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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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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노동자의 도시

등록 2021-11-25 13:14 수정 2021-11-25 23:30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인구 한 명은 어떻게 더해지는가. 시민 한 명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전남 영암군 삼호읍은 한때 인구 한 명, 시민 한 명을 더할 게 명백해 보이는 마을이었다. 무화과 최대 산지 혹은 영산호 국민관광지 정도로 알려진 동네에, 현대삼호중공업과 대불국가산업단지(대불산단)가 들어섰다. 노동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는 인구일 것이며, 동시에 시민일 것이다. 정말 그랬다. 1990년대 초만 해도 1만 명이 안 됐던 인구는 2004년 2만 명을 넘어섰다. 삼호면에서 삼호읍이 됐다.
2021년 9월 말 삼호읍 인구는 2만1436명, 적지도 많지도 않다. 소멸 위기 지역으로 자주 언급되는 전남 영암군치고는 많은 편이다. 이제는 동네 이름보다 더 유명한 조선소와 산업단지를 품은 동네치고는 적은 편이다. 인구를 둘러싸고 삼호읍은 낯선, 다만 인구를 고민하는 모두에게 무척 중요한 고민을 앞서서 한다. 불황의 경험 덕분이다.
조선업 불황기 갑작스러운 인구 감소를 겪었다. 젊은 내국인 인구가 크게 줄었다. 쉽게 들고 날 만큼 조선업 노동은 유연해져 있었다. 이제 조선업이 회복 기미를 보인다. 내국인 노동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올 만큼 노동 환경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주노동자가 채웠다. 다만 상당수가 미등록 이주노동자다.
돌아보고 알았다. ‘일자리 하나=인구 한 명’이 아니었다. 노동의 자리가 언제든 쉽게 들어오고 밀려나는 극단적으로 유연한 형태일 때, 국내 노동자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인구 1명이었다. 주민등록지조차 ‘영암군 삼호읍’으로 두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지역에 사는 미등록 이주자는 어떤 숫자로도 기록되지 않는다. 오토바이와 자전거로 가득 찬 출근길, 외국어 간판이 더 많은 거리 곳곳 분명 한 사람, 한 사람 존재하는데 삼호읍 시민은 아니다. 인구가 아니다.
삼호읍에 10월27일부터 11월5일까지 열흘 동안 머물며 스물한 명을 만났다. 원주민, 합법 외국인 물량팀장, 미등록 외국인 물량팀장, 한국인 삼호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외국인 삼호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외국인 대불산단 블록업체 하청업체 노동자, 한국인 하청업체 대표 등이다. 한국인-외국인, 합법-미등록, 사내하청-물량팀이 뒤섞인 어지러운 호명은 조선업과 대불산단, 삼호읍의 인구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힌트를 준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삼호읍이 던지는 인구에 대한 고민, 시민 혹은 노동자의 삶과 생각을 대불산단과 거기에 딸린 주거단지의 평범한 하루로 재구성해서 전한다. _편집자주

*기사에 등장하는 사람은 (공공)기관 종사자가 아닌 한 모두 가명으로 적었다.
전남 영암군 삼호읍 대불국가산업단지 주거단지에서,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탄 외국인노동자들이 출근하고 있다.

전남 영암군 삼호읍 대불국가산업단지 주거단지에서,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탄 외국인노동자들이 출근하고 있다.

전남 영암군 삼호읍 대불 주거단지의 2021년 11월 초, 남녘이래도 아침 기온은 10℃ 밑으로 떨어졌다. 붉은 반다나를 눈 밑까지 올려 쓰고 노동자가 자전거 페달을 구른다. 겨우 보이는 눈매는 영락없는 외국인이다. 작업복에 두 손을 꽂고 기예하듯 자전거를 몰다가 휘어지는 골목에서 살짝, 한 손으로 핸들을 건드릴 뿐. 몸짓은 한없이 평화롭다. 평화는 아찔하다. 바로 뒤로 오토바이와 자전거 수백 대가 골목골목에서 쏟아져나온다. 대불체육공원에 이르면 지류로 흐르던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한데 모여 큰 줄기를 이룬다. 잡풀이 솟고 보도블록이 터져 울퉁불퉁한 인도 대신, 대개 찻길을 택했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트럭이나 승용차라면 눈치껏 이 시간 도로의 주인인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피해 가야 한다. 경적 한 번 울리지 않는다. 혼란은 그 와중에도 암묵적인 질서를 잡았다. 서로 다른 눈매와 피부색, 몸집. 세계 도처에서 왔음이 분명한, 다만 대개 비슷한 진청색·연회색 작업복을 걸친 노동자가 두 바퀴 탈것에 실려 출근한다.

