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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의 1991년, 1994년, 그리고 2024년

등록 2024-07-19 21:43 수정 2024-07-23 17:57


1991년 5월18일 오전 11시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앞.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무자비하게 폭행당해 숨진 강경대 열사의 장례식과 발인이 있는 날이었다.

연세대 맞은편 철둑길 인근에서 이정순(당시 39살) 열사가 몸에 불을 붙였다. 주변의 학생들은 울부짖으며 “응급차 불러, 길 비켜” 소리쳤다. 일부 학생들은 “사진 찍지 마, 똑바로 보도하지도 못하는 것들이 찍긴 왜 찍어”라고 외치며 현장의 사진기자들을 끌어냈다. 학생들이 이 열사를 신문에 싸서 들고 세브란스병원으로 뛰었지만 이 열사는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언론 보도가 이상했다. 홍콩 일간지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SCMP) 기자 브루스 체스만은 “여인의 몸이 불타는데 불을 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끄려는 나를 누군가 잡아당겨 방해했다”는 기사를 썼다. 이 보도를 <중앙일보>와 문화방송(MBC) 등이 인용해서 운동권 학생들이 이 열사의 죽음을 방관한 것처럼 보도했다.

당시 MBC 사회부 5년차 기자였던 이진숙은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며칠 뒤 전국언론노동조합 <언론노보>에 글을 기고한다. 그는 “체스만 기사 중 유독 ‘운동권 학생들이 분신한 사람의 죽음을 방조하고 오히려 원했다’는 부분만 우리 언론들이 무책임하게 인용·보도한 것에 대해 놀랐다”고 썼다. 이 글을 계기로 이정순 열사 죽음의 기록은 바로잡힐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92년 10월5일, 최창봉 전 사장의 보도 탄압에 맞서 MBC 구성원들이 파업하던 시기에 서울 시내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1면 헤드라인으로 “그래도 공정방송은 꺾일 수 없습니다”라고 적힌 <언론노보> 170호 ‘방송 민주화 특보’를 나눠준 사람도 이진숙이었다.

그랬던 그가 32년의 세월이 흘러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로 다시 국민 앞에 섰다. 후보자 지명 소감문에서 그는 6분에 걸쳐 현행 공영방송의 보도와 언론노조에 대한 적개심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는 대체 왜 변심을 결심했을까. MBC 구성원 여러 명에게 물었다. “능력에 비해 당신이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입사 동기), “원래 공명심이 세고, 입신양명을 위해 기자질을 포장했던 사람”(후배)이라는 목소리 등이 나왔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이진숙 후보자가 쓰거나 공저자로 참여한 세 권의 책 <오늘밤 마이크가 그립다>(1991년), (1996년), <인생기출문제집2>(2010년)를 차례로 읽으면서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봤지만, 집필 시기가 오래돼 책에서 그의 변심 사유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다만 1994년 4월22일 기자 이진숙이 일기장에 쓴 글귀는 소리 내 읽어주고 싶다.

“사람의 명예에 대한 욕구는 타고나는 것일까. (…) 결국 명예에 대한 동경은 힘 또는 권력의 추구로 이어지게 됨을 본다. (…) 히틀러의 제3 제국이나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도 힘과 권력에 자신을 상승 동일시하는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되니, 독자적인 인간 정신의 고양을 바란다면, 무조건적인 명예탐이나 권력욕은 쉬지 않고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이진숙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는 2024년 7월24일과 25일 이틀에 걸쳐 국회에서 열린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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