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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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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애 놀이터여야 할까

집 근처 놀이터마다 장애인이 함께할 수 있다면
등록 2021-06-05 11:49 수정 2021-06-09 01:48
동환이가 놀이터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동환이에게 조금 작은 놀이기구.

동환이가 놀이터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동환이에게 조금 작은 놀이기구.

스타트업을 시작한 이들이 종종 연락한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며 발달장애 아들의 엄마인 나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중 많은 사람이 ‘무장애 놀이터’를 얘기하는 걸 보니 한편으론 반갑고 한편으론 마음이 복잡한 양가감정이 생긴다.

‘무장애 놀이터’ 대표하는 게 휠체어그네 정도

먼저 변화의 흐름이 반갑다. 청년들이 앞장서 장애인 삶의 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그 놀라운 시대 변화가 반갑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조용한 한숨이 뒤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왜 무장애 놀이터일까. 처음부터 모든 놀이터 입구에 턱을 없애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놀이기구를 설계하면 그만인 것을.

한발 더 나가본다. 과연 무장애 놀이터를 만들면 장애인도 잘 이용할까? 그냥 다른 놀이터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놀이기구 등장에 비장애 어린이들만 신나는 건 아니고? ‘무장애 놀이터’라는 이름이 붙었을 때 이를 대표하는 게 현재로선 휠체어그네 정도인데 나는 그 효용성에 의문이 든다.

휠체어그네를 처음 본 장소는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이다. 휠체어가 들어갈 만큼 넓은 직사각형 공간이 줄에 매달려 있었다. 보통의 그네처럼 높지도 않았다. 내가 휠체어에 탄 초등학생 어린이가 되는 상상을 해봤다. 휠체어에 탄 나는 이 그네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타고 싶을까? 상상 속의 나는 안 타고 싶었다. 휠체어그네를 타는 순간 공원 안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릴 것이기에. 사람들은 신기한 눈으로 휠체어에 탄 채 앞뒤로 흔들거리는 나를 구경할 것이기에.

그러니까 이런 거다. 우리 가족은 주말에 대형 쇼핑몰을 다니곤 한다. 자주 다니는 쇼핑몰에 키즈존이 생겼다. 놀이기구는 미끄럼틀이 전부지만 아이들에겐 천국인 곳이다. 사회성 발달이 3살 수준인 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키즈존을 발견한 날, 아들은 엄마가 다른 곳으로 가버릴까봐 조급한 마음을 온 얼굴에 드러내며 키즈존을 향해 혼자 뛰어갔다.

보통 이런 경우 나는 그곳의 환경을 보고 머물 것인가 떠날 것인가를 결정한다. 몸무게 20㎏ 이하 영유아만 이용할 수 있는 튜브나 트램펄린에서 노는 환경이라면 얼른 아들을 달래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만, 이번처럼 튼튼한 마룻바닥에 튼튼한 나무 미끄럼틀이 있어 부모도 미끄럼틀에 함께 올라가는 환경이라면 마음껏 머물며 놀게 한다.

아들은 동생들과 뒤섞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한순간 사건이 발생했다. 신난 아들이 신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늘 그랬듯 제자리뛰기를 시작했다. 이럴 때의 아들은 제자리에서 위아래로 양발 뛰기만 하는 게 아니라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동시에 위아래로 껑충껑충 뛰는 놀라운 능력을 선보인다. 신난 아들이 이 놀라운 개인기를 시작했을 때다. 아들 옆에 있던 여성이 깜짝 놀라더니 손을 뻗어 아들 가슴을 밀어버렸다. 그래, 이해한다. 갑자기 옆에서 사람이 뛰면 놀랄 수 있다. 하지만 굳이 손을 뻗어 밀칠 필요까지 있었을까. 그래도 아직 아이인데…. 아들에게 죄가 있다면 갑자기 제자리에서 뛰어 그를 놀라게 한 것일 터. 이 부분이 오늘 이야기의 핵심이고 무장애 놀이터와도 연결되는 사안이다.

아들과 함께 살며 발달장애인 특유의 ‘상동행동’(같은 동작을 일정 기간 반복하는 것)에 익숙해지다보니 이제 난 공공장소에서 상동행동 중인 발달장애인을 만나도 아무렇지 않다. 상동행동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있기에 ‘특별한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떤 발달장애인은 다 컸어도 미끄럼틀을 좋아하고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기도 한다는 걸 키즈존의 그도 미리 알았다면 반응이 달랐을 것이다.

<뽀로로>에서 배우는 ‘특별한’ 노력

무장애 놀이터가 아니라 그냥 놀이터여야 한다. 집 가까이 하나씩 있는 놀이터마다 그곳에서 뛰노는 장애인이 함께 있으면 된다. 어디에나 있는 놀이터에 제자리뛰기를 하는 발달장애인이 있으면 되고, 휠체어 탄 어린이가 보통 그네에 앉아 바람을 느낄 수 있으면 된다. 그네나 시소의 의자가 허리를 받쳐주는 형태라면 그 기구들은 장애, 비장애 상관없이 누구나 탈 수 있다. 휠체어에서 놀이기구로 옮겨탈 때 부모가 안거나 도와주는 과정에 시선이 쏠리지 않겠냐고? 그런 풍경이 당연한 일상이 되면 아무도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런 풍경이 당연한 일상이 되려면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바로 이런 노력 말이다. 어린이 애니메이션 <뽀로로>에 새로운 친구가 들어왔는데 그 친구가 자폐성 펭귄이다. 가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뛴다. 청각이 예민해서 해리가 노래를 부르면 귀를 막기도 한다. “해리를 싫어해서가 아니구나. 해리 노래가 자폐 펭귄 귀에는 천둥 치는 소리처럼 들리는구나.” 만화를 보는 이들은 발달장애인의 이런 특성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것이다.

다른 유형의 장애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크롱이 다리를 다쳐 휠체어에 타자 뽀로로와 포비가 힘을 합쳐 크롱이 휠체어에서 그네로 옮겨탈 수 있도록 돕는다면 어떨까. 크롱이 편하게 타도록 에디가 나서서 그네를 의자 모양으로 바꾸고. 이런 만화를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어린이들은 장애공감력이 있는 어른으로 자라지 않을까? 아이들 TV를 같이 보곤 하는 부모에게도 자연스럽게 장애공감교육이 될 수 있고.

새로 짓는 게 아니라 편의 더하는 방법을

그런 사회에선 발달장애 어린이가 옆에서 상동행동을 할 때 놀라서 밀쳐내지 않을 것이고, 굳이 무장애 놀이터를 새로 짓기보다 기존 놀이터에 편의를 더할 방법을 고민할 것이다. 결국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그 방향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뭔가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내 마음만 조급한가보다.

글·사진 류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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