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약속 장소가 서울 경복궁역 근방이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을 십여 분 앞두고 상대에게 연락이 왔다. 버스가 우회한다네요. 목적지가 코앞인데 다른 길로 가게 생겼다고 했다. 국군의 날 행사를 이유로 도로를 통제한 것이다. 부끄럽지만 요즘 세상 소식을 모르고 산 터라 국군의 날 행사가 무얼 말하는지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오늘 국군의 날 아닌데…. 9월26일이었다.
행사의 정체를 깨달은 것은 12차선 도로에 등장한 탱크와 장갑차를 본 뒤. 국군의 날 시가행진이 10년 만에 부활했단다. 그날 몇몇 메신저 단체방은 홍역을 치렀다. 도심에 탱크라니, 무섭다. 군대를 무서워하면 나라는 누가 지키냐. 군사주의 아닌가. 원래 하던 행사다. 외국에서도 한다. 의견이 갈려 다툼하는 와중에 ‘나도 탱크 보고 싶었는데’ 소리 하는 사람까지. 혼잡했다. 전쟁에 대비해 군비를 늘리고, 저 나라가 늘리니 우리도 늘리고, 이런 전개가 전쟁을 더 심화하는 건지 국방 안보를 지키는 건지, 입장이 분분히 갈렸다.
우선 사실을 정정하면, 원래 하던 행사다? 군부독재가 문을 닫으며 국군의 날 시가행진은 그 횟수와 규모를 줄여왔다. 외국도 다 한다? 2018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열병식을 워싱턴에서 개최하려다 “나폴레옹이 되고 싶은 거냐”는 비아냥까지 받았다. 공화당, 민주당 가릴 것 없이 반대를 표했다.
그리고 탱크가 보고 싶다는 사람. 덕분에 군 무기를 매일같이 보던 이들이 떠올랐다. 군사시설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 경기도 화성시 매향리가 대표적이겠다. 작은 바닷가 마을에선 고개만 들면 전투기를 볼 수 있었다. 54년간이나. 오폭과 불발탄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2005년이 돼서야 폭격 훈련장은 폐쇄됐다. 해결된 것 아니냐고?
충남 보령 갓배마을 주민들은 난청과 이명, 정신적 피해를 호소한다. 인근 대천사격장에서 1년에 150일가량 미사일 사격 훈련이 있다. 1962년부터 지금까지 포탄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소음은 그나마 가벼운 문제일지도. 녹슨 포탄과 탄피가 바다와 지하수를 중금속으로 오염시킨다. 37가구 중 28명이 암으로 사망했다는 갓배마을은 2008년 대책위를 만들어 싸워온 이래 ‘암 마을’로 통한다.
국내 50여 개의 군용비행장과 1천여 개의 군 사격장이 있으니 어디든 난청과 이명이 있다. 다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대천사격장은 7~8월에는 사격 훈련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인근 대천해수욕장에 피서객이 몰리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관광객 타지인은 결코 들을 수 없는 폭격 소리가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최근 정부에서 소음피해 보상금을 지급한다지만, 망가진 삶 앞에 제시하기에는 미미한 액수(월 3만~6만원)인데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포격 소리가 사라지는 일이다.
도심 한복판에 나타난 군 장비가 평소에 캡슐이나 장식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박격포·탱크·전투기가 보고 싶다면 군사시설 부지로 가면 된다. 가는 길이 좀 멀 텐데, 대부분 도시에서 꽤 떨어진 농어촌에 자리했다. 취약한 곳에 위력이 있다.
‘힘에 의한 평화’라 하던데, 그 전에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 힘이 일상을 전쟁터로 만드는 곳에 대해. 군 부지에 있던 무기를 멀리서부터 대동해 도심 한복판에 전시까지 했으면 군사시설 옆에 숨겨놓은 피해와 희생도 같이 가져와 말해야지. 전쟁은 못 막더라도 양심은 지켜야지. 어쨌거나 덕분이다. 내 일상에서 장갑차를 보고 그 장갑차 진동에 삶이 흔들렸을 이들이 떠올랐으니.
희정 기록노동자
*‘노 땡큐!’ 필자로 <노동자, 쓰러지다> <일할 자격> <베테랑의 몸> 등 노동자 이야기를 써온 기록노동자 희정씨가 합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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