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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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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릴리를 쓰다듬자 배를 보이며 누웠다…생추어리의 다른 삶

최근 국내 동물권단체 생추어리 건립 움직임
타고난 습성대로 살 수 있도록 하는 안식처
등록 2023-04-21 12:31 수정 2023-05-03 04:56
동물권행동 카라가 운영하는 미니팜 생추어리에서 릴리와 자스민이 플라스틱 어구를 코로 굴려 간식을 다 꺼내먹은 뒤 쉬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동물권행동 카라가 운영하는 미니팜 생추어리에서 릴리와 자스민이 플라스틱 어구를 코로 굴려 간식을 다 꺼내먹은 뒤 쉬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한쪽 몸을 서로에게 꼭 붙인 채 나란히 엎드려 있던 미니돼지 릴리와 자스민이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사람 기척을 느끼고 일어난 것이다. 유지우·최인수 동물권행동 카라 활동가가 챙겨온 당근과 고구마를 칼로 조각내 동그란 구멍이 뚫린 어구 안에 넣는 사이, 릴리와 자스민이 코를 씰룩이며 울타리까지 바짝 다가왔다. 유지우 활동가가 어구를 울타리 안으로 넣어주자 두 돼지는 콧등으로 어구를 밀었다. 빨간색 어구를 요리조리 굴리던 돼지들은 당근과 고구마가 빠져나오면 씹어 먹었다.

간발의 차이로 살아남다

2023년 4월13일 미니팜 생추어리에서 릴리와 자스민을 제일 먼저 만났다. 미니팜 생추어리는 시민단체 동물권행동 카라가 2022년 2월 경기도의 농장을 빌려 개소했다. 돼지는 코로 땅을 파헤치며 먹이를 찾는 습성이 있다. 코를 사용해 뭔가를 반복적으로 밀거나 찌르는 것이다. 돼지가 타고난 본성을 이용하도록 활동가들이 직접 플라스틱 어구에 구멍을 냈다. 행동풍부화 프로그램이다.

축사 안에는 이불과 볏짚이 깔린 잠자리, 진흙 목욕탕, 그늘막뿐 아니라 수십 개의 돌무더기가 한가운데 있었다. 유지우 활동가는 “돼지에게 밥을 줄 때도 돌덩이 위에 뿌려서 돼지가 돌을 굴리며 먹이를 찾을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사람 팔뚝만 한 길이의 돌도 “돼지가 힘이 좋아서 다 굴릴 수 있”단다. 그의 말처럼 처음 놓였을 때 가지런한 모양새를 유지하던 돌덩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한참을 지켜보던 활동가들이 릴리의 등을 손으로 몇 차례 쓰다듬었다. 릴리가 털썩 옆으로 누웠다. 돼지가 사람 손길을 편안해하기까지 1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사람 손이 닿을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여전히 자스민은 쉽사리 배를 보이며 눕지 않는다.

최인수 활동가가 릴리의 배를 쓰다듬는 동안 유지우 활동가는 릴리의 발굽을 조금씩 깎았다. 마찰로 발굽이 충분히 닳지 않는 돼지는 별도의 관리가 필요하다. 게으름 피운다는 돼지의 이미지와 달리 돼지의 본성은 많이 돌아다니는 것이다. 릴리와 자스민에게 주어진 약 100평(330㎡)도 돼지에게는 좁다는 말이다. 4년 전 단체가 돼지들을 처음 만난 곳은 종돈장이었다. 당시 발굽 관리를 받지 못한 돼지들은 발 모양이 틀어져 걷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웠다.

느긋한 릴리와 자스민의 생의 역정은 기구했다. 2019년 2월 충남 홍성의 개농장에서 구조됐다. 농장주가 용돈벌이를 위해 사온 돼지들이 지낸 공간은 잠자리와 배변 장소를 구분할 수 없었다. 돼지들은 이 공간에서 수차례 강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태어난 새끼들은 어디로 팔렸는지 알 수 없다.

