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인권 감수성이 중요한 시대다. 이젠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감수성 떨어지는 언행 한 번이면 곧바로 대중의 몰매를 맞는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는 국회의원만 해도 여럿이다.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장애 인권 교육을 받고, 직장에서도 의무교육을 받는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장애 인권 감수성, 정말 장애가 있든 없든 평등한 모두의 권리를 위해서인지 헷갈린다. 나와 똑같은 너의 권리를 위해서, 너처럼 소중한 나를 위해서 장애 인권 교육을 받고 감수성을 기르고 있는 것일까? 혹 우리는 학점을 모두 채워야만 졸업할 수 있는 대학교 필수전공 과목처럼 장애 인권 감수성마저 거치고 지나야 할 하나의 과제만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최근 장애 인권 강사로 활동하는 이들을 대거 만날 기회가 있었다.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소중한 기회. 요새도 ‘장애체험’을 요구하는 현장이 많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장애체험이 무엇인가. 특수교육학 용어 사전에 따르면 장애인이 되는 경험을 통해 장애인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장애체험이라 한다. 그러니까 눈을 가리고 지팡이를 짚은 채 걸어본다든지, 귀마개를 한 채 사람들과 소통한다든지, 휠체어를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오르는 것 등이 모두 장애체험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장애체험은 없어져야 한다. 장애체험이 ‘장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애초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를 내기 때문이다. 삶의 무게를 한 번의 재미로 격하시키기 때문이다.
강사들 말을 들어보니 주로 학교 현장에서 인권 강사를 섭외할 때 장애체험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감이 온다. 사실 학생은 공무원과 더불어 장애 인권 교육을 하는 게 힘든 주체 중 하나다. 공무원은 누가 와서 무슨 얘길 해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어 힘들고, 학생은 당장 수능 점수나 내신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에 장애니 인권 감수성이니 하는 주제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 힘들다. 이런 학생들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장애체험을 요구하는 학교 쪽 입장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다.
그런데 보자. 학교 쪽 요구를 받아들여 장애체험을 진행했다. 그렇게 1시간 또는 2시간의 특강이 끝나면 학생들은 ‘아~ 이제 장애인을 이해할 수 있어. 장애인도 나와 다를 것 없는 똑같은 사람이야’라고 느낄까.
오히려 그 반대다. 눈 가리고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 다니다 칠판에 부딪히면 친구들이 다 같이 웃음을 터트린다. 휠체어 방향 조절이 힘들어 벽에 부딪힌 뒤엔 마치 놀이동산 범퍼카를 타다 구석에 몰렸을 때처럼 힘으로 그 상태를 벗어나려 휠체어를 들썩인다.
장애가 없는 자신을 다행이라 여기다이런 체험을 마치고 난 뒤 소감을 적어낼 차례. 장애가 얼마나 불편한 것인지 알게 됐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장애의 불편함을 알게 된 학생들이지만 장애인의 삶, 그에 대한 이해는 없다. 오히려 장애가 없는 자신을 다행이라 여기게 됐다는 감사의 말은 잔뜩. 그렇게 일회성 장애체험이 끝난 뒤 학생들은 장애가 있는 사람 즉 장애인은, 장애가 없는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다른 존재라는 사실만 깊이 각인시킨다.
나 또한 아들이 발달장애인이 되면서 ‘장애가 있는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이 삶을 살면서 나는 크고 작은 별별 일을 겪었고 아직도 겪고 있고 앞으로도 겪을 건데, 그 모든 별별 일의 출발은 ‘잘못된 장애인식’이었다. 언제나 그것부터 시작이었다.
일회성 장애체험을 하고 난 이들은 장애가 얼마나 불편하고 안 좋은 것인지 몸으로 느낀다. 일부러 그러라고 경험할 기회를 주는 거니까 할 말이 없다. 그렇게 놀이 같은 체험을 끝내고 나면 장애는 불편한 것, 안 좋은 것, 한마디로 어둡고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런 어둡고 부정적인 것을 몸에 지니고 살아가는 장애인은 밝은 빛 속에서 꽃길만 걷고 싶은 나와는 다른 세계 사람이다. 우리는 같지 않다. 너와 나는 다르다. 우리는 (똑)같은 (인권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무의식에 그러한 장애인식이 자리잡는다. 그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장애체험이 없어져야 하는 이유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른 나라 사례를 듣고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주변 나라만 해도 어느 날 살면서 장애를 갖게 됐을 땐 어떻게 하면 되는지 고등 교과과정에서 가르친다고 한다. 장애 등록은 어디에서 어떻게 하고,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떤 재활을 통해 어떤 삶을 살면 되는지 한 번의 특강이 아니라 아예 공교육 과정에서 가르친다.
이런 환경 아래서는 장애가 살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당연한 일의 하나가 된다. 눈 감고 지팡이로 1분간 걸어볼 땐 알지 못했던 ‘장애가 있는 삶’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진다. 장애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 된다. 그렇게 되면 살면서 중도장애인이 되어도 “내 인생 끝났다”며 동굴 안에 갇히지 않아도 되고 가족의 삶마저 ‘장애도’에서 고립되지 않아도 된다.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장애가 있는 삶은 분명 장애가 없는 삶보다 불편한 게 사실이지만 불편한 부분은 지원받고 관리하며 살아가면 그만. 우리가 지향해야 할 장애인식도 이런 방향이어야 한다.
몇 년 전 지방교육청에 강연을 나갔을 때 관계자가 관내 복지관에서 진행 중인 장애체험을 소개하며 뿌듯해하던 기억이 있다. 장애인식 변화를 위해 애쓰는 노력을 알기에 차마 뭐라 하진 못하고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의도는 좋다. 하지만 좋은 의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는다. 조금 더 민감한 장애 인권 감수성이 필요한 때다.
류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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