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너의 문이 열리자 바닥에 코를 대고 한 걸음씩 걸어왔다.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땅인데, 거기서 발을 더 뻗지 못했다. 얼굴이 먼저 밖으로 쑤욱 나왔다. 킁킁, 킁킁킁. 냄새를 맡더니 다시 컨테이너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평생을 공중에 뜬 철창 안에서만 살아온 사육곰 ‘찰리’에게 온전한 땅은 미지의 세계였다. 5분 정도 지났을까. 입구에 놓인 쿠키를 먹기 위해 다시 컨테이너 끝에 섰다. “와봐, 와봐.” 동물자유연대 대표 조희경이 손짓했다. 쿠키를 먹던 찰리가 아주 납작 엎드렸다. 왼쪽 앞발을 살짝 뻗었다. 옆에서 응원하던 이들은 모두 숨죽였다. 그 순간 찰리가 앞발을 단단한 땅에 살포시 내려놨다. 다시 킁킁. 한참 냄새를 맡더니 이번엔 오른쪽 발을 내려놨다. 이윽고 네 발이 지면에 닿았다. 한국에서 태어난 지 만 10년, 바다 건너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미국까지 와서야 처음 밟은 땅이었다.
동물자유연대가 강원도 동해시의 한 사육곰 농장에서 사육곰 22마리를 구조해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 인근의 야생동물 생추어리(TWAS·The Wild Animal Sanctuary)로 이주시킨 지 1년이 지났다. 곰들은 2020년 초 구조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대유행의 여파로 2022년 3월에야 미국으로 갈 수 있었다. 구조부터 미국에서 처음으로 땅을 밟은 순간까지의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영화 <곰마워>(감독 김민우, 기획 동물자유연대)가 제작을 마치고 개봉을 앞두고 있다. 첫 시사회는 2023년 4월2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다.
찰리는 2012년 강원도 동해에서 태어났다. 동물자유연대 활동가 채일택이 찰리가 있던 사육곰 농장을 처음 찾은 건 2019년이었다. 그는 직접 농장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시설을 갖춰놓고 키우리라고 생각했다. “막상 가서 보니 개농장과 다를 바 없었어요. 개농장과 비슷한 규모의 철창에 곰들이 들어가 있었어요. (땅에서 떠 있는 구조의 철창인 뜬장) 아래엔 배설물이 쌓여 있었고요. 그냥 충격이었어요.” 사육곰들은 뜬장에서 살았다. 대부분 발바닥이 다 갈라졌고 눈빛에 생기가 없었다. 찰리도 그 1평 (약 3.3㎡) 남 짓한 철창 안에서 10년을 살았다.
2022년 말 기준, 전국의 사육곰은 313마리로 추산된다. 이들의 가슴에도 반달 모양의 흰색 무늬가 있지만,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된 토종 반달가슴곰과는 다르다. 1980년대 초 중국 등 아시아국가에서 수입돼 지금까지 이어진 외래종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생김새에 똑같은 곰인데 어느 곰은 복원 대상으로 지정돼 보호받고, 어떤 곰은 평생을 1평도 되지 않는 철창 안에서 살아가다 죽는다.
<곰마워> 감독 김민우는 영화를 찍기 위해 국내 다섯 곳의 사육곰 농장을 찾았다. 농장의 현실은 처참했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한 농장을 갔을 때예요. 거기 90여 마리가 빛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 살았는데 뜬장이었거든요. 다른 농장은 그나마 비가 오면 씻겨내려가는데 이곳은 지붕이 있어서 배설물이 쌓였어요. 그게 사람 무릎 높이 정도까지 올라왔는데 굳어서 평평해졌더라고요.” 치워지지 않은 배설물은 쌓이고 쌓여 공중에 떠 있는 철창의 바닥이 됐다.
동물자유연대가 찾은 대부분의 사육곰 농장은 출입문도 없었다. 작은 문이 있지만, 이 문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 곰이 들어갈 때만 사용한다. 이후 평생을 좁은 철창 안에서 산다. 그 철창은 죽어야만 나올 수 있다. 밖에서 마취총을 쏜 뒤 안에 사람이 들어가 도축해 빼내거나 쇠창살을 절단해서 꺼낸다.
정부는 1981년 곰 수입을 허용했다. 농가는 일본과 대만 등에서 재수출 목적으로 곰을 수입했다.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곰 보호 여론이 높아지자 다시 수입이 금지됐고, 1993년 수출도 막혔다. 정부는 1999년 농가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24년 이상 웅담(곰쓸개) 채취를 허가했고, 2005년 이를 10년으로 낮췄다. 그러나 점차 문화가 바뀌며 웅담 수요도 줄었다. “시장에서 공식적으로 유통되는 건 거의 없다”고 채일택은 말했다. 이 때문에 관리를 거의 방치하는 농장주가 많다.