오늘도 어제 같기를

산업단지를 낀 주거단지의 하루가 시작된다. 두 바퀴에 실린 이들은 아침 8시까지 각자의 공장에 도착할 것이다. 낮 12시 밥 먹고, 오후 3시께 10여 분 휴식하고, 5시에 퇴근해 6시면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같은 모습으로 지는 해를 등지고 우르르 돌아올 텐데, 모두가 그럴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 하루가 온전히 이어지리라는 확신은 이 동네에선 금물이다. 갑자기 일터를 옮길 수 있다. 갑자기 쫓겨날 수 있다. 누군가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 급박하게 자리 옮기고, 사라지고, 새로 들어오는 일은 조선업 중심의 대불국가산업단지(이하 대불산단), 그런 산업을 배경으로 지은 주거단지에서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 흔한 떠돎과 떠돎 사이에서 현대삼호중공업에 선박 블록을 납품하는 하청업체들에서 일하는 미등록 노동자 보우킴따이, 물량팀장 후이, 합법 체류 노동자 꾸엉도 여느 날처럼 오토바이·자전거·자동차가 뒤엉킨 무리에 섞여 출근한다. 셋은 모두 베트남인이다. 현대삼호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김병수와 한무진은 늘 그렇듯 정규직보다 일찍 조선소에 나와 작업 도구를 챙긴다. 이들 다섯은 서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다. 다만 모두 힘 모아 배를 짓는다.

삼호읍 토박이 강성호(63)는 배 지으러 가는 노동자의 물결을 자기 원룸 건물 앞 텃밭에 서서 바라본다. “꼭 외국 같어, 장관이여.” 그의 말투에는 어떤 비아냥도 담겨 있지 않다. 우리 동네가 그런 동네가 됐다는 게 새삼 신기할 따름이다.

1장 떠돌이 마을

AM 7:30, 대불체육공원 앞

강성호는 대불 주거단지, 대불체육공원 주변에서 원룸을 운영한다. 베트남인 3명, 중국인 1명, 한국인 3명이 그의 원룸에 머문다. 이 가운데 보우킴따이도 있다. “지금은 그렇게 7명이 살어. 그런데 잘 모른당게. 계속 왔다 갔다 하니께. 어제도 외국 사람 한 사람 붙잡혀가서 친구들 불러다가 방 하나를 정리했어. 교통사고를 냈어. 술은 하나도 안 먹었당게. 근데 잽히고 보니까 미등록 외국인이라서 사라져분 거여. 본국으로 추방된 거여.” 이런 외국인 이웃들과, 이렇게 살며,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 몰랐다.

1989년 11월 초, 꼭 32년 전 강성호가 “요상한 동네”라고 부르는 삼호읍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대불산단 기공식이 영산호 휴게소에서 열렸다. 노태우 대통령이 찾았다. “의자가 쫙 있고, 한 500명쯤은 모인 것 같어. 여그며 목포며 동네 이장부터 공무원들 다 모이라고 했으니께. 나도 그때 이장을 하고 있어서 갔고.”(강성호) 붉은 깃발이 드문드문 꽂힌 허허로운 벌판에 세운 가설무대, 오른쪽 기둥에는 ‘밝아오는 서남해안 시대 이룩되는 균형개발’이라고 적혀 있었다. 균형개발이라니. “아파트도 짓고 동네도 휘황찬란하게 변하고 그런 건 줄 알았지. 잘나간다는 동네 보면 원래 그런 거잖어.”(강성호)

조선소 정규직은 목포나 무안으로

애석하게도 대불산단은 완공 초기(1990년대 후반)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곧 좋아졌다. 1997년 외환위기 때 부도난 한라중공업을 현대삼호중공업(삼호중공업)이 품고, 2004년 이후 조선업 호황에 올라탔다. 원래 갯가였던 서쪽 끝에 삼호중공업, 그 거대한 조선소를 바라보고 조선 블록 업체와 기자재 업체는 대불산단에 착착 들어찼다.

산업을 따라 사람 사는 마을도 다시 정리됐다. 삼호읍에 사람이 모여 사는 공간은 이제 크게 세 군데다(위 그림 참조). 읍사무소나 버스터미널이 있는, 전통적인 삼호읍 중심 지역(읍내)이 있다. 여느 시골 읍내와 비슷하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지은 대여섯 군데의 아파트 단지가 낮은 건물들 사이에 빼죽해 어색하다. 버스터미널에는 고장 난 기계 10여 개가 쌓인 인형뽑기 가게가 있는데, 겨우 살아남은 기계 몇 개가 드르륵드르륵 고장 난 부품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경쾌한 음악을 울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른 두 주거지역은 조선업 동네다. 조선소를 둘러싼 삼호 1차부터 4차 아파트까지, 무려 4천 가구 규모의 아파트가 있다. 큰 도로를 끼고 아파트 단지가 펼쳐져 있으니 제법 신도시 느낌마저 난다. 원래는 조선소 직원을 위한 사원아파트였다. 2018년께부터 순차적으로 분양 전환했다. 그건 동네 누군가한테는 마치 ‘이제 우리 정규직 노동자가 더는 여기 살지 않는다’는 선언 혹은 배신 같았다. 현실이 그랬다. “이미 안정적인 조선소 정규직 노동자가 얼마 없는데다, 상당수가 사원아파트를 떠나 목포나 무안에 지은 신도시로 떠난 상태”(이보라미 전남도의원)였다. 삼호읍에서 삼호대교 하나만 건너면 왼편은 목포의 신도심인 하당, 오른편은 새로 지은 남악 신도시다. 삼호 아파트 단지들의 입주 세대는 3362가구, 주민등록 세대는 1880가구뿐이다. 하청업체들이 분양받아 기숙사용으로 쓰거나, 목포에 진짜 집을 둔 정규직 노동자들이 잠시 쉬기 위한 용도로 아파트를 점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강성호가 운영하는 원룸이 있는 대불산단 주거단지가 있다. 그나마 동네다운 번잡함을 상상한다면 삼호읍에선 이 동네가 으뜸이다. 약 30만㎡(9만 평) 정도의 공간에 4~5층 높이면서 1층이 주차장인 전형적인 필로티 원룸 건물이 들어찼다. 원룸 골목 사이 중국어, 아랍어, 베트남어 따위 세계 각지 언어로 간판을 세운 식당과 주점과 마트가 불을 밝힌다. 돼지고기는 절대 취급 않는 할랄 정육점 옆에, ‘베트남-우즈베키스탄 메이트’라고 적힌 마트가 있고, 그 맞은편에 ‘호우도’라고 적힌 중국 마트가 놓여 있다. 삼호읍에 가장 많은 외국인은 베트남인, 세 번째로 많은 외국인이 우즈베크인이다. 두 번째는 중국인이다. “영암만이 아니라 호남 지역 외국인의 집결지”라고 김경준 영암경찰서 삼호지구대장이 말했다.

