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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에 기저귀 뗀 아들이 알려준 ‘느림의 미학’

12살에 기저귀 뗀 아들이 알려준 ‘느림이 주는 미학’
등록 2021-02-25 20:00 수정 2021-02-26 08:45
아들의 속도에선 12살이 기저귀를 떼는 적기이지 않을까. 나는 느리게 성장하는 아들의 속도가 좋다.

아들의 속도에선 12살이 기저귀를 떼는 적기이지 않을까. 나는 느리게 성장하는 아들의 속도가 좋다.

우리는 상대의 속도를 어디까지 존중할 수 있을까? 식당에서 음식이 조금만 늦게 나와도 불만이 터져나오고 신입직원의 일처리가 미숙한 걸 보면 호통 먼저 터져나오는 사회에서 상대의 속도를 온전히 기다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본다. 나는 내 속도를 어디까지 존중받길 원하는가? 남의 일을 내 일로 바꿨을 뿐인데 기대하는 답변이 전혀 다르다.

누구나 자신의 속도를 존중받길 바란다. 그런 분위기가 형성된 사회라면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 온전한 나 자신으로 있어도 안심될 것 같다. ‘빨리빨리’가 대한민국의 경쟁력이라지만 모두가 내심으로 바라는 건 각자의 속도가 그 자체로 존중받는 것 아닐까.

“뭐든 배우고 와라”에서 지원으로

요즘 발달장애가 있는 아들의 언어치료실을 새로 알아보고 있다. 4~11살까지 열심히 언어치료실을 다녔지만 아들은 몇 개월에 한 번씩 “시어~!”(싫어)라고 외치는 것 외엔 말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언어치료실에 다니는 걸 주사 맞는 것만큼이나 싫어했다.

재밌는 건 언어치료를 중단하면서 자발적 언어 발화가 시작됐다는 점이다. 엄마인 내가 수천 번 반복해서 한 말이나 수천 번 반복 시청한 만화 캐릭터의 대사(단어)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물론 늘 말하는 건 아니고 기분 내킬 때만 한다는 게 함정이지만. 어쨌든 아들의 자발적 언어 발화 가운데 가장 기쁜 건 “시 사~” 또는 “시 솨~”라는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쉬 싸~”라는 뜻이다. 이전엔 쉬가 마려울 때 손을 바지춤에 가져가 바지를 내리려는 행동을 했는데, 이젠 손이 아닌 말로 화장실 가고 싶다는 뜻을 전달한다.

문제는 “시 사~”라는 말을 “쉬 싸~”라는 소리로 알아들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 그래서 아들의 자발적 언어가 막 태동하기 시작한 요즘, 정확한 표현과 발음을 배워 ‘말이 통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도우려 언어치료실을 다시 알아보는 중이다. 예전엔 언어치료실을 다닐 때 무작정 ‘뭐라도 배우고 와라’라는 마음이었다면, 지금은 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지원하는 느낌이란 게 차이점이다.

아마 아들은 성인이 되어도 나처럼 유창하게 문장으로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아무러면 어떤가. 단어로 말하는 것도 엄연히 말로 하는 의사소통 방법이다. 나도 길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문장은커녕 영어 단어로 더듬더듬 소통한다. 하지만 영어 단어에 손짓 발짓까지 더하니 소통하는 데 큰 불편이 없어, 서울 삼청동이나 북촌 한옥마을에서 길을 알려준 외국인만도 꼽으면 다섯 손가락을 넘어간다.

이 얘기를 꺼낸 건 “여러분~ 드디어 우리 아들이 ‘쉬 싸’라고 말해요. 앗싸!”라고 동네방네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느린 속도이지만 꾸준히 발달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속도로 성장한다.

우리끼리만 알기에는 너무 아쉬운 미덕

아들은 12살인 2020년에 기저귀를 뗐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기저귀 떼기 훈련에 들어갔는데 2~3년이 흘러 낮 시간 기저귀 착용에서 졸업했고, 그로부터 2~3년이 더 지나 밤 기저귀도 졸업했다. 주변에서 기저귀 뗀 비결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환경이 바뀐 것도, 훈련 방식이 달라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년 실패했던 기저귀 탈출이 지난해엔 성공했다. 그렇다면 아들은 기저귀를 뗄 때가 돼서 뗀 게 아닐까? 아들의 속도에선 12살이 기저귀를 떼기에 가장 적당한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딸도 그랬다. 아들과 쌍둥이인 비장애인 딸은 18개월부터 기저귀 떼기 훈련에 들어갔다. 첫 시도는 실패. 유아변기에 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20개월, 24개월에도 시도했다 실패한 뒤 한동안 사는 게 바빠 잊고 지내다 30개월에 들어선 어느 날 다시 했는데 너무나 간단히 한번에 성공했다. 비결이랄 것도 없었다. 딸이 충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시도하니 저도 편하고 나도 편하게 한번에 성공해버렸다. 딸의 속도에선 30개월이 가장 적당한 때였고 아들의 속도에선 12살이 준비된 시기였다고밖에 나는 설명하지 못하겠다.

누구나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 그 속도는 모두 다르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남편과 나는 온 집 안을 직접 도배했다. 효율적으로 빠르게 쓱쓱 도배하는 데 중점을 두는 난, 일일이 길이와 넓이를 재고 신중하게 벽지를 바르는 남편의 속도가 답답해 화병이 날 뻔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나 또한 어떤 면에선 남편보다 속도가 느리다. 나는 칼럼 하나를 쓰는 데 이틀씩 걸리지만 남편은 한 시간이면 뚝딱 완성해 넘긴다. 설거지는 또 어떤가. 나는 30~40분이 걸릴 양도 남편은 10분 만에 해치우곤 손을 턴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면에선 빠르고 어떤 면에선 느리다. 기록이 중요한 스포츠 경기가 아닌 다음에야 속도라는 게 사람의 가치를 결정짓는 요소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아들 얘기로 돌아와서. 나는 느리게 성장하는 아들의 속도가 마음에 든다. 느림이 주는 미학이 있다. 느린 속도로 성장하는 자식을 둔 부모들은 아는, 우리끼리만 알기엔 너무 아쉬워서 ‘이걸 어떻게 세상 사람들도 함께 알게 할 방법은 없을까’ 하고 막 안달마저 내는, 그런 미덕이 분명히 있다.

팔뚝 굵고 힘센 내가 곁에 없어도

오늘도 애니메이션 <뽀로로>를 보며 방긋방긋 웃는 아들을 보면서…. 나는 팔뚝 굵고 힘센 내가 곁에 없어도 아들이 존재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이길 바라본다. 그런 안전망이 갖춰진 사회로 나아가길 바라본다. 세상에서 가장 느리게 성장해가는 아들의 속도가 존중받는 사회라면 모두가 저마다의 속도를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이다. 기대일지 바람일지 모를 그런 꿈에 오늘도 기대어본다.

글·사진 류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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