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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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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공정’은 텅 비어 있다”

방향성 없는 공정 담론은 어떻게 포퓰리즘에 동원되는가…
<급진의 20대> 저자 김내훈 인터뷰
등록 2022-02-09 15:44 수정 2022-02-11 17:45
‘조국 사태’는 20대의 ‘공정 담론’에 불을 붙였다. 2019년 9월 서울 성북구 고려대 중앙광장에서 열린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사퇴를 촉구하는 시위 모습. 연합뉴스

‘조국 사태’는 20대의 ‘공정 담론’에 불을 붙였다. 2019년 9월 서울 성북구 고려대 중앙광장에서 열린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사퇴를 촉구하는 시위 모습. 연합뉴스

대통령 선거를 한 달여 앞두고, 20대를 저마다의 정치적 이익에 껴맞춰 호명하고 분석하는 기사가 앞다퉈 쏟아진다. 20대는 전체 유권자의 약 15.5%(제21대 총선 기준·행정안전부)로, 다른 세대에 견줘 무당층 비율이 높고 이슈에 따라 표가 움직일 가능성이 커 ‘캐스팅보터’로 꼽힌다. 특히 20대 남성은 보수 진영에, 20대 여성은 제3지대에 높은 지지를 보였던 2021년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는 유권자로서 20대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줬다. 20대에 대한 호명은 대개 성별에 따른 갈등이나 차이를 부각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특정 이슈에 대한 의견을 물은 뒤 ‘20대 여성은 진보적이고, 20대 남성은 보수적’이라고 분석하는 조사 결과가 대표적이다.

최근 출간된 <급진의 20대>(서해문집)의 저자 김내훈(사진)은 ‘젠더 갈등’이란 표피를 떼고, 20대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에 관심의 초점을 맞출 것을 제안한다. 전작 <프로보커터>에서 주목경제의 관점으로 나쁜 ‘관종’(관심종자의 준말로 관심을 끌기 위해 튀는 행동을 보이는 사람) 현상을 짚은 그는, 이번엔 포퓰리즘의 렌즈로 이른바 ‘20대 현상’을 분석했다.

김진수 선임기자

김진수 선임기자

포퓰리즘의 렌즈로 분석한 ‘20대 현상’

김내훈은 “인민을 중심으로, 인민을 위하고 인민에게 소구하는 사상, 체제, 어젠다, 메시지 등”을 일컫는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 내재해 있으면서, 민주주의가 고장 났을 때 ‘병리적 증상’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포퓰리즘은 민중의 불만과 분노를 동력으로 삼는데, 정치가 장기 불황을 타개하려는 의지와 역량이 없을 때 이 동력은 배가된다.

그는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의 말을 빌려, 현재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는 ‘포퓰리즘 계기’를 산다고 본다. 신자유주의라는 지배적인 헤게모니가 가진 병폐가 튀어나와 균열이 일지만, 이 공백을 채울 뾰족한 대안과 해법이 보이지 않아 포퓰리즘이 부상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20대는 포퓰리즘 안에서 각자도생하는 이들이다. (‘포퓰리즘’은 ‘대중영합주의’와 동의어로 여겨져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정확히 말하면 대중영합주의를 일컫는 용어는 ‘포퓰러리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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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27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김내훈씨를 만났다. 김씨는 ‘밈’(온라인의 이미지나 유행어로 기원과 맥락을 이해해야한다는 점에서 은어와 유사함)과 온라인 문화, 트롤링(인터넷 공간에서의 공격적인 행위), 정치 유튜브 등에 관심을 둔 연구자(미디어문화 전공 박사과정)다. 그는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언어를 세심하게 고르며 “문제를 제기하는 취지이지 이게 정답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점 때문에 지금의 ‘20대 현상’을 포퓰리즘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봤나.

