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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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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와 정부는 피해자 보호할 의지가 있나

‘도주 및 증거인멸 위험 없다’며 구속 면한 신당역 사건의 전주환
시스템 믿었던 피해자는 활보한 가해자에게 목숨을 잃었다
등록 2022-10-07 18:07 수정 2022-10-08 00:20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에서 스토킹하던 20대 여성 역무원을 살해한 피의자 전주환이 2022년 9월21일 남대문경찰서에서 검찰로 이송되고 있다. 왼쪽은 피의자의 강력 처벌을 촉구하는 진보당 당원들. 공동취재사진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에서 스토킹하던 20대 여성 역무원을 살해한 피의자 전주환이 2022년 9월21일 남대문경찰서에서 검찰로 이송되고 있다. 왼쪽은 피의자의 강력 처벌을 촉구하는 진보당 당원들. 공동취재사진

“존경하는 재판장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선고 기일을 최대한 뒤로 미뤄줄 수 있습니까. 지금 중앙지검에 사건(스토킹 살인 사건) 하나 걸려 있어서 이번 사건과 병합할 의향이 있습니다. 국민들의 시선과 언론 보도가 집중돼 시간이 조금 지나가면 누그러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2022년 9월29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진행된 서울지하철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의 피의자 전주환의 ‘불법촬영 및 스토킹 등 사건’의 1심 선고 공판 중 전씨가 한 발언이다. 방청석에서 그 발언을 직접 들으며 피해자의 사망은 사법기관과 시스템의 방치로 인한 것임을 재차 확인했다. 앞서 수사와 재판을 진행하면서 정말 수사기관과 법원은 전주환이 추가 범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걸 예상하지 못했을까?

구속된 스토킹 범죄자는 3.6%에 불과

전주환은 주거가 일정하고 도주 및 증거인멸의 위험이 없다며 인신구속을 면했다. 피해자가 살해되고 나서야 한국 사회는 인신구속제도 전반을 호들갑스럽게 재검토하는 중이다. 그러나 기존 시스템 안에서도 피해자의 생명을 지킬 최소 네 번의 기회가 있었다. 피해자의 1차 고소(2021년 10월), 2차 고소(2022년 1월) 뒤 경찰 수사 단계, 검찰 송치 뒤 기소처분 단계, 재판 단계가 바로 그것이다.

형사사법 절차에서 전주환 같은 피의자 또는 피고인의 신체 자유를 빼앗는 강제처분인 인신구속은 크게 ‘체포’와 ‘구속’으로 나뉜다. 구속의 전 단계인 체포는 수사 초기 피의자를 단기간 구금하는 것이다. 구속은 수사와 재판 단계에서 피의자, 피고인을 비교적 장기간 구금하는 것이다. 수사 단계에서 범죄 혐의가 어느 정도 소명되고 사안이 중대하다고 판단할 경우, 경찰은 검찰에 구속영장청구를 신청한다. 검찰은 이를 반려하거나 법원에 영장을 청구할 수 있다. 법원은 구속 전 피의자심문 절차를 거쳐 영장을 발부 혹은 기각할 수 있다. 인신구속은 신체의 자유를 빼앗는 처분이기에 경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하더라도 검찰이 영장 청구 전 피의자를 면담하는 제도가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신설됐다.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면 구속 전 피의자심문 절차(영장실질심사)가 있고, 구속영장이 발부됐더라도 다시 한번 판단해달라는 취지로 신청하는 구속적부심제도가 마련돼 있다.

재판 단계에서도 피해자의 위해 위험성 등을 바탕으로 재판부 직권으로 피고인을 구속할 수 있다. 전주환의 ‘불법촬영 및 스토킹’ 사건의 결심공판에서 검찰이 징역 9년을 구형할 정도로 심각한 범죄였음을 재판부가 더 세밀히 살폈다면, 공판 중이라도 전주환을 구속할 수 있었다. 2020년 제주대에서 일어난 교수의 학생 대상 성폭력 사건 1심에서 재판부는 피고인이 혐의를 인정하고 피해자와 합의 뒤 피해자의 처벌불원서가 제출됐음에도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법정 구속을 했다. 이후 재판부는 피해자를 증인으로 채택해 합의 과정과 처벌불원서 제출에 대한 피해자의 의견(상황에 몰려 합의한 것이라는 진술)을 청취한 뒤 실형을 선고했다.

