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1117 이현화 대표는 2023년 6월 초 트위터에 신간 소개를 올렸다. “백 년 전 경성의 백화점 1층부터 5층에서 팔던 물건을 통해 시대를 바라보는 책. 이런 책은 이전에도 없었고, 10년 안에 다시 나오지 않을 거라는 데 500원 건다.” 이 짧은 글은 하루 만에 1만7천 건의 조회수를 올렸다. 책도 출간과 동시에 빠른 속도로 팔리고 있다.
<경성 백화점 상품 박물지>(혜화1117 펴냄) 저자는 미술사학자이자 한국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실내 건축 재현 전문가 최지혜(50) 박사다. 그는 한국에서 독일어를 전공하고 영국 런던 소더비인스티튜트에서 순수·장식 미술을 공부했다. 백 년 전 경성에 살던 서양인의 집 ‘딜쿠샤’, 유럽풍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대한제국 당시 공관 중 유일하게 원형을 보존한 미국 워싱턴시(D.C.)의 주미대한제국공사관 등의 실내 재현과 복원을 맡았다.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으로서 공공 문화재 복원을 할 때는 물론이고, ‘앤티크 덕후’인 서양 근대 유물 컬렉터들도 감정이나 보존 등에서 곤란을 겪으면 최 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국민대 겸임교수로 학생도 가르친다.
2005년 서양 고가구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담은 <앤틱 가구 이야기>에서 저자는 일찌감치 서양 가구와 미술사, 미시사에 대한 식견을 선보였다. 2013년 <영국 장식미술 기행>으로 전문성을 발휘한 뒤, 2021년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에서 근대 건축의 이정표가 된 ‘딜쿠샤’ 복원과 살림살이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냈다. 딜쿠샤는 미국인 사업가이자 3·1운동과 독립선언문, 일제의 제암리 학살 사건을 외국에 알린 통신원 앨버트 테일러와 그의 배우자인 영국 출신 메리 테일러가 살았던 집이다. 백 년 전 서양과 동양의 문화를 함께 품었던 이 집은 최 박사의 손을 거쳐 중요한 한국 근대 문화의 일부로 되살아났다.
이번에 내놓은 <경성 백화점…>의 부제는 ‘백 년 전 ‘데파-트’ 각 층별 물품 내력과 근대의 풍경’. 무려 656쪽에 가득 담긴 전무후무한 1920~1930년대 근대 백화점 속 물건 이야기다. 1층 식품부·생활잡화부, 2층 화장품부·양품잡화부, 3층 양복부, 4층 귀금속부·완구부·주방용품부·문방구부 그리고 5층 가구부·전기기구부·사진부·악기부를 가득 채운 품목 130여 개가 책 속에서 재현된다.
6월12일 오후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 앞에서 저자를 만났다. 신세계백화점 본점은 1930년 10월24일 개업한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점 건물을 지금까지 그대로 쓰고 있어 근대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롯데백화점영플라자 명동점은 1939년 신축해 문을 연 조지야백화점이 있던 곳이다.
―이 방대한 책을 쓴 동기가 궁금하다.
“2018년부터 2년 동안 ‘딜쿠샤’에 놓여 있던 물건 하나하나를 추적하면서 많은 흥미를 느꼈다. 백년 전 우리나라에 살던 이들이 이런 물건을 썼구나 하면서. 더군다나 미학적으로 아름답고 예쁜 것들. 원래 예쁜 것을 엄청 좋아한다. 그런데 <딜쿠샤…>를 마무리할 즈음 출판사 대표님이 1920년대 백화점에서 팔았던 물건에 대해 써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그때 한마디로 혹해서 ‘어! 재밌겠는데’ 생각했고 덥석 해보겠다 덤벼들었다.”
―책도 방대했는데, 자료는 얼마나 방대했을지 짐작된다.