주거단지에는 군데군데 빈 땅이 있는데, 조선업 사정이 나아지며 요즘 다시 원룸 공사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런 원룸 단지를 비교적 최근 지은 임대아파트 단지 3개가 감싸고 있다.

25~39살 내국인 3794명, 외국인 3696명

삼호읍의 인구는 적지 않다. 2020년 기준 2만1451명이다. 영암군 전체 인구가 5만3천 명 정도이니, 절반 가까이가 삼호읍에 산다. 상당수가 조선업 노동자다. 농사도 짓는다. 특히 전국 무화과의 57%를 생산한다. 영암군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할 법하다. 전남 서남지역 움푹 들어간 자리에 있는 영암은 ‘인구소멸 위기’ 지역으로 자주 꼽힌다. 2021년 10월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인구감소 위기 지역 89곳에도 포함됐다. 영암 인구는 2000년 6만5천여 명에서 20년 동안 1만 명 넘게 줄었다. 그 와중에 삼호읍은 2003년 인구 2만 명을 넘겨 오로지 인구만으로 ‘면’에서 ‘읍’으로 승격했다. 그런데도 주민들은 “그냥 왔다 갔다 하는 동네여” 하고 자기 마을을 설명할 뿐이다. 뒤이어 그저 일상적인 불평 몇 마디를 덧붙이는데, 숫자와 함께 보면 어딘지 의미심장하다.(위 그래프 참조)

“조선업이 힘드니까 정말 순식간에 사람이 싹 빠져버리더라고요.”(조기형 전국금속노동조합 광주전남지부 전남조선하청지회장) 인구 규모가 조선 산업 사이클을 따라 들쑥날쑥이다. 2014년 2만2700명이던 삼호읍 인구는, 조선업 불황이 한창인 2018년 2만889명으로 2천 명 가까이 줄었다. 조선업 회복 기미가 보이는 최근 다시 조금 늘어났다.

“남자가 많어, 여자는 별로 없당게. 일하러 온 동네니까.”(원룸 주인 강성호) 25~39살 나이대 남성이 여성보다 2배 넘게 많다. 20대 후반 남녀 성비(여자 100명당 남자 수)는 233.7에 이른다(전국 114.7). 남성 중심의 조선업 노동 구조가 인구에 그대로 반영됐다.

“사람들이 아이 낳고 머물고 하는 동네는 못 된 거지.”(강성호 원룸 옆의 다른 원룸 주인 한만석) 0~4살 영유아 비중은 2000년 12.3%에서 2020년 3.79%까지 줄었다. 전체 인구가 1만 명 이상 늘어나는 동안 태어난 아이는 외려 줄었다.

“젊은 사람들이 이 일 안 하려고 하니 당연히 젊은 인구도 줄죠.”(대불산단 B도장업체 대표) 젊은 ‘내국인’은 급격하게 줄어든다. 2010년 7744명이던 25~39살 내국인 인구는 2020년 3794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외국인이 무척 많다. 삼호읍은 2021년 9월 말 기준 외국인 3061명(삼호읍 인구의 약 17%)이 삼호읍에 있다고 집계했다. 공식적인 외국인 수만 보면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한다. 다만 누구도 이 숫자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실제 외국인의 절반 정도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공식적인 숫자만큼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더 있을 거로 보죠.”(오자영 삼호읍장) 읍장의 추정은, 미등록 이주자에게도 허용된 코로나19 진단검사 과정에서 드러난 외국인 규모를 바탕으로 했다. 이마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접종하는데, 문 앞에서 쭈뼛쭈뼛하는 외국인이 너무 많더래요. ‘들어와요들, 불법도 괜찮아!’ 하고 소리쳤다드라고.”(조기형 지회장)

“전에 없던 일” 조선업 도시의 몰락

모아보니 자못 심각한 얘기처럼 들린다. 산업의 도시는 곧 노동자의 도시여야 했다. 그런데 동시에 떠돌이의 도시다. ‘정착’의 느낌이 옅다. 그나마 한때 내국인이던 떠돌이는, 어느덧 외국인이 되었다. 조선업 노동자가 떠돌이가 되어간 2010년대를 고스란히 인구통계에 담고 있다. 조선업은 복잡한 하청과 재하청으로 이어진 불안정한 노동구조를 지니게 됐다. 일감을 따라 노동자들은 쉽게 이동한다. 막상 돌아보니 혼란스러운 동네를 생각하며 오자영 삼호읍장은 “어쩌면 인구의 미래를 보여주는 건지도 몰라요” 하고 스치듯 읊조렸다.

