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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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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 살인마의 항변 “칼에 찔린 피해자가 미안하다고 했다”

‘충분히 살릴 수 있던’ 피해자, 책임 피하려는 수사기관·법원 성찰 필요
등록 2023-07-21 23:11 수정 2023-07-23 22:46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한 지하 주차장에서 교제폭력을 신고한 피해자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김아무개가 2023년 5월8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한 지하 주차장에서 교제폭력을 신고한 피해자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김아무개가 2023년 5월8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피해자가 난동을 부려 이를 막으려 했을 뿐이다. 피해자와 대화하고 관계 회복을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칼에 찔린 피해자가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2023년 7월11일 서울남부지방법원 406호 법정. 수차례 교제폭력을 저지르다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하자 신고 당일 조사받고 이동하려던 피해자를 살해한 김아무개의 항변이다. 사망한 피해자는 물론 피해자의 가족조차 질환 등으로 참석 못한 법정에 가해자의 변명만 떠돌고 있었다. ‘피해자 의사’를 앞세우며 피해자를 탓하던 수사기관의 무책임함이 떠올라 더 마음이 무거웠다. 수사기관만 제대로 대처했어도 충분히 살릴 수 있던 피해자였다.

‘모범’ 사례와 비교하니 더 기막힌

10여 년 전 경기도 안양의 시내버스 안에서 강제추행을 목격했다. 음주 상태인 피해자 뒤에 붙은 남성을 봤다. 그 남성의 신체접촉을 거부하는 듯한 피해자의 행동을 보고 피해자에게 ‘아는 사이냐’고 물었다. 피해자는 아니라고 답했고, 나는 112에 신고했다. 버스기사의 도움을 받아 도주하려던 가해자의 퇴로를 막은 뒤 경찰이 올 때까지 그를 붙잡고 있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사건이 인상적인 것은 경찰 대응이 모범적이어서다. 경찰은 간단한 사건 경위만 듣고 바로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해 별도 차량에 태워 경찰서로 이동했다. 피해자와 목격자인 내가 가해자와 마주칠 일을 막으려 다른 공간으로 안내했고, 동성 수사관에게 조사받기를 원하던 피해자의 요구대로 여성 경찰을 호출했다. 조사 과정에서 가해자 진술을 간단히 들은 뒤에도 피해자나 내가 볼 수 없는 공간에 가해자를 두고 피해자와 목격자 조사를 했다. 보호자가 피해자를 안전하게 데려가도록 했고, 대중교통이 끊긴 상태에서 나도 경찰차로 데려다줬다. 가해자에게 피해자나 목격자인 내 정보가 전달될 일은 없으며, 두 사람의 안전이 확인된 뒤에야 가해자를 내보낼 것이라며 안심시켰다.

그래서 2023년 5월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서 발생한 스토킹 살인의 경찰 대응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조사 순서부터 엉망이었다. 연인, 가족 등 친밀한 사이에서 발생한 폭행사건의 경우 피해자를 먼저 조사하고 안전 귀가를 확인한 뒤 가해자 조사를 한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동선 등 정보를 파악하기 쉽기에, 신고·고소 뒤 피해자에게 악감정을 품는 가해자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경찰은 결별 통보 뒤 피해자를 스토킹하고 기물을 파손했으며 주거지에 무단침입한데다 폭행까지 한 교제폭력범을 먼저 조사하고 구두 경고 뒤 귀가 조처한 다음 피해자 조사를 했다. 그렇게 풀려난 가해자는 피해자가 조사받는 사이 피해자 주거지에 침입해 흉기를 챙겨 나왔고 조사를 마친 뒤 자기 차량으로 이동하던 피해자를 살해했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전주환, 무기징역 받았으나

책임 회피에만 급급한 수사기관의 태도는 더 실망스러웠다. 전주환의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이후 재정비한 ‘위험성평가 체크리스트’에서 가해자 김아무개의 범죄 위험성이 ‘낮음’으로 나왔고, 피해자가 교제폭력에 처벌불원 의사를 밝힌데다, 귀가 동행도 병원행 등을 이유로 거절했다는 사실을 나열하며 책임을 피하려는 수사기관에 전문성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계량화된 위험지표 확인이 목적인 위험성평가 체크리스트는 심리·정서적 요인이 강하게 작용하는 사건에선 참고자료 정도의 가치만 있을 뿐이다. 친밀한 사이에서 일어난 폭력사건의 경우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양가감정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피해자는 폭력의 심각성에 대한 인지가 늦거나 그 상황 자체를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가정폭력, 교제폭력, 스토킹 등에서 피해자의 처벌불원을 없애고, 수사기관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피해자가 정당하게 형사고소로 대응하자 전씨는 연달아 더 중대한 범죄들로 나아갔다. 이 같은 보복범죄는 형사사법 질서를 무시하는 행위로 비난 가능성이 매우 크고 더욱 엄중한 처벌이 요구된다.”

서울남부지법에서 시흥동 살인사건의 첫 재판을 방청한 뒤 서울고법으로 이동했다. 전주환의 스토킹 살인 항소심 선고가 예정됐기 때문이다. 불법촬영 등 혐의로 징역 9년, 스토킹 살인 등으로 징역 40년을 각각 선고받았던 전주환에 대해 재판부는 무기징역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유사 사건과 비교하면 엄벌이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사법질서’를 내세운 법원의 자기반성 결여는 여전히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법질서와 법원의 권위가 무너진 게 전주환 개인의 범죄 행각 때문만이겠는가. 전주환이 자유롭게 활보하며 피해자를 살해하도록 방치한 법원이 뒤늦게 무기징역을 선고한들 피해자가 살아 있는 것에 비할 바 있겠는가. 이 사건은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를 살릴 기회가 여러 번 있었고, 최종적으로 법원이 그 기회를 날려 피해자가 사망했다.(제1433호 ‘이 사회와 정부는 피해자 보호할 의지가 있나’ 참조) 피해자는 살아서 피고인 전주환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지켜볼 수도 있었다.

“그저 내 삶을 되찾고 싶다”던 피해자를 추모하며

방청석에 있던 유족들의 억눌린 울음이 여전히 귓가에 남는다. 부디 그들이 일상을 회복하고 평온하게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와 별개로 이 사회는 그들의 고통과 눈물을 잊지 말아야 하며, 피해자의 소원을 대신 이룰 책무가 있다. 피해자는 전주환에 대한 엄벌을 탄원하면서도 “그저 제 삶을 되찾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지금도 숨죽이며 어딘가에서 고통받을 여성들도, 용기를 낸 여성들도 여전히 저처럼 그때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겠죠. 하지만 어떻게든 저도 회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라며 피해 회복과 연대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무기징역에 불복한 전주환에 대한 대법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는 서울남부지법에 갈 것이다. 대신해 항변할 이들조차 없던 피해자를 위해서. 기억과 행동은 사회의 책무며, 기록자이자 목격자로서 나도 그 의무에 힘을 더할 것이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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