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티이미지뱅크
고3 겨울방학 때 친구들은 작가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여자애들 남자애들 한자리에 모여서 ‘올 나이트’를 한다고 하자, 엄마는 폭풍 같은 잔소리를 쏟아냈다. 아빠는 딸내미 편을 들었다. “머시매들은 밤새 놀아도 되고 가시내들은 밤새 놀면 안 된당가? 고거이 남녀평등이여? 자네는 진정한 사회주의자가 아니그마!” 남녀평등을 원해서 사회주의자가 된 엄마는 입을 닫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친구들이 모이자, 아빠는 집에서 담근 매실주를 단지째 내주고 집을 비워줬다. 새까만 밤, 새하얀 눈이 수직으로 낙하했다.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었다. 작가의 첫 술이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쓴 정지아 작가의 음주 예찬 에세이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마디북 펴냄)는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날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매실주로 시작한 작가의 음주 경험은 캪틴큐, 패스포트, 시바스 리갈, 조니워커(특히 블루), 로얄살루트, 맥캘란 등을 거치며 서서히 무르익어간다. 20대 시절 수배를 피해 도피생활을 했던 작가는 지리산 산장으로 숨어들었다. 남몰래 갖고 간 위스키 패스포트의 뚜껑을 살며시 따자 술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슬금슬금 모여들어 코펠을 들이밀었다. 산꾼들의 ‘정체’를 알고 보니 다들 한가락씩 하던 노동운동가들. 패스포트 두 병은 순식간에 바닥났고 작가는 3박4일 산행 동안 일용할 양식을 하룻밤에 다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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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인생 최고가 술은 싱글몰트계 롤스로이스라 부르는 맥캘란 1926이었다. 어쩌다 ‘회장님’을 만나 지구에 얼마 남지 않은 사회주의권 국가에서 셰리 참나무통에서 60년간 숙성했다는, 세계에서 40병만 출시된 술을 마셨다. 한때 평등을 주창했을 부자 공산당 간부가 내놓은 최고급 술을 입에 머금은 채 작가는 실패한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를 떠올렸다. “참으로 다행 아닌가? 성공할 기회가 없어 타락할 기회도 없었다는 것은!” 이 술의 어마어마한 가격은 책에서 확인하시라. 야쿠자든 재벌 회장이든 그 앞에서 꿀리지 않고 대작하는 작가의 호기와 오기와 배포도.
음식 산문집을 표방하지만 사실은 안주 예찬 에세이인 권여선 작가의 <오늘 뭐 먹지?>와 함께 읽는다면 제격일 것이다. 최고의 이야기꾼, 최고의 술꾼인 두 사람이 만나 술 마시고 안줏거리 삼을 이야기도 궁금해진다. 정지아 작가와 동시대적 경험을 해온 애주가 애독자라면 이번 음주 에세이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 밤낮으로 계속되지 않는가!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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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불완전한
일라이 클레어 지음, 하은빈 옮김, 동아시아 펴냄, 1만8천원
<망명과 자긍심>으로 한국에도 많은 팬을 확보한 일라이 클레어의 신간. 장애, 퀴어, 트랜스젠더, 노동계급 정체성을 바탕으로 ‘정상성’만을 위한 치유 이데올로기 너머 다양하고 자유로운 존재 가능성을 힘줘 말한다. 장애 선별적 임신중지, 미백크림 등의 기술은 인종차별적 메시지를 강화한다. 고통·치유·건강·회복의 전복적 프레임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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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최태현 지음, 창비 펴냄, 2만3천원
서울대 행정학과 최태현 교수가 절망 속에서도 공동체를 지키는 민주주의의 마음을 다뤘다. 절망의 뿌리에는 민주주의의 주체와 제도를 둘러싼 역설이 있다. 의회와 정부 대표가 국민을 대표하는지, 정부가 민주적으로 일하는지, 민주적 리더는 누구인지, 우리는 철인왕을 원하는 건 아닌지 되물으며 민주주의는 단지 제도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데이비드 무어 지음, 정지인 옮김, 아몬드 펴냄, 2만9천원
발달·생물심리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심리학과 교수로 일하는 데이비드 무어가 생물학 분야의 가장 뜨거운 주제인 후성유전학의 연구와 통찰을 담았다. 후성유전학은 경험이 몸과 마음에 새겨진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예컨대 후성유전은 디엔에이(DNA) 염기서열을 바꾸지 않고 켜거나 끄면서 생각, 감정, 행동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 시대의 마녀
임옥희 등 지음, 여이연 펴냄, 1만5천원
온·오프라인에서 벌어지는 ‘마녀사냥’을 바라보며 과거 ‘마녀 박해’와 연결한 글을 모았다. 임옥희는 그리스 비극 속 카산드라와 클라이템네스트라부터 21세기 메갈리안까지 ‘마녀 되기’ 계보를 살피고, 김미연은 현대 의학 담론이 우생학에 기대 여성을 질병화하는 과정을 탐색한다. 손자희는 21세기 혼종적 주체의 이론화를 경유해 마녀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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