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헉, 우린 이미 늦었어. 먼저 가”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기성세대의 장애인식에 관한 얘기다. 수십 년 쌓인 장애인식은 돌덩이처럼 단단히 굳어 다른 인식이 파고들 여지를 쉽게 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나는 쓰고 또 쓴다. 아직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청년세대만이라도 부디….
“이야기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인 양 나는 그 말에 기대어 노트북 자판을 두드린다.
‘아들의 엄마’인 나는, 내 사후 홀로 남겨질 아들을 생각하며 매일을 산다. 생(生)의 목적은 사(死)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늘 ‘죽음’을, 그것도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자기 죽음을 끊임없이 일깨우며 살아가야 하는 삶, ‘발달장애아의 엄마’로 사는 숙명이다.
2020년 10월16일부터 쓰기 시작한 ‘더불어, 장애’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생각에 따라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한 시간인데 애초에 칼럼을 쓰려고 한 목적(세상의 장애인식 전환을 위한 작은 씨앗을 뿌리고 싶다)을 달성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 나는 좀 절박했던 것 같다. 코로나19가 확산된 첫해였고 학교는 수시로 문을 닫았는데 집에 있을 수만은 없어 아들의 손을 잡고 매일 거리를 헤맸다. 때마침 아이는 이제 막 사춘기 초입에 들어섰고 키가 커지고 목청이 커지니 사람들의 시선에서 관용이 사라졌다. 어린 발달장애아는 우쭈쭈 하며 받아들여도 중증의 성인 발달장애인은 식겁하며 배척하기 일쑤인 냉정한 현실의 세계로 성큼 다가간 것이다.
2022년부턴 또 다른 이유로 삶이 벅차다. 코로나19에 따른 개인 사정 등을 이유로 아들의 활동지원사가 그만뒀다. 기관 3곳에 활동지원사 연결을 요구했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다. 외출 지원만이 아닌 생활 지원까지 해야 하는 중증의 사춘기 남성 발달장애인이 이토록 인기 없었다니…. 내 눈엔 예쁘기만 한데, 너무 예뻐서 다 큰 녀석에게 뽀뽀를 퍼부어대고 싶은 걸 억지로 참는 게 힘들 정도인데, 안타깝게도 아들이 예쁜 건 나밖에 모른다.
나는 아들을 ‘축복’이라고 말한다. 무교인 내가, 한때는 태몽으로 등장했던 김수환 추기경 사진만 보이면 노려봤던 내가, 아들 때문에 인생이 저당 잡혔다며 울고 원망하던 내가 아들을 축복이라 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아들이 축복인 이유는 덕분에 많이 웃으며 살기 때문이다. 갓난아기를 키우는 부모들이 느끼는 기쁨(물론 힘듦도)과 비슷한 감정을 14살 아들에게서도 받는다. (사람은 갓난아기 때 일평생 할 효도를 다 한다고 하는데 나는 아들에게 평생 효도받으며 살게 됐다.) 그리고 아들 덕분에 나머지 가족이 서로를 더 사랑하고 위하며 살게 됐다. 이런 아들이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랴.
장애인을 ‘우리’라는 이너서클로이렇게 예쁘기만 한 아들이 집 밖을 나가는 순간부턴 장애인이 된다. 그것도 세상 사람들이 혐오하거나 때론 동정하는 발달장애인이 된다. 세상의 장애인식이 얼마나 차가운지 나는 아들을 낳고서야 알았다.
낯설어서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발달장애인이 낯설기 때문에 거리감이 생기고 마음의 방어벽이 생긴다. 하지만 일단 벽이 생긴 다음엔 사실상 게임 끝이다. 너와 나는 순식간에 다른 존재가 되고 너는 나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라는 이너서클(Inner Circle) 안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로 거기서부터, 단지 장애가 있을 뿐인 아들의 삶이 사회적 장애물에 가로막히는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한동안 글이 써지지 않았다. 창작의 고통인가. 그런 건 천재적인 글쟁이들에게서나 발견되는 줄 알았는데 무명작가인 나도 이런 고통을 겪다니. 설마 나도 20~30년 뒤엔 막 헤밍웨이 같은 대작가가 되고 그러는 거야? 허허허. 다행히 긴 터널을 지나고 다시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연히 KBS 예능 <신상출시 편스토랑>을 보았다. 배우 오윤아씨의 아들 민이가 일일 ‘달팽이 식당’ 서빙을 했다. 서빙하다 말고 배고픈 민이가 손님 식탁 위의 밥으로 손을 뻗으려다 오윤아씨에게 제지당했는데,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바로 이거지”라고 외쳤다. 민이의 발달장애를 잘 인지하는 손님들은 민이에게 화내는 대신 그 상황을 이해하고 넘겼다. 심지어 웃기도 했다. 아들도 민이와 비슷한 행동을 하다 나한테 제지당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때 아들에게 꽂히는 시선은 민이에게 꽂히는 시선과 사뭇 다르다. 하지만 민이 덕에 앞으로는 조금 다른 시선을, 관용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오윤아씨와 민이에게 고마운 이유다.
나도 열심히 쓸 거다. 못하는 것투성이인 내가 그나마 잘할 수 있는 글쓰기로 세상을 향해 이야기하는 걸 멈추지 않으려 한다. 2022년에는 더 좋은 네 번째 책으로, 2023년에는 첫 번째 책인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의 영화화로 세상을 향한 이야기를 이어가려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면, 그것도 발달장애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어나 동시에 여기저기서 자잘자잘한 이야기가 모아지면 단단히 굳은 세상의 장애인식도 바뀌지 않곤 못 배기겠지.
내가 바라는 건 아주 조촐하다. 내가 아들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내 아들을 바라보는 이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발달장애인의 투명한 매력에 푹 빠지는 사람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20~30년 뒤 언젠가는 장애인식 운운하며 글을 쓰는 사람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아들 걱정 없이 잘 죽고, 죽는 순간 “네 엄마라서 행복했어. 다음 생에도 엄마와 아들로 다시 만나자”고 새끼손가락 걸었으면 좋겠다. 조촐한 이 소망들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공손히 인사하는 아들 사진으로 마지막 칼럼을 끝맺는다. 6학년이 된 2021년에야 아들은 처음으로 ‘공손히 인사하기’에 성공했다. 속도는 느리지만 어쨌든 아들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글·사진 류승연 작가
*‘류승연의 더불어, 장애’를 이번호로 마칩니다. 이야기가 정책으로 실천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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