“모든 농장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뜬장을 쓰는 건) 매일 치우기가 어려워서예요. 돈이 안 되니까, 웅담이 팔리지 않으니 그대로 두죠. 음식쓰레기를 돈 주고 사오는 곳도 있어요. 상한 음식도 30분 이상 끓여서 주면 법 위반이 아니거든요. 물도 상시로 주지 않고요.”(김민우) 뜬장과 음식쓰레기,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구조. 무작정 수입을 허가한 뒤 수출을 막아버린 정부의 정책과 곰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는 농장주들의 인식 등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어디에도 받아줄 곳 없는 이 사육곰들을 구조할 실마리는 한국을 넘어 미국에 있었다. 콜로라도주 덴버 인근의 생추어리 TWAS다. 동물자유연대는 2018년 어린이대공원 사자 세 마리를 이곳으로 이주시키며 처음 인연을 맺었다. 국내 사육곰의 현실을 담아 TWAS에 연락하자, 30여 마리를 받아줄 수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때부터 구조할 수 있는 농장을 찾았다. 농장주들은 팔리지도 않는 곰을 정부가 매입해달라고 주장했지만, 정부는 이에 응하지 않았기에 직접 동물자유연대가 농장주에게 돈을 내야 했다. 여러 농장을 수소문한 끝에 금액 조건이 맞는 농장을 찾았다. 동해시의 농장이었다.
2022년 3월14일, 철창에서 평생을 살아온 곰 22마리를 빼내는 날. 현장을 찾은 조희경의 눈에 이상한 모습이 들어왔다. 마취 작업을 하기 전 한 곰이 앞발을 철창 밖으로 계속 꺼내고 있었다. 안전수칙상 철창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되지만, 조희경은 다가갔다. 손을 뻗어 곰의 발에 살포시 포갰다. 평생 철창에서 살아온 곰 ‘루다’와 이를 구하려는 사람의 손이 서로 닿았다. 루다는 사람과 손이 닿은 뒤에도 가만히 있었다. 조희경은 여러 차례 손을 붙였다가 떼기를 반복하며 말했다. “아유, 고마워. 너무 고마워.”
이 모습을 촬영한 김민우는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사육곰들은 그동안 마취된 곰이 한 번도 철창 밖을 살아서 나가는 일을 못 봤거든요. 마취는 죽음이었어요. 그런데 마취된 곰이 살아서 나가는 걸 본 거예요. 곰들도 알고 있구나….”
루다를 비롯해 22마리의 곰은 30시간에 걸쳐 미국 덴버에 있는 생추어리로 이동했다. 그곳의 전체 면적은 약 9700에이커(39㎢)로, 서울에서 두 번째로 큰 자치구인 강서구의 면적(41.5㎢)과 비슷하다. 여기에 전세계에서 구조된 동물 700여 마리가 산다. TWAS 쪽이 사육곰 22마리만을 위해 마련한 공간은 300에이커(1.2㎢) 정도다. 연세대 신촌캠퍼스(약 0.9㎢)보다 넓은 공간에 곰 22마리만 평생 살게 된다. TWAS 활동가들은 그 중간에 적응을 위한 임시계류장을 마련했다.
채일택은 무엇보다 생추어리의 엄청난 규모에 놀랐다. “생추어리 자체가 엄청 넓다보니 그 안에 아주 다양한 환경이 존재해요. 자연은 아니지만 유사한 환경이 있고요. 또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더라고요. (큰 규모의) 공간이 제일 부러웠어요. 한국에서 이런 공간을 마련하는 게 가능할까 생각도 들고요.”
찰리의 첫 발걸음으로 시작해 임시계류장에 곰 22마리를 무사히 옮기고 한국에 돌아온 지 4주 뒤, TWAS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곰들이 적응을 마치고 계류장에서 나올 때가 됐다는 연락이었다. 4주 만에 만난 곰들은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다시 만난 곰들의 털엔 전에 없던 윤기가 있었다. 철창 안에서 보이던 정형행동(주로 사육되는 동물이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도 줄었다. 무엇보다 철창 안에서 마주했던 체념한 듯한 곰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2022년 4월28일, 적응을 마친 14마리의 곰이 있는 계류장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하나둘 천천히 계류장을 나왔다. 그 모습이 정말 자연스러웠다고 채일택은 기억했다. 마치 원래부터 하던 익숙한 행동처럼 곰들은 넓은 들판과 자연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디뎠다. “다른 야생곰들처럼 흙을 파기도 하고, 풀 냄새도 맡고, 주변도 살펴보고… 흩어지더라고요.” 채일택이 말했다.
안전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던 채일택과 달리 김민우는 촬영을 위해 현지 활동가의 차를 타고 한 곰의 뒤에 따라붙었다. ‘릴리'였다.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가던 릴리는 가다 말고 자꾸 뒤돌아봤다. 경사가 심한 곳에 이르러 더는 갈 수 없어 추적을 포기하려 할 때였다. 릴리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김민우는 릴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 이제 진짜 가도 돼?’ 다시 한참을 쳐다보던 릴리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더니, 그제야 숲속으로 들어갔다.
‘고마워.’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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