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에 있는 영풍석포제련소에서 사람이 또 죽고 다쳤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불과 3개월 전에도 사망사고가 났다. 석포리 주민들은 50년 넘게 제련소와 싸워왔다. 노동자뿐 아니다. 여기서는 인근의 강과 산, 소나무와 다슬기도 전부 죽어 나간다. 내 잘못은 그저 뒷북을 친 데만 있지 않다. 바로 이틀 전, 나는 거대 쇼핑몰 안 대형서점에서 책과 디퓨저 따위를 잔뜩 샀다. 바로 저 제련소로 부를 축적한 모기업이 운영하는 서점이었다. 그곳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우리는 너무 자주 잊는다. 4·10 총선 결과만 봐도 그렇다. 용산 참사 당시 강경 진압을 지시하고 경찰력을 댓글부대로 동원했던 전 서울경찰청장은 내리 3선에 성공했다. 2023년 겨울까지도 “용산 참사는 전문 시위꾼의 도심 테러”라며 망언한 인물이다. 당대표 선거에서 돈봉투를 챙겼다고 의심받던 국회의원 21명 중 11명이 다시 배지를 달았다. 그러니 기업은 불매운동 직후에만 몸을 사리고, 정치인은 선거 직전에만 몸을 낮춘다.
바야흐로 인류에게 기억보조장치가 필요한가. 쇼핑할 때마다 해당 기업의 산업재해 사고나 이에스지(ESG, 환경·사회책임·지배구조) 현황 등이 눈앞에 팝업 광고처럼 뜨면 자본은 덜 뻔뻔해질까. 사극에서 ‘김아무개. 노론의 실세. 훗날의 영의정’ 하듯 화면 속 정치인 얼굴 아래 ‘편법대출 의혹’ ‘암컷들이 나와서 설치고’ 따위의 설명이 매번 자동 생성되면 우리 정치는 좀 나아질까. 언제나 기대와 공포를 동시에 안기는 첨단 테크놀로지가 이번에는 인류의 공생에 순기능만 다할 수 있을까.
사실 기억보조장치는 낯익은 미래다. 테드 창은 10년도 전에 단편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에서 초소형 보디캠으로 일상을 전부 기록하는 ‘라이프 로그’와 기억 검색엔진을 소개했다. 고바야시 야스미의 소설 <분리된 기억의 세계>에서는 10초 이상 장기기억이 불가능해진 인류가 자진해서 체내 메모리칩을 심는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미 스마트폰과 구글로 기억을 보조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는 인간의 뇌에 칩을 심는 임상실험에 일단은 성공했다.
그러나 이 장치가 통용되는 허구의 세계는 대개 디스토피아다. 기억의 외주화는 인간의 자존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떠올려 생각하기를 포기한 개인은 더는 개인이지 못하고, 세계에 개입할 수 없다. 우리가 외부장치의 보조를 받아서까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파편적인 정보나 사건의 선후관계 등이 아니다. 끊이지 않는 노동자의 죽음 앞에 삼켰던 울분, 반복되는 참사를 목도하며 느꼈던 비애, 번번이 실패하는 정치를 보며 치밀어올랐던 부아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경험과 감정으로 구성된 ‘나’의 기억이다. 철학자 한병철에 따르면 기억은 ‘사건을 항상 새로이 연결하고 관계망을 만들어내는 서사적 실천’이다.
기억하겠다는 언명이 유난히 많았던 4월이 지났다. 아무리 다짐해도 툭하면 잊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우리의 기억으로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 이야기는 잊히지 않는다. 또 다른 이야기를 낳는다. 보조장치 없이도 대대로 전해지며 각자의 기억을 더하고 변주해 세계를 만든다. 그래서 기억은 인간의 의무다. 잘못한 이들의 서사는 차단해도 좋다. 그것은 권리다. 세상엔 더 많은 이야기가 들려져야 한다.
신성아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