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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유언장을 읽는 사람의 독백…이은용의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경계의 문 앞에서 들려오는 이은용의 농담 혹은 진담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등록 2023-05-05 03:49 수정 2023-05-09 15:27

“나는 여기 있다. 하지만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아, 내가 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책 앞머리 글)

극작가 이은용(1992~2021)의 처음이자 마지막 희곡집.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제철소 펴냄)는 이 작가가 남긴 희곡 5편을 묶었다. 6개 이야기로 이뤄진 장막희곡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는 그의 대표작으로, 2020년 초연됐고 같은 해 동아연극상과 이듬해 백상예술대상 ‘백상연극상’을 받았다.

남성과 여성, 죽음과 삶이라는 이분법적 경계 앞에 등장인물들은 거듭 닫힌 문을 두드린다. 예술가이자 트랜스젠더 남성인 진희는 천국의 경계에서조차 여자인지 남자인지 심문받는다. 성실히 답하던 진희는 결국 짜증을 내고 만다. “그나저나 천국에서도 이런 짓을 정말 합니까?”(‘우리는 농담이(아니)야’ 중 「월경」)

농담이(아니)라고 한 작가의 말은 곧 진담이(아니)라는 말이다. 트랜스젠더가 받아야 하는 호르몬 ‘치료’나 수술은 머나먼 의료화 과정이다. 정신과에서 “진정한 트랜스젠더”임을 인정받으면 “성전환증 진단서류”가 나오고, 그것이 있어야 호르몬주사를 맞을 수 있다. 성형수술로 분류된 가슴수술을 할 때는 10% 부가세까지 내야 한다. 우울증 치료제의 가장 큰 부작용이 ‘자살충동’이라는 것도 이 세상의 농담 같은 진담이다.

16살 시스젠더(지정성별) 소년으로 살아갈 기회를 얻은 28살의 트랜스젠더 남성. 그 길을 “선택”하고 궁금해 마지않던 소년의 시간을 살아간다. 살아보니 결국 “성별의 벽이라는 건, 어쩌면 (…) 견고하지 않은” 것이라고 깨닫는다.(「변신 혹은 메타몰포시스」)

이 작가는 2021년 2월 세상을 떠났다. 그 2주 뒤에는 인권활동가 김기홍 제주퀴어문화축제 공동조직위원장이, 그다음 달에는 변희수 하사가 세상을 떠났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너무 어두운 농담”은 책 전체에 가득하다. 자기 유언장을 읽는 사람의 독백 같은 장면에서 이 작가의 삶을 겹쳐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독자가 사후적으로 발견하는 징후들이 직설적이라 뼈아프다.

오혜진 문학평론가는 작품 해설 성격의 리뷰에서 이 작가의 희곡이 권력 자체를 심문하는 급진적 정치성을 담고 있다고 풀이했다. 주류에겐 급진적이지만, 비주류에게는 따뜻하고 다정한 이은용의 농담 또는 진담이 남기는 여운은 길다.

“기회가 된다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도 있겠죠. 나에게는 들려줄 이야기가 아주 많으니까요.”(「변신 혹은 메타몰포시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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