구조 뒤 반년이 흘렀을 무렵인 2019년 9월 중순, 경기도 파주의 한 양돈농가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생했다. 대규모 살처분의 서막이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은 치료제나 백신이 없는 1종 전염병이기에 방역법은 발생 장소를 중심으로 3㎞ 내 가축을 살처분하도록 규정했다. 10월3일 발생 장소에서 3㎞ 더 떨어진, 돼지를 임시 보호하던 농장에도 연락이 왔다. 카라는 감염 진단 검사를 요구했지만, 지방자치단체는 응하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 활동가들은 돼지들을 황급히 다른 지역으로 피신시켰다. 반나절이 안 돼, 농림축산식품부는 파주·김포·연천 지역의 모든 돼지의 수매 혹은 예방적 살처분을 발표했다. 파주에서만 대상 돼지가 12만5878마리였다. 간발의 차이로 돼지들은 살아남았다. 돼지들은 아프리카돼지열병 검사에서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았다.

염소 봄이 12살, 달이 4살, 태양이 5살의 의미

이날 정오께 야외 방사장에서는 염소 달이와 태양이가 서로 뿔을 맞대고 겨루기를 시작했다. 카라의 미니팜 생추어리에는 2019~2021년 개농장과 도살장 등에서 단체가 개와 함께 하나둘 구조한 돼지, 흑염소, 닭, 칠면조, 사향오리 등 농장동물 12개체가 살고 있다. 두 염소는 2021년 8월 경기도 여주의 개 도살장에서 구조됐다. 발견 당시 목을 제대로 펼 수조차 없는 좁은 철망 안에 갇혀 있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임신한 채 구조된 태양이는 찰랑이, 구름이, 별이를 낳았다.

개는 입양을 보내는 것이 가능하지만 다른 농장동물은 낯설어 입양이 쉽지 않았다. 지내기에 적당한 환경을 갖춘 곳도 찾기 어려웠다. 살아남은 동물을 키우기 위한 장소가 필요했다. 보호구역·피난처라는 뜻의 생추어리(Sanctuary)가 탄생한 배경이다.

국내 첫 생추어리인 ‘새벽이생추어리’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새벽이생추어리는 2019년 7월 동물권단체 디엑스이(DxE) 코리아가 경기도 화성의 돼지농장에서 공개 구조한 돼지들이 지낼 곳을 마련하려 만들어졌다. 당시 구조된 ‘새벽이’와 이후 실험돼지로 키워지다 안락사 위기에 놓였던 ‘잔디’가 살고 있다.

나현 활동가는 “생추어리는 동물 중심의 공간”이라고 강조한다. 생추어리는 거주동물인 돼지 새벽이와 잔디를 최우선으로 고려해 운영된다. 외부인이 가까이 다가가서 보거나 만지고 싶다고 해서 함부로 만질 수 없다. 인간의 욕구보다 새벽이와 잔디가 어떻게 느낄지, 이들의 복지에 어떤 영향을 줄지가 더 중요하다. 생추어리의 상근 활동가들은 돌봄 활동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사전교육을 해 반드시 이를 안내한다.

구조에서 살아남은 뒤에도 동물의 살아남기는 계속된다. 카라의 미니팜 생추어리에 있는 열두 동물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동물은 염소 봄이다. 까만 염소들 사이에서 흰 몸과 흰 수염이 눈에 띄는 봄이의 나이는 12살로 추정된다. 여섯 염소 가운데 가장 연장자로, 무리에서 서열이 가장 높다. 달이는 4살, 태양이는 5살이다. 일반적으로 예닐곱 살이 되면 낳을 수 있는 새끼의 수가 현저히 줄어든다. 일반 농장이었다면 봄이는 12살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생추어리에 사는 동물은 축산업의 ‘적정 출하 일령’ 나이를 넘어서서 ‘살아남는다’.