수도권으로 인구가 쏠리는 가운데 그나마 사정이 낫다고 여겼던 지역 제조업 도시들의 미래를 말하는 것일 터다. 2010년대 후반, 특히 조선업을 중심으로 불어닥친 불황 앞에 이들 도시가 겪은 지역 단위 경제위기는 규모나 충격 면에서 “전에 없던 일”(박종식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이다. 인구마저 따라 줄었다. 경남 거제는 2016년(25만7183명)을 정점으로 24만5754명(2020년)까지, 통영은 중소 조선소가 무너지기 시작한 2010년(14만297명)을 정점으로 2020년 12만8293명까지, 1만~2만 명씩 사람이 빠졌다. 영암도 물론, 그런 도시 가운데 한 곳이다.

다른 조선업 도시들과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다. “대불공단이 울산, 거제, 통영 등 대규모 조선업종 지역보다 훨씬 열악한 고용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 요인은 지역 특성상 안정적인 노동 공급원이 부족하고 조선업의 불예측적인 시장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인적 구조조정이 상시로 가능한 사내하청에 전폭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김현미 외, ‘이주노동자가 만든 한국 배’)

지역 산업 전체가 단 하나의 조선소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점, 그 산업의 노동마저 불안했다는 점, 산업단지의 역사가 짧다는 점 등이 삼호읍을 좀더 들고 떠나기 쉬운 동네로 만들었다. 그렇다고 삼호읍 풍경이 대단히 독특한 건 아니다. 대불산단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극도로 유연한(혹은 불안한) 노동조건은 다른 조선소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소를 넘어 불안정한 비정규 일자리는 어느 산업에든 퍼져 있다. 정도의 차이, 시간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미래’다. 32년 전 대통령도, 곧 산업단지가 될 허허벌판을 마주하고 앉은 숱한 시민도, 그저 산업이 자리잡고 일자리가 생기면 자연히 동네는 살아나리라 믿었을 것이다. 어떤 일자리, 어떤 인구여야 할지 이 땅에서 한발 앞서 묻게 될 거란 상상은 도무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떠돌이 도시의 ‘좋은 아침’

심각한 얘기는 여기까지. 떠돌이의 도시라 해서 사람 사는 정이 없겠는가. 강성호도 32년 전 기대와는 다른 동네의 모습을 이해하고 나름 재미있게 살자고 생각한다. 매일 아침 텃밭에 서 있다가 출근하는 외국인 원룸 ‘식구’들한테 “좋은 아침” 하고 손을 바짝 들어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꾸뻑 절하는 이도, “좋아? 좋은?” 하고 못 알아듣다가 그냥 무작정 손을 마주 흔드는 이도, “일하는데 뭐가 좋아” 쏘아붙이고 까르르 웃는 외국인도 있다. 보우킴따이는 굳이 따지면 쏘아붙이는 쪽일 터다. 그는 한국에 13년째 살았고 한국식 처세와 장난에 능하다. 강성호는 “뺀질이여 뺀질이” 하고 보우킴따이 얘기를 할 때면 피식 웃는다. 언제까지 마주할지는 모른다. 보우킴따이는 미등록 외국인노동자다. 그런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일을 강성호는 너무 많이 보았다.

인사 의례와 함께 삼호읍의 ‘좋은 아침’은 밝았다. 떠났던 이도, 새로 들어온 이도, 계속 머무른 채 지켜보는 이도 각자의 사정을 품고 하루를 난다. 사정 속에 대한민국 대표 제조업 산업단지를 품고도 ‘소멸 위기 지역의 희망’이라고는 차마 부를 수 없는, 동네의 고민이 켜켜이 담겨 있다.

대불국가산업단지의 한 공장에서 외국인노동자들이 도장(페인팅) 작업을 하고 있다.

대불국가산업단지의 한 공장에서 외국인노동자들이 도장(페인팅) 작업을 하고 있다.

2장 유령의 자유

PM 12:00, 현대삼호중공업

낮 12시 정각, 현대삼호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김병수(43)는 허겁지겁 배에서 내려온다. 배에서 내려올 수 있는 시간은 엄격히 정해져 있다. 식당까지 가는 데 20분, 오는 데 20분, 배에서 내리고 오르는 시간까지 따지면 밥 먹을 수 있는 시간은 10분 정도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눌란도, 오랜 동료 형 한무진도 함께 식당으로 달린다. 모두 현대삼호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다.

