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봄이면 대학 시절이 떠오른다. 학기가 시작된다는 면에선 봄이나 가을이 다를 바 없다. 여름내 뜨거웠던 바람이 서늘해지는 가을의 주된 정서는 반가움이다. 방학 때 보지 못한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반가움. 반면 겨우내 차가웠던 공기가 따뜻한 온기를 품은 봄은 설렘으로 다가온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 새내기가 들어오는 활기 넘치는 캠퍼스의 설렘은 다른 계절이 따라 할 수 없는 봄의 특권이다.
봄에 대학 시절이 떠오르는 또 다른 이유는 답사 때문이다. 역사학과는 학과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 봄에 답사를 떠났다. 나는 전공 공부를 게을리했지만 답사만큼은 열심히 따라다녔다. 강의실에서 들은 교수님 말씀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답사 때 교수님들이 가장 많이 한 말은 기억이 생생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 과연 그랬다. 모르고 가면 그냥 동네 뒷산 같은 경북 경주 남산 곳곳에 널린 바위를 무심코 지나치겠지만, 신라 민중 불교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남산의 바위를 꼼꼼히 살펴보며 지날 수밖에 없다. 마치 숨은 부처님 찾기를 하듯 답사지를 꼼꼼히 읽으며 다니다보면 아는 만큼 부처님을 볼 수 있었다.
세상사가 다 그러했다. 인식의 지평이 넓어질수록 보이는 게 많았다. 페미니즘을 알게 되면서 내가 누리는 당연한 것들이 엄마와 여동생에겐 허락되지 않았다는 걸 보게 됐다. 더 많이 보기 위해 더 많이 알려고 노력해야 했다.
그런데 어떤 것은 보는 만큼 알게 되기도 한다. 최근 책 <평화는 처음이라> 저자로서 어느 중학교에 갔다. ‘저자와의 대화’에 나를 초청한 선생님께 수업을 진행하며 특별히 신경 써야 하는 학생이 있는지 물었다. 선생님은 자폐성장애 학생이 몇 명 있지만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마침 자폐인이 신경학적으로 소수지만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존재며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SF 장르소설의 창시자 휴고 건즈백 등이 자폐성장애가 있었다는 것을 최근 읽은 책 <내 생의 중력에 맞서>에서도 본 터였다.
학생 20명가량이 앉아 있는 교실은 내가 다녔던 학교와는 모든 게 달랐다. 학생들의 반응도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는데 대답을 툭툭 던지는 학생이 있었다. 자폐성장애 학생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을 이어갔는데 그 학생은 자꾸 내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고 당황스러웠다. 반면 학생들은 태연했다. 그 친구의 습성을 잘 아는 듯 보였고, 아무렇지 않게 수업에 집중했다. 쉬는 시간에도 자폐성장애가 있는 친구와 어울리며 특별하게 배려하지 않았고 반대로 차별하지도 않았다.
장애인을 많이 보게 된 요즈음내가 가진 지식이며 정보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선생님의 조언과 책에서 본 이야기는 적절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인권활동가 동료 가운데 장애인 당사자도 있지만 내가 아는 이들은 대체로 신체장애인이었다. 분명 장애인의 인권 혹은 차별과 혐오에 대해서는 내가 학생들보다 더 많은 정보가 있었겠지만, 나는 자폐성장애를 그 학생들만큼 알지 못했다. 본 적이 없기에 알지 못했다. 학생들은 자폐성장애를 많이 봤기에 나보다 많이 알았다.
최근 들어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을 볼 일이 많아졌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보고,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보고, 드라마와 영화에도 예전보다 장애인이 많이 나온다. 덕분에 한국 사회 비장애인들은 예전보다 장애인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다. 장애인을 보면서 이 사회가 장애를 어떻게 차별하는지 알았다면, 이제 아는 만큼 볼 차례다.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 내 삶이, 한국 사회가 어떤 차별을 눈감고 있는가?
이용석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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