돼지는 생후 6개월쯤 도축장으로 향한다. 돼지 릴리와 자스민은 각각 7살, 5살로 추정된다. 새벽이생추어리의 새벽이는 2023년 7월 4살 생일을 맞는다. 돼지의 자연수명은 10~15년, 길면 20년까지도 산다. 생추어리에서라면 동물이 편안히 삶을 영위하다 나이 들어 자연사할 수 있다.

최인수 활동가는 “생추어리라는 공간이 만들어진 목적은 분명하다. 하지만 생추어리에 있는 동물에게는 어떤 목적이 부여되지 않고, 온전히 그 생명체 자체로 존중된다”고 말했다. 인간의 먹거리도, 인간이 쓸 의약품과 화장품의 안전성을 시험하는 대상도, 서커스 동물처럼 인간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오락거리도 아닌 고유한 개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먹이를 줄 때도 인간이 얻는 고기 수율을 고려한 사료 위주의 식단이 아니라, 동물의 취향을 고려해 다양한 식단을 구성한다. 새벽이생추어리의 상근 활동가들은 현재 새벽이와 잔디에게 줄 쑥과 쇠뜨기를 뜯는다. 무모 활동가는 “여름이 가까워지면 바랭이풀이라는 길쭉길쭉한 풀과 가시가 있는 덩굴인 환삼덩굴이 자란다. 새벽이와 잔디에게 그것을 뜯어주면 아주 잘 먹는데 곧 볼 수 있을 듯하다”고 말했다.

출발선의 생추어리, 외국에 물어봐도…

2020년 5월 새벽이생추어리가 문을 연 뒤 다른 생추어리가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미니팜 생추어리를 만든 카라에 이어, 동물해방물결은 2022년 11월 강원도 인제군 신월리에 소 생추어리인 꽃풀소 보금자리(달뜨는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국내 최초의 소 생추어리로, 현재 다섯 소가 활동가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28쪽 기사 참조) 농장동물뿐 아니라 야생동물 생추어리를 만들려는 노력도 있다. 동물원이나 동물체험카페처럼 좁은 곳에 갇혀 인간에게 길러지던 동물은 야생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1970년대부터 한국에서 웅담 채취를 위해 사육되던 곰이 대표적이다.(상자기사 참조)

생추어리 운영이 출발선에 있기에 참고할 선례가 적다. 당장 동물 습성이나 동물 돌봄에 대한 정보도 찾기 쉽지 않다. 있어봤자 도축된 동물의 특정 부위를 설명하는 정보다. 국내 단체들은 다른 나라의 자료를 참고하거나 그곳에 연락해 질문한다. ‘오픈 생추어리 프로젝트’(opensanctuary.org)라는 무료 웹사이트가 많은 도움이 된다. 동물종마다 어떤 환경이 필요한지, 어떤 음식을 주면 해가 되는지, 이뿐 아니라 어떤 업무를 맡는 직원이 있어야 하는지 등 단체 운영에 대한 조언도 한다. 다만 이런 정보는 국내에 바로 적용할 수는 없다.

새벽이생추어리 활동가들은 새벽이가 1년 정도 지내던 땅이 오염되자, 다른 나라의 생추어리에 상황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다. 새벽이 피부에 괜찮을지, 땅을 정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오염된 땅은 휴지기를 두라.” 땅이 넓으니 오염된 곳을 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됐다. 영인 활동가는 “환경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분들의 조언에서 언제나 정답을 얻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부지 확보가 가장 큰 난관이다. 조건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가축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동물을 예방적 살처분에서 보호하려면 농가나 도축장으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떨어져 있어야 한다. 동시에 상수원보호구역 같은 가축사육제한구역이어도 안 된다. 접경지역은 비가 오면 지뢰가 유실될 가능성도 있다. 또 생추어리의 취지를 이해하는 이웃이 있는 것도 중요하다.