“당시 신문·잡지의 기사와 광고 이미지 등 지금 책에 사진 700장이 실려 있지만 원래는 5배 정도 더 많은 사진을 실었다. 자료 조사하면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몇 번이고 못한다고 얘기할까 고민했다. 분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참조를 많이 한 <경성일보>나 관련 자료가 대부분 옛날 일본어로 돼 있어서 정확성을 기하는 데 고심했다.”
―1920년대 백화점이라는 공간은 어땠을까.
“당시 백화점은 스펙터클하고 충격적인 문화의 공간이었다. 여태 보지도 듣지도 못한 물건들이 한자리에 있으니까 위압감이 느껴지고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백화점은 선망의 대상, 문명의 최첨단, 유행의 진원지다. 요즘도 울화가 치밀 정도로 비싼 물건이 진열된 곳이 백화점인데, 그때도 그런 물건이 너무나 많았다.”
―백화점 공간에 대한 연구는 꽤 있었지만 그곳의 물건에 대한 책은 처음이다.
“그동안 모던보이, 모던걸 등 담론 위주로 연구돼왔다. 담론이 액자라면 그 안에서 세세하게 그려진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닌가. 그런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구실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경성 백화점…>의 미덕은 근대 생활용품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대적 소비를 촉진한 물건들은 서양에서 출발해 일본을 경유해 한반도에 도착했다. 최 박사는 서양 장식미술사를 공부한 전공을 살려 유럽에서 탄생한 물건들의 ‘원형’을 찾아 한 발 더 들어간다. 1960~1970년대 한국인의 집안을 장식했던 ‘불란서 인형’처럼 추억 속에 남은 물건들의 미시사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130여 품목 중 독자에게 특히 소개하고 싶은 물건은.
“냉장기다. 전기냉장고가 나오기 전 얼음을 채워 음식을 차갑게 유지하던 것이다. 모든 물건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얼음을 채워넣어 음식을 보관하던 시절이 있었고, 이런 중간 단계를 거쳐 냉장고가 탄생하는 기술이 개발됐다는 게 재미있다.”
―애정을 갖고 소장하는 근대 물품이 있을까.
“백화점과 관련해 근대 물품으로 소장한 것 중에는 미나카이 부산점 신관 낙성 기념 도자기 재떨이가 있는데, 미나카이 건물 모형 청자로, 당시 일본인이 선호했던 미감이 집약된 상품이다. 바닥에는 ‘결사십오주년 부산 신축낙성기념’이라고 새겨져 있다. 요즘으로 말하면 창립 15주년 기념품인 셈이다.”
―1920~1930년대 상품에서 원산지별로 위계가 나타난 점도 재미있었다.
“소비자에게 ‘국산’이라 일컬어진 일본산과 구미 제품은 각각 위계와 선호도가 뚜렷했다. 프랑스제 화장분 ‘코티’와 일본제 ‘캅피’는 구매자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기표였다. 식민지 정부와 일본 기업이 제아무리 ‘국산품 애용’을 외쳐도 프랑스제 코티를 쓰는 사람은 애국 국민으로 단일화하지 않은 개별 소비자였다.”
―백화점이 ‘사치녀’ ‘허영녀’의 장소라는 비난도 지금과 비슷해 보인다.
“당시 비판이 집중된 건 여우 목도리였다. 1920년대 후반 크게 유행했는데, 이를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중일전쟁 직후인 1938년 여우 목도리는 사치품으로 지정됐다. 중일전쟁이 본격화하면서 어린 학생들의 목도리 착용도 금지했다. 신체 단련, 소비절약이라는 미명 아래 행해진 일이다.”
