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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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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려온 산 사람이 살려야 할 산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 지리산이 품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헤아려보는 지리산의 마음
통곡의 역사 딛고 문명 전환 운동의 구심점, 댐·케이블카 등 개발 계획과 기후위기로 시름
등록 2023-11-18 11:56 수정 2023-11-21 07:55
지리산 성삼재에서 본 풍경.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지리산 성삼재에서 본 풍경.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1. 다양한 마음

이렇게나 먼 산골에 사람들이 공부하러 올까 했는데 기우였다. 2023년 10월14일 오후 전북 남원시 산내면 ‘아주 작은 페미니즘학교 탱자’(이하 탱자) 오픈 세미나에 7명이 모였다. 전남 구례·순천, 전북 임실, 서울 등에서 온 직장인과 활동가 등 다양한 직종의 남녀 20~40대 세미나원들이 함께 비건 식사를 하고 주제토론을 했다. 탱자 전담교수 박이은실 박사(여성학)는 2016년 산내면으로 귀촌했고 2018년부터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워 내 삶과 세상을 바꾸는 공부’라는 슬로건 아래 에코페미니즘, 자본주의, 탈성장, 자급의 삶 등을 공부하는 탱자를 열었다.

토론하면서 참여자들은 농촌 거주민으로서 겪는 안타까움이 크다고 입을 모았다. 농사지으며 느끼는 기후변화에 대한 참담한 심경, 시골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부동산 투기 광풍, 대농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적 농촌 정책의 한계, 소농 되기의 어려움, 마을의 여전한 가부장성과 남성중심성 등으로 인한 피로감에 대해서도 뜨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청년들이 관심 갖는 반문화 경향인 ‘뉴뉴에이지’(새로운 뉴에이지) 활동이나 생태주의자로서 고민과 한계도 토로했다.

박이은실 박사는 “극단적인 기후재난은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신호이고, 그 요청에 제대로 응답할 때이기에 함께 모여 책을 읽으며 기댈 방법을 찾아보자고 공부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비슷하게 절박한 감각을 가진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튿날 사람들은 천연염색을 함께 배웠고, 인근 마을장터인 ‘살래장’에서 사온 비건 빵을 나눠 먹으며 다음 모임을 기약했다.

전남 구례에서 열린 ‘2023 성다양성 축제’ 참가자들이 강강술래를 하고 있다. 정정환 제공

전남 구례에서 열린 ‘2023 성다양성 축제’ 참가자들이 강강술래를 하고 있다. 정정환 제공

시골장에 뜬 무지개

지리산 권역의 여러 귀농, 생태, 페미니스트 공동체는 교집합을 갖고 넘나드는 중이다. 이곳에 페미니스트 그룹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9년 전인 2014년이다. 2013년 산내면에 귀촌한 이유진(달리·협동조합 마고 대표)씨가 여성주의 문화단체 ‘문화기획 달’을 만들고 지역 독립계간지 <지글스>(지리산에서 글 쓰는 여자들)를 창간해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발행했다. 이후 마을 남성 페미니즘 모임인 ‘산내페친’이 만들어졌다. 2017년엔 산내에 살던 페미니스트들이 함께 마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성폭력에 대응하고 페미니스트 교육을 실천하는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 여성회의’를 만들었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청년들은 이런 문화 덕분에 모두 지리산에서 더 오래, 더 우정을 나누며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 임현택 사무국장은 “귀농 1세대들이 지리산 인근으로 이주했고, 그 뒤 공동체 문화가 조성된 지리산 인근 마을에 대안적이고 생태적 삶을 살려는 청장년들이 모여들어 새롭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말했다.

2023년 10월28일, 구례군 일대에서 ‘2023 성다양성 축제: 구례에도 무지개가 뜰까요?’가 열렸다. 마녀 복장, 카우보이 복장 등 다양한 코스튬을 한 사람들과 외국인들이 함께 무지개 깃발을 걸고 행진했다. 동네 어른들도 축제엔 장터가 빠질 수 없다며 감과 밤이며 나물을 들고나와 팔았다. “할머니가 뭐야, 언니라고 불러!” 깔깔깔, 웃음보가 터졌다.