이들은 이 거대한 조선소의 주류다. 현대삼호중공업 정규직은 3512명, 비정규직인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는 9615명에 이른다(‘2021 고용형태공시’). 어떤 회사(사내하청업체)에 속하는지 묻는다면, 의미 없어 웃는다. “그동안 거친 회사가 당연히 10개는 넘는데, 셀 수가 없는디요. 가만히 있는데 업체가 폐업하고, 다른 회사로 소속이 바뀌어 있죠.” 폐업과 함께 임금을 떼일 때도, 4대 보험료를 떼일 때도, 퇴직금을 떼일 때도 잦았다. 대불산단에서 일한 지 2년 조금 넘은 눌란마저 벌써 겪은 일이다. “그냥 문 닫았어요. 이름 바꿨어. 근데 퇴직금 못 받았어요.” 너무 일찍 이곳 노동의 생리를 이해했다.

극도로 유연하고 자유로운 일자리

“2010년 이후로 (대불산단) 지역 내 거의 모든 업체들이 사내하청업체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필요한 노동력을 동원하고 있다. 사내하청업체도 직접고용 하지 않고 물량팀을 중심으로 재하도급을 주는 방식으로 운영한다.”(박종식, ‘조선산업 블록업체 고용구조와 특성: 대불공단 사례’) 정도가 좀 심하대도 대불산단의 고용구조는 2000년대 이후 조선업에 자리잡은 표준에 가깝다. 현대삼호중공업이 있고, 인력 공급 노릇을 하는 사내협력업체가 있다. 김병수나 눌란, 한무진처럼 사내협력업체 본공에 속한다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필요에 따라 하청업체는 다시 하청을 맡기고 이런 일을 ‘일용직’ 비슷한 물량팀이 한다. 조선소 바깥에서 블록과 기자재를 납품하는 업체도 자기 노동자를 몇 가지고 있지 않다. 소수의 생산관리 직원이 있을 뿐이다. 이들이 다수의 물량팀에 일을 나눠주고 관리한다. 일이 있으면 사람을 불러모은다. 일이 없으면 떠나보낸다. 극도로 유연하고 자유롭다.(36쪽 상자기사 참조)

한때 이런 노동은 노동자들한테도 ‘자유’로 여겨졌다. ‘몸에 익은 기술 하나로 전국 어느 조선소에서든 일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1997년 처음 조선소(당시는 한라조선소)에 하청노동자로 들어섰던 날, 김병수의 동료 한무진(47)도 그런 생각을 했다. “3개월 일했는데 월급 30만원이 오른 거예요. 기술을 쌓아서 S급 기술자가 되면 장난 아니겠구나, 생각했는데.” 예상은 빗나갔다. 주기적인 불황 속에 하도급 단가는 인하됐고 일감은 줄었다. 그에 따라 임금도 줄었다. 한무진의 경우 2017년 19만원 받던 일당이 1년 사이 15만원까지 줄기도 했다. 조선업의 임금수준은 제조업 평균을 100으로 놓고 봤을 때 2002년 154.3에 이르렀으나 2019년 102.8에 그친다.

최근까지 이어진 역대 최고 조선업 불황기는 곳곳에 상흔을 남겼다. 20년 넘게 조선업에서 일한 김병수마저 돌연 쓸모 잃은 존재가 되었다. “2017년 다리를 다쳤는데 치료하고 오라고 했어요. 간단한 수술을 하고 돌아왔더니, ‘김병수씨 해고되신 거 아시죠?’” 그날 이후 공사장을 돌고 경기도 수원에 가서 누나가 하는 일을 도왔다.

“여기서는 유령이 배를 짓고 있다”고 이 지역 하청 노동조합의 지회장을 맡은 조기형은 묘사했다. 떠돌고, 소속은 불분명하며, 포착되지 않는다. 유령은 산업의 등락에 따라 귀한 존재였다가,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시장에 홀로 놓인 자유로운 노동자’의 의미를 한무진은 불황 속에 깨달았다. 내 능력을 넘어선 호황과 불황을 혼자서 겪어내야 했다. 그러므로 젊은 시절 꿈꾼 숙련노동자가 된 지금, 한무진은 자기 일을 묻는 이들에게 대뜸 “알바 다녀요” 한다. 기술에, 나의 노동에 더는 “자부심이 없다”.

숙련노동자는 됐지만 “알바 다녀요”

그런 조선업에서 많은 동료가 자의로 떠났다. 용접이나 취부(용접 전 도면대로 조립하고 임시로 붙여놓는 작업)처럼 다양한 산업현장에서 쓰일 법한 일을 하는 조선 노동자는 “돈도 훨씬 더 주고 노동환경도 나은 경기도의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공장 건설현장에 갔다.”(조기형) 땅이라도 몇 평 있는 이들은 “고향에 농사짓거나 어업 하러 갔다.”(김병수) 그들을 바라보며 김병수와 한무진은 부러웠다. 애석하게도 두 사람의 기술은 다른 산업현장에 쓰임이 없었고, 고향이 근처(목포)여서 떠나기도 어려웠다. 떠나서 일하자니, 낮은 임금으로 살림 하나를 더할 엄두가 안 났다. “다른 방법만 있으면 저도 떠날 건데요.”(김병수)

어느덧 조선업 불황은 지나가고 있다. “아직은 배 수주가 고가에 되지도 않았고 원자재 가격이 올라서 단가가 오르진 않았지만 내년, 내후년쯤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이제 인력이 급해지기 시작했죠.”(대불산단 A블록업체 임원) 급하다 해도, 떠난 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노동자들은 생각한다. 젊은이들이 20대 때의 한무진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기술자가 되겠다고 야무지게 다짐할 리도 없을 것이다. “생활을 유지할 임금이 되거나 안정성이 있어야 여기로 돌아오고 일하고 정착하지 않겠어요?”(한무진)

조선업은 다시 사람이 필요하다. 노동조건은 나아지지 않았다. 내국인은 외면한다. “외국인 고용을 자유롭게 해달라”는 요구는 산업단지 하청업체 어느 곳에서든 쉽게 들을 수 있다. 유령을 거부한 내국인이 떠난 자리, 조선업 노동의 서사는 외국인이 다시 쓰고 있다.