최 박사는 대학 때 음악잡지사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올드 악기’에 관심 갖게 됐다. 그의 관심사를 눈여겨본 사장이 영국의 소더비인스티튜트를 소개했다. 런던 현지 직원으로 일하면 학비를 제공해준다고 제안했다. 수준 높은 영어를 구사해야 하는 학교였고 학비도 비쌌지만 철석같이 믿고 1994년 이민가방 하나만 든 채 무작정 떠났다. 그러나 회사는 곧 폐업했고 최 박사는 일체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 몇 년 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져 환율이 세 배로 뛰었다. 귀국을 망설이던 갈림길에서 장학금 제도를 알게 됐다. 면접과 에세이 등에서 일정 점수 이상 받아야 했는데 다행히 전액장학생으로 뽑혔다. 열정과 진심이 이룬 결과였다. 생활비는 한인 유학생 하숙을 경영하면서 충당했다.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면서 세 들어 살던 집의 한국 학생이 속속 귀국하자 집주인 할머니가 하숙집 운영을 대신 해달라고 제안했다.
― 우아하게 공부만 한 줄 알았는데, 사업가 기질이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약간 무모한 데가 있는가보다.”(웃음)
― 장식미술에는 언제부터 관심이 있었나.
“어릴 때 할머니가 아기자기한 것 모으기를 좋아했다. 손재주가 좋아 노리개 만드는 것도 좋아하고, 그렇게 예쁜 것을 모아두는 게 어린 마음에도 좋아 보였고 모으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독일어를 전공했지만 남들이 안 하는 것을 하고 싶었다.”
― 연구소 ‘수택’의 대표이기도 한데, 수택은 무슨 뜻인가.
“우리말로 ‘손때’를 의미한다. 영어로는 파티나·파티네이션(Patina·Patination)이다. 물건은 사람의 손때나 세월의 흔적, 자국 같은 것이 더해지면서 빛을 발하게 된다. 앤티크의 본질을 잘 설명해주는 것 같아서 선택한 단어다.”
― 앤티크의 매력이 있다면.
“시간, 세월이다. 새것과 달리 세월만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게 수택이다. 앤티크이건 빈티지 와인이건 세월이 지나야 멋과 맛이 나오는데 그게 매력 같다.”
―일할 때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언제인가.
“흑백사진이 이메일로 도착했을 때 내 일이 시작된다. 그 흑백사진이 실제로 구현됐을 때가 가장 재밌다. 가장 큰 문제는 색깔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난감하지만 할 수 있는 방법은 관련한 모든 사료를 뒤져서 색깔이 언급된 것을 찾는 수밖에 없다. 워싱턴 디시(D.C.)에 있는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실내 재현·복원할 때도 미국 신문 아카이브를 검색해서 일일이 기사를 읽어보고 단서를 찾았다. 예컨대 ‘비비드 그린’이라고 할 때 ‘비비드’란 말이 생동감인데 매우 주관적인 표현이다. 그런 것을 조율하는 게 어렵다.”
― 생활사, 미시사의 중요성을 말한다면.
“물건 하나하나에 장식미술, 생활사, 미술사가 있다. 사람들의 삶과 가까운 역사를 알려면 생활사, 미시사를 봐야 한다. 영웅의 역사나 전쟁, 큰 역사적 사건이 중요하지만 그 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생활사, 미시사가 더 흥미롭다. 사람들의 생활사 이야기는 시시콜콜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결코 자잘하지 않다.”
― 이 분야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 조언한다면.
“역사와 미술사를 기본 바탕으로 해서 앤티크에 관심이 있다면 가구, 도자기 등 한 분야를 깊이 있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 요즘은 워낙 공개된 자료가 많아 온라인으로도 얼마든지 자료를 조사할 수 있다. 인내심과 집요함이 있는 ‘덕후’라면 누구나 그 분야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영어나 일본어, 중국어 등 언어를 익히는 것도 중요하다.”
―앞으로의 계획은?
“학생들에게 이 분야의 중요성을 알리고 아름다움을 전파하고 싶다. 우리나라엔 아직 장식미술, 실내 재현을 전공하는 과가 없다. 기회가 되면 장식미술사를 제대로 배우는 커리큘럼이 있으면 좋을 거 같다. 장식미술이 미술사에 편입되지 않은 부분이 아쉽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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