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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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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도 유전무죄?

2022년 12월부터 피해자 동의 없어도 가해자가 금전 공탁할 수 있어
판사가 양형에 ‘공탁’ 반영하면 돈 많은 범죄자 감형 수단으로 악용 우려
등록 2022-11-15 11:18 수정 2022-11-18 03:17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왜 나한테는 알리지 않고 가해자가 (공탁한) 돈이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가해를 반성하는 증거가 되는 건가요?”

지인에게 준강간 등을 당한 성폭력 피해자 ㄱ씨의 말이다. 그가 받아본 가해자의 1심 판결문에는 ‘상당한 금원(액수)의 공탁’이 가해자에게 유리한 정상(사정)으로 들어가 있었다. 실제 가해자는 징역형의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피해자는 공탁 사실조차 몰랐고, 가해자로부터 어떤 반성의 의사도 전달받지 않았다. 공탁금은 1천만원 정도에 불과했다.

형사공탁제도는 ‘형사사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원만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가해자가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활용되는’ 제도이다. 금전, 유가증권, 기타 물품을 공탁소에 맡기면 정해진 누군가가 이를 수령하도록 하는 민사제도 일부를 따온 형태다. 특히 성범죄 재판에서 양형을 고려할 때 ‘공탁’을 ‘합의’에 준하는 수준으로 참작한다. 이렇다보니 피해자와 합의에 실패한 가해자(피고인)가 이 제도를 활용해 선처를 구하기도 한다.

가해자가 선처 구하는 수단 ‘형사공탁’

기존 형사공탁제도는 여러 문제점을 지녔다. 우선 공탁서에 피해자(피공탁자)의 이름·주소·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해야 하고, 피해자의 주소를 소명하는 서면 등을 함께 제출해야 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가해자(공탁자)가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 이를 알아내기 위해 불법적인 수단까지 동원해왔다는 점이다. 게다가 합의를 강요하거나 협박하는 등 추가 피해도 일어났다.

공탁 과정과 공탁금 수령에 대한 정보도 피해자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 현행 제도는 ‘공탁금회수제한신고서’(공탁자가 피공탁자의 동의가 없으면 형사사건에 대해 불기소 결정이 있거나 무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공탁금의 회수청구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내용) 제출을 강제하지 않아, 가해자가 유죄를 선고받은 뒤 공탁금을 회수하는 방식의 꼼수가 가능하다.(물론 회수제한신고를 하지 않을 경우 재판부는 ‘공탁'을 양형에 반영하지는 않지만, 이를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으로 규정해야 효과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고 가해자가 여전히 처벌받기를 원하더라도 ‘형사상 위자료 또는 민사상 손해배상금’의 일부로서 공탁금을 수령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한 의사표시(‘이의유보’)를 언제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누구도 피해자에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공탁금을 수령할 경우 양형에 어떻게 반영되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피해자가 찾지 못한 공탁금은 소멸시효(10년)가 완성되면 고스란히 국고에 귀속된다. 이런 미비점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공탁제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제기됐다.

문제는 2022년 12월9일부터 새로 시행될 형사공탁특례제도가 기존 한계를 제대로 보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새 제도는 가해자(피고인)가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알지 못해도 재판이 진행 중인 법원이나 사건번호를 이용해 피공탁자(피해자)를 특정해 공탁할 수 있다. 피공탁자와 피해자가 같은 사람인지 확인하는 방법도, 피해자의 동의를 받는 대신 법원이나 검찰이 발급한 증명서로 할 수 있게 됐다. 피해자(피공탁자)에게 공탁 사실을 통지하는 것도 2차 피해 발생을 막기 위해 공탁관이 직접 통지하는 대신 누리집 등에 공고하는 방식으로 대체된다.

얼핏 피해자 입장에서도 자신의 개인정보를 보호하면서 금전적 형태로나마 일정 부분 피해 회복을 꾀하는 제도인 듯 보인다. 하지만 이 제도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전형으로 ‘경제력 있는’ 성범죄 가해자의 선처를 위한 제도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얼마나 감형할지는 판사 재량에 달려 

2022년 10월부터 적용된 새로운 성범죄 양형기준은 “합의 관련 양형요소 중 일반 감경인자인 ‘상당 금액 공탁’을 ‘상당한 피해 회복(공탁 포함)’으로 수정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일방적인 공탁까지 곧 상당한 피해 회복이라고 간주할 만한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공탁 액수 기준도 해제해주고 있다”(한국성폭력상담소)는 점에서 비판받았다. 새 제도까지 시행되면 성폭력 가해자가 금전을 이용해 감형받는 전략이 더욱 힘을 받게 될 것이다. 

실제 성범죄 가해자들도 이전보다 훨씬 편한 마음으로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고 재판부에 피력할 수 있게 됐다며 반기는 추세다. 공탁금을 내면 ‘피해자와 합의를 위한 노력 등을 별도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제도를 활용해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대신 재판부에 읍소하는 형태로 선처를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 가해 행위에 대한 반성이나 갱생도 요원해질 수 있다.

게다가 일선 법원에서 공탁을 양형에 얼마나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 기준도 없다. 전적으로 판사의 재량에 맡긴다. 성범죄 등 강력범죄는 일반 재산범죄와 다르게 정신적 고통 등 반영할 요소가 다양하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가능한 피해 회복의 정도를 수치화하기 어려운데도 그 가이드라인을 찾아보기 어렵다.

개정된 대로 공탁 통지를 인터넷으로만 할 경우, 즉 피해자의 동의를 사전에 거치지 않아도 되면 피해자는 오히려 일련의 과정을 알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온라인에 올리면 피해자가 ‘알아서 확인하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공탁제도’ 유무 자체를 통상적으로 인지하기 어렵고 제대로 고지조차 받지 못하는 점을 고려하면, 피해자로선 이를 확인해야 하는지조차 모른 채 재판 절차가 종료될 수도 있다.

금전 보상에 유독 관대한 한국 법원

한국 법원은 유독 ‘금전을 활용한 피해 회복’을 양형에 적극 반영한다. 미국은 다르다. 성폭력 등 폭력범죄에 대해서는 피고인의 금전적 피해 보상 노력을 양형에 반영하지 않는다. 가해자가 금전을 매개로 자신의 죄를 낮추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금전적 보상을 양형에 반영하는 일을 당장 막기 어렵다면, 절차상 피해자에게 제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고, 절차에 참여할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또 피해자의 정신적 고통과 일상 회복을 위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액수를 포함해, 공탁 내용도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분석하며 다듬어야 한다. 피해자를 배제한 공탁은 피해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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