불꽃놀이에, 선상 파티가 열리니 드레스를 챙겨 가라고 귀띔한다. 말 그대로 “일상에서의 완벽한 탈출”이다. 내가 그것을 진정으로 원했는지와는 상관없이.
나와 상관없을 거라 생각한 크루즈를 실물로 영접하게 된 곳이 하필 제주 강정이다.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오랫동안 싸워온 그 강정. 2016년 이후 강정항은 ‘강정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이 됐다. 주민들의 기지 건설 반대를 잠재우려 정부가 제시한 것이 관광미항이다. 정부 관계자들은 ‘관광객 유치’에 따른 ‘경제 효과’에 따른 ‘마을 발전’에 따른 ‘화합과 상생’의 전망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강정항엔 해군 함대와 크루즈 선박이 함께한다.
처음 봤을 땐 기지 너머에 커다란 건물이 세워진 줄 알았다. 그런데 건물이 움직인다. 어마어마한 크기다. 제주로 들어오는 대형 크루즈선은 보통 높이 50m, 길이 300m에 11만t 정도. 18층 아파트 크기다. 3천 명 넘게 수용한다니 아파트 한 동보다 더 많은 사람이 저 안에 있다.
커다란 배에 올라탄 이상 ‘호된 값’을 치를 수 있게 모든 것이 풍족하다. 매끼 천 단위의 식사가 준비되고, 온수가 끊기지 않고, 조명은 밤새 반짝인다. 그 결과 대형 크루즈 한 대가 일주일 항해에 배출하는 폐기물 양은 오물 8천t, 생활하수 400t, 기름 섞인 물 10t, 연료 2500만t가량.(지구의벗(FOE), 갤런 단위를 t으로 변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자동차 8만4천 대와 맞먹는다.(독일자연보호협회(NABU)) 하수와 오물은 바다로 흘러가고, 폐기물은 정박지의 몫이다. 그러니까 강정 같은 곳.
크루즈에서 하선한 관광객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사라지면, 강정에는 쓰레기와 함께 탄소, 미세먼지, 해양오염이 남겨진다.(강정평화네트워크 등은 크루즈 정박이 가져올 환경파괴를 측정·조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주민들은 의아하다. 기대한 바가 아니다. 관광버스가 마을을 지나치자 사업 관계자들은 대형 쇼핑몰 건설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돈 쓸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며, 작은 마을에 240평 규모 쇼핑몰이 등장한다. 건설로 부풀린 기대를 메우기 위해 또 다른 건설을 한다. 길은 닦이고 나무는 잘린다.
‘먹고사는 문제보다 풍경이 앞서느냐’라고 묻는다면 그 말에 답할 수 없다. 도시에서 자란 나는 남기고 싶은 풍경 하나 가지지 못했다. 몇 년간 공사 소리가 들리지 않은 곳에서 지내본 적이 없다. 이사하는 곳마다 지하철 연장 공사를 하고 있다. 지하철역이 세워지면 그 주변에 무슨 일이 생길지 빤하다. 동네의 전경이 달라지겠지. 그건 풍경이 아닌 터전의 문제다. 지상에서건 선상에서건 우리는 호된 값을 치르고 있다.
새만금 신항만에도 크루즈항을 세우겠다고 한다. 새만금에도 관광객 유치와 경제 효과와 마을 발전과 화합과 상생이 올 거라 이야기했을까. 채워지지 않을 기대는 또 무엇으로 메우려 할까.
희정 기록노동자·‘뒷자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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