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이학래는 17살 때인 1942년 면사무소의 ‘권유’로 일본군 군속(군무원)이 됐다. 사실상 강제 징용이었다. 이학래는 타이 왕야이와 힌똑 등지에 있던 포로수용소에 배치돼 포로감시원으로 일했다. 당시 일본군은 연합군 포로에게 인도적 대우를 규정한 제네바협약을 적용하지도, 조선인 포로감시원에게 협약 내용을 교육하지도 않았다. 이학래는 다른 조선인 포로감시원들과 함께 연합군 포로들을 비인간적으로 대우하고 학대했다. 전쟁이 끝난 뒤 전범으로 지목됐고, 교수형까지 선고받았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전범 재판을 받은 조선인 148명 중 129명, 사형된 조선인 23명 중 14명이 포로감시원이었다. 이를 두고 한국도 일본과 같은 전범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의 전쟁 책임을 부인하는 극우들의 논리다. 사회학자 조형근은 최근 펴낸 책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에서 이 역사를 소개하면서 동시에 이렇게 말한다. “구조적 악이 있다면 그에 동조한 개인의 윤리적 책임은 간단히 면제될 수 있을까? 이학래가 수기에서 고백하듯 결코 그렇지 않다. 일본과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져야 할 몫의 역사적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때에만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다.” 조형근은 이를 “연루됨의 윤리”라고 설명했다.
1964년 9월 한국 정부는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했다. 파병 인원은 누적으로 30만 명에 이른다. 참혹한 전쟁은 이들의 마음과 몸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한국군은 전쟁에서 죽음을 당하기도 했고, 동료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기도 했고, 상대 군인을 죽이기도 했고, 민간인을 죽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생긴 트라우마로 어떤 이들은 내적 고통에 시달리고, 어떤 이들은 그 고통이 몸으로 이어져 병을 앓고, 어떤 이들은 오늘도 군복을 입고 인정투쟁에 나선다.
이들을 질기게 옭아매는 물리적 상흔도 있다. 전쟁 도중 적군 식량 파괴 등의 목적으로 미군이 베트남 땅 곳곳에 뿌린 고엽제 후유증이다. 맹독성 화학물질이 포함된 이 다이옥신계 제초제가 몸 어딘가에 흡수돼 잠복해 있다가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들의 자식 세대, 심지어 이들의 손주 세대에까지 질병을 유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겨레21 단독 보도로 확인됐다.(1531호 표지이야기 “손자의 척추기형, 연결고리는 할아버지의 고엽제”) 하지만 국가는 1세대 참전군인들의 고엽제 후유증 인정에 인색하고, 2세대와 3세대의 후유증 유전에는 관심이 없다.
국가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 다수자는 여전히 베트남전을 “우리 경제의 경이로운 성장을 할 수 있게 한 사건”(파이낸셜리뷰, 2024년 4월19일)이라고 일방적으로 해석하거나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공식 인정하지 않았고, 베트남 정부도 한국 정부에 사과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조선일보, 2020년 6월30일)며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는 행태를 취한다. 여기서 ‘연루됨의 윤리’란 이런 해석과 행태를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요청을 받고 파병됐던 이들과 이들의 후세대가 겪고 있는 상흔을 함께 책임지겠다는 마음가짐, 생존하는 베트남전 민간인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라도 기울이려는 태도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겨레21 1531호가 이 최소한의 윤리를 공유하기 위해 함께 읽기를 제안하는 까닭이다.
이재훈 편집장 nang@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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