소수자의 축제가 모든 이를 포함하는 어우러짐의 난장으로 변했다. 다양한 성을 가진 인간들과 동물이 함께 강강술래를 하며 손잡고 춤추던 큰 원에서 배제된 자는 없었다. 기획단은 “앞으로도 이 좁고 작은 지역에서 안전하고 오래 축제를 이어가기 위해 너무 많은 이에게, 특히 혐오세력에게 알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행사 장소나 정보가 안내되는 인스타그램 주소 등은 밝히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 제작한 지리산 공동체 지도. 지리산이음 제공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 제작한 지리산 공동체 지도. 지리산이음 제공

#2. 절박한 마음

지리산을 사랑한 시인 고정희(1948~1991)는 뱀사골에서 등반 중 실족사했다. 그는 ‘영원하구나 지리산이여’라고 노래했지만, 그 산도 기후변화를 피해가지 못했다.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화엄사 계곡엔 붉게 물들기도 전에 말라버린 이파리가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침엽수 중 유일한 한국 특산종인 구상나무는 지리산에서도 여러 구간에서 발견되는데 빠르게 소멸하고 있다.

지리산 권역 3도, 5개 시군은 개발계획을 밀어붙이고 있다. 양수댐, 케이블카, 산악열차, 골프장, 덕소령 도로 건설 등이다. 먼저 남원시와 국토교통부(한국철도기술연구원)가 추진하는 산악열차 시범사업은 남원시 육모정부터 정령치까지 총 13㎞ 구간에 전기열차를 설치하는 것인데, 이 중 9.5㎞가 국립공원 구역을 지난다.

이미 시장 포화로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케이블카 사업은 윤석열 정부가 41년 만에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사업 계획을 추진하면서 지리산 인근 지방자치단체들을 온통 흔들어놓았다. 2023년 11월1일 경남 지역 국민의힘 국회의원 12명과 박완수 경남도지사는 서울 여의도에서 지리산 케이블카 설치를 포함한 국비사업 26건을 위한 국비 4700억원 확보에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케이블카, 골프장, 양수댐, 지방도…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지리산사람들’ 윤주옥 대표가 ‘지리산을 그대로’라고 쓰인 광목으로 된 손팻말을 펴들고 있다. 윤 대표는 “1998년 어느날 지리산에 갔다가 해가 지는데 한발한발 어둠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며 “자연 안에서는 내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구나, 이대로 잘 지켜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줘야지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지리산사람들’ 윤주옥 대표가 ‘지리산을 그대로’라고 쓰인 광목으로 된 손팻말을 펴들고 있다. 윤 대표는 “1998년 어느날 지리산에 갔다가 해가 지는데 한발한발 어둠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며 “자연 안에서는 내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구나, 이대로 잘 지켜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줘야지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지리산 골프장 건설 추진으로 구례의 사포마을 다랑논도 위기에 빠졌다. 이곳은 2023년 10월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주최한 ‘2023 이곳만은 지키자!’ 시민공모전에서 환경부장관상을 받을 정도로 아름답고 생태·환경적으로 보존 가치가 높다. 하지만 구례군은 시행사 피아웰니스, 시공사 삼미건설과 업무협약을 맺고 산동면 관산리 일대 150만㎡(약 45만 평) 부지에 27홀 규모 골프장을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사포마을 주민들은 골프장 잔디 관리를 위해 쓰일 농약과 제초제 오염수가 다랑논으로 흘러들 것이라며 논농사 존폐를 걸고 골프장 건설에 반대하고 있다.