“(20대에겐) 기성 정치인의 언어도 안 통하고 제도권 질서를 거치지 않은 날것의 언어와 표현만 소구력을 갖는다.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를 하는 전문가만 전문가로 인정한다. 경제적 불안보다 문화적 반발을 중심으로 더 결집하는 것도 같다. 이 교집합은 계급운동도 아니고, (환경·평화·여성 운동 등) 신사회 운동도 아니다. 이전의 운동·조직·원리에 전혀 안 맞는 세력화가 일어난다. 20대는 ‘비어 있는’ 기표를 중심으로 세력이 뭉치는데, 이 기표는 공정이 될 수도 있고 ‘내로남불’처럼 위선에 반발하는 게 될 수도 있다. (실질적으로) 내용이 없다는 얘기다.”

왜 20대가 주장하는 ‘공정’의 정의가 텅 비어 있다고 봤나.

“본인의 어려운 처지나 삶에 대한 요구는 뚜렷하게 없고 수능이나 입사시험에 근거한 지대추구만 바라는 것 같아서 그렇다. ‘내 삶이 어떻게 나아져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나보다 못하거나 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로부터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하는지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내용이 없다고 봤다.”

‘공정’을 말할 때 결국 ‘시험’을 넘어서는 상상력이 생기지 않는 것 같다.

“시험 결과에 대해선 딴지걸기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결과에 문제를 제기하면 ‘(시험을) 잘 보지 그랬어’라고 받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쉬운 논리의 알고리즘이 나온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20대도) 그게 만능이라고 진정 믿는 것 같진 않다.”

더 나은 삶의 전망 없이 ‘지대추구’만 바라

김내훈은 <급진의 20대>에서 ‘우리’와 ‘그들’을 분리하는 혐오의 구조가 곧 포퓰리즘의 본질로 기능하는 사회에서, 20대가 말하는 ‘공정’의 의미는 사실 “텅 비어 있다”고 썼다. ‘공정’이라는 단어가 명확한 의미 없이 단지 “‘그들’을 배제하고 ‘우리’의 투쟁을 성역화하는 데 쓰이다”보니 “알맹이가 없어 특정 정치세력에 전유되기 쉽다”. 그리고 지금 이 ‘공정’이란 기표를 가장 적극적으로 전유하는 이는 극우보수세력이다.

이들이 말하는 ‘위선’과 ‘내로남불’도 결국 피아 구분을 위한 수단일 뿐인가.

“그렇다. ‘위선’을 조롱하는 미디어 콘텐츠가 일종의 오락이자 스포츠가 됐다. 한 사람이 던지는 메시지와 (그 사람의) 실제 삶이 조금이라도 괴리가 있으면 거기서 드러나는 모순이 너무 쉽게 먹잇감이 된다. 문제는 이러한 유희에 집착하면서 (해당 인물이 던진) 사회적 메시지의 가치까지 부정돼버린다는 점이다. 예컨대 평등 교육을 외치던 사람이 자식을 외고에 보냈다는 점이 드러나면 ‘평등 교육’의 가치까지도 떨어뜨리려는 언론보도 행태가 있고, 그걸 침소봉대하는 유튜버가 존재하는 현상은 동서를 불문한다. 사실상 모든 진보 정치 자체에 이런 위선 프레임이 만들어져 있다. 20대에게 불만은 늘 있는데, 미디어 영향으로 ‘내 불만이 저거다’라고 정한 부분도 있다고 본다.”

김내훈은 20대 현상의 원인 중 하나로 ‘협소한 정치적 상상력’을 꼽는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의 정치 지형은 좌우 모두 신자유주의를 지배적 헤게모니로 삼으면서 구분이 흐릿해졌고, 그 결과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양대 정당이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동시에 “현재 정부는 ‘극단적 좌편향 정치’를 펼치고 있다”는 20대의 비일관성은 이런 불균형이 만들어낸 착시다. 이들에게 보수는 곧 ‘중도’이고, 균형을 바로잡고자 하는 온건한 정책은 급진적으로 비춰진다.

2009년 용산 참사, 2014년 세월호 참사 등을 거치며 사회의 공공성이 붕괴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공적 권력’이 곧 사익 추구 집단으로 인식되면서, 공권력이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접고 내 성공만을 살길로 보고 각개약진한다. 상대적 우위는 한 줌이라 해도 어떤 식으로든 보상받아 마땅하고, 나아가 여건이 못 돼 노력조차 할 수 없던 사람들이 받는 사회적 차별까지가 자신에게 주어진 ‘공정한 보상’이라고 여긴다.

