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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맥인 줄 알았는데 사랑일 수도

등록 2024-03-01 16:40 수정 2024-03-08 13:36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엄마가 나에게 글쓰기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책 들고 종종 강연을 다닌다 하니, 글쓰기 강의를 한다고 여겼나보다. “저는 개인 과외는 하지 않아요.” 냉정하게 거절했지만 마음 한 귀퉁이가 접힌 기분이었다. 그 시절 소녀들이 그랬듯 내 어머니도 한때 ‘문학소녀’였다. 결혼하고 애 키우느라 책과 점점 멀어졌다. 젊었을 적에야 먹고사는 일 틈바구니로 뭐라도 읽어보려 애썼겠지만 나이가 드니 어깨, 허리, 눈… 모든 신체 기관이 방해가 될 뿐이다. 내 몸도 벌써 그런다. “우리 나이엔 조명 밝은 데서 아니면 책 못 읽어.” 한평생 출판 편집 일을 해온 선배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에 반은 웃고 반은 끄덕인 게 불과 며칠 전이다. 닳아버린 몸과 맞바꿔 키운 게 고작 글 쓰는 재주밖에 없는 나라니. 배우고 싶다는 엄마의 말은 K-장녀의 부채감을 자극했다.

60살이 넘은 사람은

그렇다고 내가 가르칠 순 없지. 운전도 가족끼리 배우는 게 아니라고 했다. 온라인 검색창을 열어 ‘노년 여성 글쓰기 강좌’를 찾았다. 예상대로다. 없다. 애초에 노년 글쓰기 강좌 개설 수가 적은데다 그마저 교육 운동이나 마을공동체 운동이 핫한 동네에 몰려 있다. ‘노년’ 두 글자를 포기하고 글쓰기 모임을 찾는다. 이번엔 참가자 다수가 청년인지라 신청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모집 공고에 50대까지라고 연령 제한을 두는 곳도 있다. “60이 넘은 사람은 글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생각하나봐.” 엄마는 다소 풀 죽어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정정하고 싶었다. ‘아니야, 엄마. 사람들은 60 넘은 사람을 굳이 떠올릴 생각 안 해. 관심 자체가 없어.’ 잔정 없는 딸이란 소리나 한 번 더 듣지 싶어 입을 다문다.

온라인 탐색에 지쳐갈 때쯤 이런 생각이 든다. 꼭 글일 필요가 있나. 뭐라도 배우면 되지. 타협안을 들고 노년 대상 강좌를 검색한다. 트로트 댄스부터 웰다잉까지. 그런데 대부분 평일 낮 수업이다. 엄마는 직장인인데. 60살 이상 고령층 취업자 비율이 43%에 이른다는데, 일하는 노년은 어디서 무얼 배우나. 나이가 들면 책도, 글도, 배움도 다 의미 없는 것처럼 세상이 구성된다. 일하는 사람이라는 인정도 없다.

무슨 명절 이벤트도 아니고 특정 시기마다 폐지 줍는 노인(재활용품 수집 노인)에게 렌즈를 들이밀지만, 노년 노동자의 고용 현황은 고사하고 임금 실태조차 제대로 조사된 적 없다. 65살 이상 노동자는 고용보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고용보험이 없으니 취업 규모와 처우를 파악할 길이 없다. 평생직장 개념이 무너진 지 꽤 되었건만, 60살 정년(퇴직)이라는 환상은 여전히 남아 있다. 70살 이상 노인마저 4명 중 1명꼴로 일한다. 예순 넘어 안락한 휴식은 환상이다. 하지만 신기루가 사라진 현실의 자리엔 대책을 세워야 하니까. 환상은 무대책을 위해 유지된다.

너는 늙어봤냐

어느새 늙어버린 사람들이 농처럼 하는 말이 있다.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 꼰대의 서러움과 항변이 담긴 말. 그렇다. 늙어보질 못했다. 요사이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있다.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 소설(<하루>, 박성원) 속 글귀라는데, 이 문장을 볼 때마다 직업이 기록자인 까닭에 이런 생각을 한다. 누군가의 하루를 어떻게 알 수 있지? 통계 수치도 없고, 자기 스스로 삶을 써 내려갈 기회도 적다.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생애 처음인 ‘늙어가는’ 길을 걷는 나이 든 여성의 하루는 어떻게 알려지고 이해받을까. 우리는 노년의 세계를 알 수 없겠다. 그의 하루를 알 수 없으니.

최근 이런 제목의 책이 국내에 번역됐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포레스트북스 펴냄, 2023). 여전히 사랑하고 여전히 유쾌한 노인들의 일상을 짧은 시로 엮은 책이다. “손을 잡는다, 옛날에는 데이트, 지금은 부축.” 이런 식이다. 씁쓸하게 웃기도, 통쾌해서 웃기도 한다. 부정맥으로 헷갈리는 설렘이 찾아오는 노년의 하루를 알고 싶다.

희정 기록노동자·<베테랑의 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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