한 조선업 블록공장에서 외국인노동자가 용접 작업을 하고 있다.

한 조선업 블록공장에서 외국인노동자가 용접 작업을 하고 있다.

3장 회색 노동

PM 3:00, 블록공장 컨테이너

두드리고, 녹여 붙이고, 갈아내는 소음을 막기에 얇은 벽은 역부족이다. 벽에는 화이트보드 4개가 붙어 있다. 세간이라 부를 만한 건 사물함 여섯 칸, 소파, 책상 정도다. 베트남어와 한국어가 번갈아 적힌 종이로 창은 가려뒀다.

대불국가산업단지의 한 블록업체 공장 한쪽에 컨테이너 사무실 5~6개가 줄지어 있다. 물량팀 사무실이다. 후이(35)가 소파에 앉는다. 잠시 쉬러 온 동료와 옆 물량팀장이 와서 몇 마디 나누곤 까르르 웃는다. 후이는 베트남인 17명과 타이인 1명을 이끄는, 베트남인 물량팀장이다. 조선업 특유의 노동형태인 물량팀은 공정별로 팀을 구성해 조선소나 하청업체를 돌며 일감 단위로 계약해 노동한다. 후이의 팀은 사상(용접 부위나 표면의 거친 부분을 다듬거나 갈아내는 작업) 공정을 맡고 있다. 지금 작업 중인 블록은 물량팀 3곳이 각각 사상, 취부(가용접), 용접을 나눠서 하는데 용접 쪽 물량팀장만 한국인이다. “용접도 일하는 사람은 다 외국인이에요.”

후이는 2009년 한국에 왔다. 일한 지 벌써 12년째, 숙련노동자로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그는 한국인과 결혼해 합법 체류 자격을 구했다. 그의 동료는 “대부분 미등록이다”. 후이는 물량팀장의 일을 “친구를 돕고 일거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을 모아 팀을 꾸린다. 고향 친구, 한국 생활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을 알음알음 모았다. 외국인 네트워크는 그의 자산이다. 조선업이 회복되면 고국 친구가 더 많이 모일 거로 후이는 짐작한다. 일감 물량을 받아와 일정을 짠다. 매일매일 진행 상황을 관리한다. 여느 상사처럼 가끔 엄하게 굴고, 뒤돌아서 미안해한다.

농업과 조선업을 오가는 유령들

유령의 흐릿함에 등급이 있다면, 그의 팀에 속한 미등록 외국인노동자는 가장 흐릿한 축에 속한다. 누구이며, 얼마나 있는지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고용 통계뿐만 아니라 인구·사회 통계에서도 그렇다. 법무부가 불법체류자 통계를 내고 있지만,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건 떠났다는 사실과 어디서 떠났는가 하는 정도다. 이들이 떠나서 어디에, 무엇을 하며 머무는지는 알 수 없다. 대불산단 블록공장 등 사내하청업체의 “60% 정도가 외국인이며, 많게는 최대 80%까지 외국인들이 일하고 있다”(배규식 외, <조선산업의 구조조정과 고용대책>)고 본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미등록 외국인노동자로 조선업 전반에 퍼져 있으리라 짐작한다. “거제 같은 좀더 큰 조선업 도시도 상황이 다르지 않을 거예요.”(이규용 한국노동연구원 고용정책연구본부 소장)

농업이나 건설업, 영세 제조업에서 주로 이야기됐던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조선업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점하게 됐다. 국가주도 개발 시대의 산업 역군, 높은 임금을 성취한 중산층 정규직, 한국인 불안정 노동자로 변해온 조선업 노동자의 표상을 외국인이 이어받았다.

미등록 외국인노동자도 어떤 면에서는 ‘최적의 유연노동자’로 임금에 따라 작업장과 팀을 옮겨다닌다. “돈을 더 받을 수 있다고 하면 금세 다른 팀으로 가버리기도 해요.”(후이) 한 사업장이나 회사에 속할 의무가 없으므로 다양한 일을 돈다. “농번기에는 농촌에서 돈을 더 받을 수 있거든요. 그럼 또 그쪽으로 우르르 가버리기도 하고요. 농촌이든 제조업이든 외국 인력 쟁탈전인 거죠.”(A블록업체 임원)

미등록 신분일지라도 숙련노동자가 돼 있다. 4년10개월짜리 비전문 취업비자로 한국 생활을 시작했으나 중간에 사업장을 이탈하거나, 더 오랜 기간 머물며 미등록 신분이 된 외국인노동자가 많다. “불법이면 오래 일한 거고, 그럼 일 더 잘해요, 안 그래요?”(보우킴따이)

이제 막 사람이 귀해지기 시작한 대불산단, 더 나아가 한국인이 찾지 않는 농촌, 건설현장, 공장에서 미등록 외국인은, 나름의 협상력을 더해간다. 코로나19로 외국 인력이 귀해지며 한층 귀한 존재가 됐다. 아직 내국인에 견줘 외국인노동자 임금은 대체로 낮다. 그래도 “한때는 내국인 3분의 1 수준이던 임금이 지금은 거의 비슷한 정도로 올라왔다”고 A블록업체 임원은 말했다.