새벽이생추어리도 최근 같은 고민에 맞닥뜨렸다. 땅 주인의 사정으로 곧 새벽이와 잔디의 터전을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단체는 2023년 2월부터 토지 임차비, 활동가 숙소를 짓거나 전기·수도 시설을 설치하는 비용 등을 충당하기 위한 이주비를 모금하고 있다.

카라도 2023년 하반기 농장동물이 더 넓게 살 수 있는 곳으로 생추어리를 옮길 예정인데 돌봄 인력에 대한 고민이 크다. 유지우 활동가는 “농장동물을 돌본 경험이 있는 상근 인력이 있어야 하는데, 농장동물 돌봄은 일반적인 경험이 아니기에 어떻게 상근 인력을 구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생추어리가 가져올 변화의 가능성

생추어리는 동물의 낙원이 될 수 없다. 이 안에서조차 동물은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모든 동물이 생추어리 같은 환경에서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단, 동물권단체들은 인간중심적 축산 시스템에 균열이 나기를 바란다. 새벽이생추어리의 무모 활동가는 “새벽이와 잔디는 각각 공장식 축산업과 동물실험 산업의 피해생존자”라며 “이들이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을지라도, 어떤 돼지라도 이만큼의 여건을 갖춘다면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만으로도 강력한 영향을 발휘한다”고 했다.

최태규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대표는 “우리가 그전에는 동물을 어떤 방식으로 착취해도 괜찮은 대상으로 봤다면, 생추어리는 그렇지 않아도 되는 사회임을 알리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생추어리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다른 종과 정의로운 방식으로 어울려 살아갈지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물은 단지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생명인가. 인간만을 중심으로 여겨왔던 세상에 생추어리가 질문을 던졌다.

사육곰 생추어리…남은 곰 313마리의 운명은?

국내에서 야생동물 생추어리 건립은 정부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환경부는 전남 구례군과 충남 서천군에 야외 방사장·사육장·의료시설이 갖춰진 사육곰 등의 생추어리를 만들고 있다. 2026년부터 곰 사육과 웅담 채취를 전면 금지하겠다고 밝힌 데 따른 것이다. 구례군에 지을 생추어리는 2024년 완공될 예정이다. 또한 국립생태원 내부에도 2023년 말 유기·방치 야생동물 보호시설을 짓는다. 그동안 지방자치단체 야생동물구조센터는 구조 뒤 소유주를 찾지 못하거나, 야생방사와 개인분양이 불가능하면 동물을 안락사해왔다. 이곳에서 거주하는 동물은 제 수명까지 살아갈 수 있다.
정부의 생추어리가 생기더라도 구조 동물을 전부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육곰의 경우, 구례와 서천의 생추어리가 수용할 수 있는 개체수는 120마리 정도다. 2022년 12월 기준, 국내에는 사육곰 313마리가 남는다. 동물권단체인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는 동물권행동 카라와 함께 사육곰을 위한 부지를 물색하고 있다. 2021년 강원도 화천군의 사육곰 농장에서 곰들을 구조한 뒤 두 단체는 해당 농장에 야외 방사장을 만들어 곰을 보호하고 있다.
최태규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대표는 “4년째 (생추어리 건립) 부지를 찾아다니고 있지만 아직 부지를 찾지 못했다. 문제는 돈”이라고 말했다. 동물이 본연의 습성대로 살려면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만, 민간단체는 대규모 용지를 살 수 있는 재정이 부족하다. 이런 까닭에 베트남·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지역에 있는 사육곰 생추어리는 정부 부지를 받고 동물권단체가 그곳에 시설을 지어 운영하기도 한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생추어리를 운영하고 있는 동물권 단체 후원 링크

동물권행동 카라
https://ekara.org/support/introduce
새벽이생추어리 이사 프로젝트
https://box.donus.org/box/dawnsanctuary/moving_project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http://projectmoonbear.org/intro
동물해방물결
https://donghaemul.com/don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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