무너진 공공성 앞 차별마저 ‘보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하기 힘든 일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도록 훈련받아온” 20대에게 “구조적 조건을 바꾸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대신 이들은 “올바르지만 오래된 것보다 나쁘더라도 새로운 것이 낫다”는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특정 세력의 (재)집권을 막기 위해 ‘응징 투표’를 하게 된다. 투표 뒤에는 ‘실망’과 ‘응징’이 반복한다.

누군가를 응징하고 답답한 상황을 시원하게 타개하는 ‘사이다 서사’에 20대가 환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이다 서사’는 일부 젊은 사람이 인정투쟁을 ‘파업’한다는 의미다. 즉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사회적 의례를 위선과 가식으로 폄하한다. 지금까지 교육받고 사회가 시키는 대로 따르고 예의를 갖춰왔는데도 딱히 되는 것이 없는 삶인 거다. (내 상황은) 좋아지지 않는데 온라인엔 쉽게 취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고 특권층은 그 특권을 이용해 잘사는 것 같고 나만 손해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 ‘나도 위선과 가식을 다 벗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기반으로 ‘사이다 서사’에 대한 열광이 나온다. 성과가 보이지 않는 끝없는 인정투쟁에 대한 환멸과 위선을 향한 분노가 겹쳐 있다. 여기에 위악적이고 염세적인 커뮤니티 문화에 익숙한 20대는 ‘위선은 나쁘다’라는 명제를 반사회적 언행을 정당화하는 명제로 삼는다. 중국, 어린이, 여성, 페미니즘, 정치적 올바름, 정체성 정치, 외국인, 난민 등에 대한 반감과 경멸, 적대가 소셜미디어에서 반향을 일으키며 증폭된다.”

이러한 20대를 ‘위태로운 자들’로 정의했다. 위태로움이 구조를 바꾸는 동력으로 모일 여지는 없을까.

“새로운 의제를 던지는 정치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결국 ‘헤게모니 전략이 중요하다’고 (책에) 썼는데, 협소한 상상력의 범위 바깥에서부터 인민의 요구를 구체적으로 호명하면 좋겠다. 이를테면 앤드루 양이 기본소득을 이야기하며 ‘배당금’ 개념을 차용한 것처럼. 또는 버니 샌더스가 ‘메디케어 포 올’(전 국민 건강보험제도), 대학 등록금 면제 등을 제시했던 것처럼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안하는 것도 중요하다. 20대의 ‘과격함’이 저절로 ‘급진화’라는 긍정적 방향으로 전환될 것 같진 않다. 정치인이 ‘꼰대’가 아닌 척하기보다 오히려 대담하게 가야 한다. 대놓고 ‘꼰대’가 돼 내가 하려는 정책이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라고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정치인이 필요하다.”

대담하고 직관적인 언어로 정치 방향 보여줘야

정치인이 보여줄 수 있는 ‘대담한 전략’의 예시를 들어준다면.

“2020년 대선 후보 민주당 경선에서 미국 청년들에게 샌더스 열풍이 불었던 이유를 한번 더 살펴보자. 온라인에서 회자됐던 슬로건이 ‘억만장자는 존재해선 안 된다’는 발언이다. 누리꾼이 이 명제를 (기존)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급진정치의 ‘기표’로 활용해 상당수 청년의 지지를 받았다. 백만장자는 몰라도 ‘억만장자’의 존재는 양극화가 심해진 현실에서 수탈의 결과이자 현 체제의 구조적 결함을 나타내는 표상이라고 짚었는데, 이 점이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공명한 거다. 그 슬로건은 청년의 불만과 분노의 방향을 정해주는 기표가 됐고, 조 바이든 당선 뒤에도 이 ‘밈’은 남아 청년을 계속 끌어들이고 있다. 이런 식의 직관적인 접근 전략을 고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참고 문헌
(1) ‘좌파 포퓰리즘을 둘러싼 몇 가지 질문들: 이론과 쟁점’, 하승우, <문화과학 108호>, 2021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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