물론 언제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자유는, 불황기에 언제 어디서든 사라지고 옮겨질 가능성과 같다. 후이는 조선업 불황기인 2017년부터 2018년까지 2년 동안 공사장을 돌아다녔다. 보우킴따이는 그 시기 주로 “농사일을 했다”. 한 달 동안 벌어야 할 돈은 정해져 있으므로 조선소에 일감이 없다고 쉴 수도 없다. 현대삼호중공업 사내협력업체에서 일하는 눌란은 지난 주말에도 빈 일감을 스스로 채웠다. “일 없으면 쉬고 돈 못 벌어요. 이번주에도 인력사무소에 가서 ‘사장님, 일 주세요’ 공사장에 가서 청소했어. 여기서 하루 13만원, 공사장 하루 13만원. 그러니까 결국 한 달 버는 돈은 같아요.”

“한국인은 그래도 혜택 받잖아요”

합법 노동자인 후이조차 일하고 돈을 제대로 못 받은 때가 꽤 있다. “액수가 적을 때는 도움을 청할 데가 마땅치 않아 그냥 넘어갔다.” 미등록 처지인 베트남 친구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고향 사람들한테마저 배신당한다. “한국 사람이든 베트남 사람이든 좋은 사람도 있지만 나쁜 사람도 있어요. 나쁜 팀장이랑 일하다가 돈 못 받은 친구도 많아요.”

산업단지에서 이들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하나, 공식화할 수 없다. 답을 찾기 어려운 회색지대다. 회색 공간에 있는 미등록 노동자인 후이네 팀원은 어느새 사무실에 들어와 “꼭 하고 싶은 말 있어요. 한국인들 일자리를 줄였다고도 하는데, 우리는 더 열심히 더 많이 일해야 해요. 한국인은 어느 정도 혜택을 받잖아요. 한국 사람들이 잘 안 하려는 일을 우리가 하는 거예요” 하고 다급하게 말을 얹더니, 다시 일하러 갔다.

회색지대는 노동에만 한정돼 있지 않다. 삶도 그렇다. 이들의 집, 원룸이 있는 대불 주거단지에서는 염려와 고민이 교차한다. 물론 환대도 있다.

전남 영암경찰서 삼호지구대원이 삼호지구대에서 개발해 사용하는 ‘외국인 의사소통 보드’를 들어 보였다.

전남 영암경찰서 삼호지구대원이 삼호지구대에서 개발해 사용하는 ‘외국인 의사소통 보드’를 들어 보였다.

4장 뒤섞임

PM 4:00, 삼호지구대

대불 주거단지 큰 길가에 경찰서인 삼호지구대 건물이 있다. 김경준 지구대장은 ‘의사소통 보드’를 들어 보인다. 영어, 베트남어, 우즈베키스탄어 등 7개 언어로 만든 종이판이다. ‘잃어버렸다’ ‘폭행당했다’ ‘사기당했다’ 같은 주요 단어를 한국어와 나란히 적어두고 하나하나 짚어가며 사건·사고의 전모를 파악한다. 우즈베크 유학 경험까지 있는 지구대원 한 명이 아이디어를 냈다. “전국 최초였는데, 여기저기서 벤치마킹해가고 격려도 많이 받았어요.”

다만 의사소통 보드만으로 외국인 밀집지역이 된 동네의 독특한 고민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사건이나 사고가 터져버렸을 때, 자기가 피해자여도 경찰서로 오는 게 아니라 도망가버리는 실정이죠.”(김경준 지구대장) 사건에 연루되면 추방을 각오해야 하는 미등록 체류자는 사법제도에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출근 물결을 이루는 오토바이만 해도 경찰한테 마냥 진풍경일 수 없다. 미등록 체류자가 많으므로 무등록 오토바이도 많다. 경찰은 대불체육공원이 잘 보이는 자리에 무등록 오토바이 단속 펼침막을 내걸고 2021년 7월 단속을 시작했다. 쉽지 않다. “무등록 오토바이 문제로 단속당해 신원이 드러날까 두려우니까 외국인이 숨어버려요. 그럼 산업단지가 돌아가지 않죠. 국가경제가 마비되죠.” 동네의 작은 지구대에서 국가경제의 우려를 듣는 일쯤은 대불 주거단지에서 별일 아니다.

