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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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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선택에 아이의 미래 바뀌는 부담감

의무교육 제공받을 권리 잘 갖춰진 대한민국, 특수교육 빈틈은 오롯이 부모의 몫
등록 2021-09-11 11:30 수정 2021-09-14 01:07
13살 아들을 아기처럼 일일이 돌보는 일상보다 훨씬 더 힘든 것은 부모의 선택이 아이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부담감이다.

13살 아들을 아기처럼 일일이 돌보는 일상보다 훨씬 더 힘든 것은 부모의 선택이 아이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부담감이다.

아들이 발달장애인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나를 엄청 힘들고 불행한 삶을 사는 비운의 주인공으로 생각한다. 힘든 건 맞지만 불행하진 않다.

밥 먹다 말고 아들 똥 닦으러 출동하는 일은 힘들다. 어릴 때야 내 새끼 똥도 예쁘다지만 키가 나만 한 아들이 퍼질러놓은 내용물은 워워~. 상상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뿐이랴. 13살 아들에게 밥을 먹여주고 양치질해주고 아직도 몸으로 놀아줘야 하는 모든 일상이 다 힘들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사실 하나도 힘들지 않다. 단지 몸이 힘든 일이기에 익숙해지고 나면 얼마든지 적응하는 게 또 사람이다.

내가 정말 힘들다고 느끼는 건 정신적인 부분, 심리적인 부분이다. 그중에서도 아들 인생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내가 져야 한다는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 선택에 따라 아들 미래가 바뀐다. 한 번의 선택일 뿐인데 그 무게감은 엄청나다. 당사자 자기결정권에 대해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선택지 안에서 내려야 하는 ‘작은 결정’이 당사자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만큼 큰 영향을 미친다는 시스템 차원의 얘기를 하는 중이다. 가끔은 나 자신을 책임지고 사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타인 삶의 결정권까지 행사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알지 못한다.

일반학교냐 특수학교냐 갈림길에서​

아는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일반 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아이를 일반 중학교에 보내야 할지 특수학교에 보내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다(특수교육 대상자의 학교 배치는 2학기 시작과 동시에 바로 진행된다).

나도 몇 년 전 머리 터지게 했던 고민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뒀을 때도 했고, 일반 초등학교에 다니던 중 특수학급 교사로부터 특수학교로 전학을 권고받았을 때도 했다. 그때 내린 결정이 지금의 특수학교이고 그 결정에는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까지 포함돼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중학교 입학을 위한 특수학교 신입생 배치 신청서’를 받고도 아무 고민 없이 사인해 학교에 제출할 수 있었는데, 아는 엄마는 과거의 나처럼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자신의 결정으로 자식의 미래가 바뀔 엄중한 갈림길.

그동안 느낀 특수학교의 장단점을 구구절절 설명했다. 얼핏 특수교육에 전문화된 최적의 환경일 것 같지만 오히려 그렇지 못한 상황이 속출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한계, 누군가의 개별화 교육이 진행되는 동안 누군가는 방치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환경, 통용되는 사회규범과 일상적인 반응 행동을 배울 모방 집단 부재, 보편적 또래 문화를 익힐 경험의 상실, 서로 다른 감각적 예민함을 지닌 학생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기에 나타나는 여러 사건·사고, 그 외에도 지원 인력의 전문화 문제라든가 다수의 편의를 위한 소수의 배제 등 특수학교의 아쉬운 점을 조목조목 전달했다.

그럼에도 학생 개인을 위한 교사 간 협력적 태도, 진정한 의미의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어쩌면 유일무이한 기회, 교실 내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아닌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환경, 잦은 현장학습, 체계화된 방과후 수업,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되지 않는 분위기 등 특수학교의 장점을 얘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왕복 등하교 2시간쯤은 감내해야

6년 전 이맘때 일이다. 유치원 담임이 아들이 다닐 초등학교를 선택하라고 했다. “아이 학교를 제가 정한다고요?” 놀랐다. 학교란 교육청에서 ‘뺑뺑이’(추첨) 돌려 배정하는 것인 줄 알았다. 실제로 아들과 쌍둥이인 딸은 어느 초등학교로 배정됐다는 통지문만 우편으로 받았다. 오래 고민하고 선택했다. 선택은 내 몫이었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오롯이 아들이 졌다.

얼마 전 딸 학교에서 공문이 왔다. 국제중학교 입학 희망자는 신청하라는 공문. 딸은 국제중학교 가면 공부 많이 해야 한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그래, 잘났다. 네 똥 굵다. 에효. 딸은 연말이 되면 ○○중학교 입학통지서를 받을 것이다. 옆집 언니와 아랫집 언니가 다니는 학교로 집에서 5분 거리다. 선택의 기회조차 없으니 안 좋은 거 아니냐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딸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의무교육을 받을 수 있게 지역 내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 갈 시기가 되면 알아서 내 집 앞 가까운 학교를 배정받는다. 당사자가 할 일은 새로 맞춘 교복을 입고 새 학교에 가서 새 친구들과 마음껏 수다 떨고 게임하고 공부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학교 선택권이 부모에게 있는 특수교육 대상자는 그렇지 않다. 집 앞 가까운 학교에 특수학급이 없는 경우가 많아 먼 거리 일반 학교 중에서 선택해야 하고, 특수학교 입학을 결정했어도 특수학교 자체가 워낙 귀하신 몸이라 왕복 2시간의 등하교 시간쯤은 감내해야 한다. 바로 내 집 앞 가장 가까운 학교에 다니는 게 당연한 일인 비장애 학생과 비교하면 장애 학생을 위한 지역사회 기반이 얼마나 열악한지 알 수 있다. 선택권이 특권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책임 떠넘기기인 것을 알 수 있다.

장애와 비장애 고민할 필요조차 없어야

태어나면 누구나 아무 걱정 없이 학교에 가야 한다. 그래서 교육 앞에 ‘의무’라는 말까지 붙였다. 그런데 장애 학생에겐 그 여정이 출발부터 참으로 고되다. 국가 시스템이 헐렁하게 구축돼 있으니 빈 공간을 채우는 게 부모 몫이 된다. 부모가 선택하고 자식이 책임지는 구조가 돼버린다. 가끔은 선택의 무게감이 벅차게 느껴진다.

장애와 비장애를 떠나 의무교육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 고민조차 하지 않는 성질의 것이어야 한다. 그러질 못하니 <학교 가는 길>이란 제목의 영화까지 나오는 게 현실이다. 장애 학생의 학교 가는 길이 모두의 학교 가는 길처럼 당연한 길, 힘들지 않은 꽃길, 아니 쭉 뻗은 아스팔트길이길 바라본다.

글·사진 류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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