구례군과 곡성군은 양수댐 유치에 뛰어들었다. 문재인 정부 시절 하동군이 화개면 일원을 예비후보지로 선정해 지리산 양수댐을 유치하려 했지만 주민들이 총력 저지해 군이 공모사업을 포기한 바 있다. 구례군은 주민들이 등장하는 유튜브를 만들어 양수댐 건설을 지지하는 여론을 적극적으로 조성하고 있다. 전남도사회단체연합회 소속 31개 단체 대표 30명도 2023년 11월1일 전남도청 앞에서 구례군과 곡성군에 양수발전소 선정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함양군과 하동군은 함양~하동 지방도 제1023호선 가운데 벽소령 구간(함양군 마천면~하동군 화개면 23.8㎞)을 12m급 도로로 연결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사람과 동물이 함께 지나는 숲길을 포장하면 멸종위기종 반달가슴곰의 이동통로가 가로막힐 뿐만 아니라 수많은 동식물의 자연 훼손이 불가피하다.

이상돈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교수팀은 국제학술지 <생명보전>에 실은 보고서에서 한국 고유종인 구상나무의 지리산 서식지가 기온 상승과 강수량 감소로 가파르게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지리산은 이미 그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연구진은 해발 1500m 이상에 사람이 덜 찾아오도록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구상나무 고사와 막개발 등으로 나무가 사라지면서 지반이 약해져 고지대 비탈면 산사태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집중호우 강도가 심해져 피해는 더 클 것으로 보인다.

2019년 지리산 천왕봉 주변 고산 침엽수들이 집단 고사하고 있는 모습.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2019년 지리산 천왕봉 주변 고산 침엽수들이 집단 고사하고 있는 모습.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개발된다고 사람들이 모일까

지리산권에서 산청군과 함양군은 인구 3만 명대, 구례군과 곡성군은 인구 2만 명대로 전남에서 인구 소멸 위험이 큰 곳이다. 하지만 개발은 사람들을 불러모으지 못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리산 이주민들은 지리산의 자연을 찾아오는 것이고, 지리산에서 농사짓거나 자연물을 채취하는 사람들의 생존도 보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지리산사람들’ 윤주옥 대표는 “전국에서 지리산을 찾는 탐방객이나 지리산 인근 마을로 귀촌하는 청년들은 ‘지리산’ 자체가 좋아서 모이는 것인데, 오히려 지금 개발 정책은 여러 동식물과 함께 사람을 내쫓는 일”이라고 말했다.

#3. 부처님 마음
실상사 천왕문. 이병찬의 설치 ‘크리처’(creature)가 보인다. 한국 전통사찰에서 도시의 현란한 색을 입은 기이한 생명체와 사천왕상의 만남이다. 사진 이유진

실상사 천왕문. 이병찬의 설치 ‘크리처’(creature)가 보인다. 한국 전통사찰에서 도시의 현란한 색을 입은 기이한 생명체와 사천왕상의 만남이다. 사진 이유진

‘눈 쌓인 지리산을 보면 지금도 피가 끓는다’고 했던 시인 김지하(1941~2022)는 말년에 생명사상에 몰두했고 2001년 여러 뜻있는 사람들과 지리산공부모임을 함께했다. 지리산공부모임은 전쟁·배제·대립의 논리를 극복하고 화해·사랑·자비를 철학사상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2001년 5월26일 범종교계·시민사회단체가 함께 지리산 달궁에서 올린 ‘생명평화 민족화해 지리산 위령제’에서 사람들은 군경, 인민군, 빨치산, 민간인 등 6개의 위패를 태웠다. 굶주렸던 지리산 넋에 대한 위로와 뒤늦은 참회를 담아 쌀뒤주 위에 위패를 올렸다.

이처럼 이념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을 품어 안아 살린 지리산 공동체의 버팀목이 바로 전북 남원시 산내면 실상사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건립한 천년 고찰 실상사는 2000년대 ‘지리산 운동’의 본산이다. 실상사 약사전에 자리한 통일신라 후기 작품인 철조여래좌상 뒤로 이호신 화백이 그린 <지리산 생명평화의 춤>이라는 제목의 후불탱화가 있다. 가로 690㎝, 세로 184㎝에 이르는 이 대형 탱화 속에 실상사와 마을공동체 활동,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과 염원, 지리산권 여러 시군의 역사가 펼쳐진다.