한국의 형사사법 절차에서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내세우기 때문에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가 구속되는 사례는 많지 않다. 경찰청 스토킹 범죄 자료에 따르면 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된 2021년 10월부터 2022년 8월까지 경찰에 검거된 스토킹 범죄자는 7152명으로, 그중 경찰이 구속영장청구를 신청한 건수는 377건(5.27%)에 불과하다. 그나마 영장 발부까지 이어진 것은 전체 범죄 건수의 3.55%가량이다.

문제는 수사기관과 법원이 피의자의 자유권·방어권 침해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울 때 피해자는 가장 중요한 생명권을 침해당한다는 것이다. 2022년 2월에는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던 교제폭력 피해자가 검찰의 영장청구신청 반려 뒤 살해당했고, 김병찬·이석준 등 스토킹 가해자는 인신구속이 안 된 자유로운 상태에서 피해자를 지속적으로 스토킹하다 결국 피해자와 그 가족을 살해했다. 피의자의 자유를 위해 피해자의 자유를 억압하고 나아가 생명권까지 침해당하는 이 상황이 과연 합당한가?

목숨 잃은 피해자는 구속에 간여 못해

이는 근본적으로 형사사법 절차에서 당사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피해자의 위치와 관련 있다. 국가의 형벌권 행사와 피의자·피고인의 인권 보호, 두 요소만을 형사사법시스템의 근간으로 보는 전통적 관점을 여전히 고수하기 때문에 피해자는 당사자로 인정받지 못해 결국 목숨까지 잃고 있다.

구속 요건을 다룬 형법 제70조에서 ‘범죄의 중대성, 재범의 위험성, 피해자 및 중요 참고인 등에 대한 위해 우려’는 고려사항에 불과하기 때문에, 영장 발부시 판사들은 △주거가 일정하고 △도주 위험과 △증거인멸의 위험이 없다는 세 요건만을 토대로 판단해왔다. 거기에 직업, 재산, 가족구성원 등에 대한 판사들의 편견도 결합한다.

물론 제도적으로 구속영장 발부와 관련해 피해자의 절차 참여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구속 전 피의자심문 절차를 방청하거나 변호사를 통해 의견을 진술할 수 있고, 영장실질심사시 재판부 직권으로 피해자를 심문할 수도 있다. 문제는 절차에 대한 안내와 통보가 제대로 되지 않고, 가해자의 추가 가해 위험성 때문에 활용도가 매우 낮은 형편이다. 전주환 사건의 피해자만 하더라도 구속 전 피의자심문 절차의 진행 상황을 전혀 통보받지 못했고, 김병찬 스토킹 살인 사건 이후 경찰이 마련한 위험경보판단회의제도도 활용하지 못했다.

‘절대 보복 못하도록 처벌해달라’ 했지만

수사기관과 법원은 인신구속과 관련된 보완책을 여럿 내놓았다. 대법원은 ‘조건부석방제도’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활용 방법을 구체적으로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조건부석방제도’는 구속 기소된 피고인이 활용할 수 있는 ‘조건부보석제도’와 비슷한 형태로, 수사 단계에서 구속 전 피의자심문 절차를 거치는 피의자를 대상으로 구속영장을 기각하는 대신 보증금 납부나 주거 제한, 3자 출석보증서, 위치추적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 피해자 접근 금지 등 조건을 붙여 피의자를 석방하는 제도다. 가해자의 활동 반경을 제한하고 피해자에 대한 접근을 막아, 피의자의 자유권 침해를 최소화하면서도 피해자를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형법 제70조의 구속 요건 중 하나로 ‘재범 위험성’ ‘피해자에 대한 위해 우려’ 등을 독자적인 요건으로 넣자는 입법적 보완 움직임도 있다.

‘피고인이 저에게 절대 보복하지 못하도록 엄중한 처벌을 해달라.’ 전주환에게 살해당하기 전 피해자가 재판부에 전달한 의견의 일부다. 그러나 시스템을 믿고 기다렸던 피해자는 신체의 자유를 등에 업고 활보한 가해자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권을 박탈당했다. 이 와중에 피해자 보호와 관련해 중추적 구실을 해왔고 해야 할 여성가족부의 폐지안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또다시 나왔다. 이 사회는, 이 정부는, 피해자를 보호할 의지가 있는가.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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