무등록 오토바이를 단속하면

‘산업적 필요 때문에 탄생한 이주노동자를 기존 공동체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어디까지 시민의 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가’는 오랜 질문이다. “19세기 후반 처음 출현한 이주노동자 제도는 단기간 이주하여 노동력을 제공한 후, 취업계약 기간이 만료되면 본국으로 귀국할 것을 약속하는 식으로 설계되었다. …생산요소로서 노동력만 공급받는 것이 이주노동자 제도의 기본 취지였지만, 인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노동력 상품의 특성상 사람이 이동하여 거주하는 현상을 막을 수는 없었다.”(설동훈, ‘국제노동력 이동과 외국인노동자의 시민권에 대한 연구’)

존재하나, 시민의 목소리는 없는 이들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걸 토박이들은 깨닫는다. 공터에 쌓인 쓰레기랄지, 정리되지 않은 인도를 짚어가며 이 동네에서 건축업을 하는 현민수는 “여기는 목소리가 낮은 사람이 많이 살고 있잖아요. 표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낙후돼 있죠. 생산에 기여하는 사람들이지만 목소리는 작으니, 정주 여건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지역 의원을 중심으로, 서울 이태원처럼 세계 문화 거리를 조성하자는 제안은 나온다. 아직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제도나 인프라보다 이주자를 먼저 환대하는 건 의외로 소비, 거주 등으로 얽히게 된 동네의 선주민들이다. 대불산단에서 원룸 관리를 하는 이명자(78)는 “사람 다 똑같아요. 지나가다 만나면 귤도 하나씩 쥐여주고. 이 사람들이 정이 있어” 했다. 1970년대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 나갔던 친척 얘기를 한참 하더니, 불현듯 눈시울을 붉혔다. “얼마나 보고 싶겠어, 가족들.”

대불산단만 그런 건 아니다. 경기도의 한 공단을 연구한 논문(김현미 외, ‘미등록 이주민의 사회적 관계와 지역 재생산’)은 “미등록 이주민들이 거주하고 노동하며 소비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지역의 생산과 재생산 과정에 참여하면서 ‘불법’ 이주민이라는 주어진 정체성을 뛰어넘어 주체로 전환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논문을 인용했다.(McNevin, ‘Irregular migrants, neoliberal geographies and spatial frontiers of the political’, 2007) 사람의 구체성은 ‘불법’을 뛰어넘는다. 그 구체적인 관계를 만들게 해주는 자기 동네, 영암군 삼호읍을 보우킴따이는 이렇게 소개한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냥 동네. 그래도 내 나이 마흔하나. 스물여덟에 왔으니까 어른 되고서 베트남 생활, 한국 생활 똑같아. 그래서 제2의 고향.”

전남 영암군 현대삼호중공업 서문에서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는 조선소 노동자들.

전남 영암군 현대삼호중공업 서문에서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는 조선소 노동자들.

5장 있고, 없다

PM 6:30, 동네 식당

제2의 고향,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나의 동네, 대불 주거단지로 보우킴따이, 꾸엉, 후이는 무사히 퇴근해 돌아왔다. 꾸엉은 이 동네에서 베트남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어 좋다. 식당에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기도 하고, 원룸 이웃으로 만나 친구가 되기도 한다. “생일에 친구들이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줬어요.” 그런 순간에 “고향 부모님한테 맡기고 온 세 살, 다섯 살 아이에 대한 미안함”을 잠시 잊는다. 후이는 베트남인 축구팀을 꾸렸다. 삼호읍에는 현대삼호중공업 사내에 한 팀, 후이가 만든 한 팀이 있다. 후이는 “사내에 있는 팀은 팀원들이 어리다”고 은근히 자기 팀의 연륜을 자랑한다.

보우킴따이는 원룸 주인 강성호와 저녁을 먹는다. 보우킴따이가 강성호네 원룸에 살기 시작한 지도 벌써 2년쯤 됐다. 식당에 자리가 나길 기다리는 동안 잠깐 사라졌던 보우킴따이는 박카스 몇 병을 사들고 왔다. 그는 “회사에서 차로 데려가고 데려다주고 할 정도로” 자신이 싹싹하고 신뢰받는 노동자가 된 걸 자랑스러워한다. “의리, 의리가 중요해”를 신조처럼 외친다. 보우킴따이의 삶만큼이나 강성호의 삶도 변했다. 나이 육십 넘어 동네 골목에 자리잡은 마라탕집이나 양꼬치집, 베트남 음식점을 꿴다.

“의리 의리”의 신뢰받는 노동자

문득 “미안해요, 나 불법이에요”, 보우킴따이가 시선을 떨군다. 그는 ‘불법체류자’라서, 영암군 삼호읍의 인구로는 없다. 숙련노동자로는 있고, 원룸 세입자로도 있고, 능숙한 젓가락질로 육회를 집어드는 식당 손님으로는 있는데, 시민으로는 없다. 삼호읍의 주민으로는 없다. 소멸 위기 지역의 희망으로는 없다. 이토록 복잡한 자기 존재의 기원을 따져보기에 앞서 보우킴따이는 대뜸 사과부터 하고 본다.

잠시 침묵, 강성호의 잔소리는 좀 남았다. “안주 좀 먹어. 내일 또 일 가야 하는데 술 좀 천천히 먹어.” 보우킴따이는 언제 의기소침했냐는 듯이, 강성호의 팔을 건드린다. “영감 팔 통통해, 내 팔 얇아. 많이 먹으면 영감처럼 돼.” 식탁 위로 굵기도 피부색도 다른 두 팔이 올라왔다. “영감 말고 형님이랬지!” 강성호는 외친다. 원룸 주인과 투덕거리는 이런 순간에 보우킴따이는 분명, 있다.

영암=글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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