실상사 지리산 운동을 떠받쳐온 수지행. 사진 이유진

실상사 지리산 운동을 떠받쳐온 수지행. 사진 이유진

마을과 함께 주민을 부처님으로

2023년 9월22일부터 10월29일까지 실상사에서는 ‘지리산프로젝트 2023’이 열렸다. ‘정의도 빛나고 평화도 빛나라’라는 주제 아래 조각과 회화 등 총 27개 작품이 전시돼, 실상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미술관처럼 보였다. 10월14일 오후, 실상사를 찾았을 때 수지행은 작품 하나하나 애정을 담아 설명했다. 그는 20년 이상 이어진 지리산 운동의 핵심 일꾼이다. 서울 인드라망생명공동체에서 활동하다가 2002년 산내로 와서 마을공동체를 가꾸는 사단법인 한생명의 초대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수지행은 “지리산 전체가 나의 길”이라고 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이어진 생명평화 탁발순례 5년은 ‘길 위의 스승들’을 만난 시간이었다. 순례단은 처음에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는 깃발을 들고 나섰지만, 순례를 마칠 때는 ‘당신이 길입니다. 당신이 내 목숨입니다’라는 깃발을 하나 더 붙였다. “마을과 함께! 주민을 부처님으로! 이것이 실상사의 숨어 있는 슬로건이지요.” 수지행은 최근 지리산 운동 역사를 담은 책 <지리산의 마음>(삼인 펴냄)의 편집위원장을 맡아 발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1999년 실상사 중심으로 창립한 인드라망생명공동체는 문명전환 운동으로서 산내 주변 수많은 공동체의 씨앗을 뿌렸다. 사단법인 한생명, 중고등과정 대안학교인 실상사작은학교, 실상사농장, 친환경매장 느티나무, 목금토 공방, 숨단지 발효연구소 등이 모두 인드라망 네트워크에 속해 활동한다.

10월15일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든 실상사 법회에서 도법 스님은 차별과 평등에 관해 말했다.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라, 즉 너도 괜찮고 나도 괜찮고 우리 모두에게 괜찮게. 이것이 부처님의 마음씀입니다.”

남원 실상사 약사전 철조여래좌상 뒤로 후불탱화 ‘지리산 생명평화의 춤’이 보인다. 이유진 기자

남원 실상사 약사전 철조여래좌상 뒤로 후불탱화 ‘지리산 생명평화의 춤’이 보인다. 이유진 기자

#4. 비극적 역사의 마음

기업인이자 사회사업가였던 김철호(1922~1995) 선생 또한 지리산을 몹시 아꼈다. 그가 등산을 즐기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지리산에서 한국전쟁 전후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유골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안타까움을 느낀 그는 “뼈의 색깔은 희다”며 분단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공원 조성을 시작했다. 1995년 말기암 판정을 받은 그는 구례군 봉서리 1만2천 평 공원 터와 현금 5억원을 한겨레신문사에 기증했고, 1996년 많은 사람이 뜻을 모아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출범했다.

구례 사람들은 ‘10·19항쟁’이라 한다

구례군 구례읍 봉성산 집단학살터에서 기행 참가자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이유진 기자

구례군 구례읍 봉성산 집단학살터에서 기행 참가자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이유진 기자

2023년 10월13일,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지리산 10·19 생명평화기행’에 참여했다. 여순사건 현장인 지리산 일대를 탐방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기행 일행 20여 명 가운데는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온 참가자도 있었다.

맨 먼저 구례읍 서쪽에 접한 작은 언덕인 봉성산에 올랐다. 섬진강과 구례군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 옆 작은 비탈이 집단 학살터다. 1948년 11월19일 새벽, 군경에 의해 여순사건 연루자로 지목된 민간인 72명이 집단 총살당한 뒤 운반돼 이곳에 매장됐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곳에서 12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지리산 인근에서 사는 ‘구례 10·19연구회’ 신강씨는 “여순사건이라고 하지만 구례에서 민간인 피해가 엄청나서 구례 사람들은 ‘여순사건’이라는 말을 싫어하고 ‘10·19항쟁’이라 한다”고 전했다.

학살터를 바라보던 참가자 이용대(79·광주광역시 북구)씨의 표정이 복잡했다. “전남 보성에서 살던 우리 집안도 피해자 가족”이라고 말했다. 독립운동가가 많았던 그의 집안 어른 중 다수가 여순사건 때 희생됐다고 한다. 작은아버지는 당시 광주 동부서에서 총살당했고, 아버지는 연루자들 소재를 밝히라며 고문당해 10년 넘게 자리보전을 하다가 그가 17살 때 세상을 떴다.

“해방 정국에서 좌우로 갈라졌을 때 남북으로 나뉘는 것을 방지하려 노력한 것뿐인데 공산당으로 몰려 집안 남자 어른들이 거의 돌아가시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어요. 배·보상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매일 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게 한숨만 쉬던 우리 할아버지 한이라도 풀어드리려고 피해자 신청을 했지만 아직 연락이 없어요.”

‘빨갱이’로 낙인찍는 연좌제 때문에 그 또한 오랫동안 취업 문턱을 넘지 못했다. 10·19 여순사건은 ‘국가보안법’ ‘빨치산’ ‘빨갱이’ 등 극단적 반공주의 산물의 출발점이었다.(<‘빨갱이’의 탄생>, 김득중) 2021년 6월29일 국회를 통과한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여순특별법)은 ‘정부 수립 초기 단계에서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이 국가의 ‘제주4·3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규정한다. 기간은 제14연대가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한 1948년 10월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1일까지다. 1949년 11월 전남도는 여순사건 인명 피해를 1만1131명으로 추정했다. 정확한 희생자 규모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명예회복은 걸음마 단계인데다 진상규명 진척은 더디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2001년 5월26일 범종교계·시민사회단체가 함께 지리산 달궁에서 올린 ‘생명평화 민족화해 지리산 위령제’. <한겨레> 자료사진

2001년 5월26일 범종교계·시민사회단체가 함께 지리산 달궁에서 올린 ‘생명평화 민족화해 지리산 위령제’. <한겨레> 자료사진

당시 해양대학에서 항해실습을 나갔다가 여순사건을 겪었던 언론인 리영희(1929~2010)는 여수여자중학교 운동장에 멸치를 뿌려놓은 것처럼 수많은 주검이 땅을 덮고 있었다고 말했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로 시작하는 구례 구전민요 <산동애가>의 주인공 백부전(본명 백순례)은 큰오빠와 둘째 오빠를 잃은 뒤 집안의 대를 이으려고 셋째 오빠 대신 토벌대의 처형장으로 끌려가 죽었다. 하지만 셋째 오빠 또한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만다.

75년 전 제14연대가 주둔한 문수골 간이학교에는 잡풀이 무성했다. 가파른 산비탈 동굴 비트(비밀아지트)에는 사령부가 머물렀다는데, 성인 남성이 드나들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입구가 작았다. 가을인데도 새까만 산모기가 득시글했고 밀림이다시피 숲이 우거졌다.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는 “역사는 기억과 기록이고 ‘여순’은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속에서 차근차근 진행 중인 것”이라고 말했다.

골골마다 통곡과 죽음의 핏방울이 얼룩졌을 지리산의 옛 마음은 짐작하기 어려웠다. 오늘날 소멸 위기에 저항하면서 파괴도 멈출 방법을 지리산은 알고 있을까. 과거를 해원하면서 희망의 등불을 밝히는 길을 찾을 수 있기나 한 걸까. 도법 스님의 말처럼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는 길”은 어디에 있나.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지리산을 찾아가고 있는가.

지리산 성삼재에서 본 풍경.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지리산 성삼재에서 본 풍경.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남원·구례·곡성=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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