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엔(n)번방’으로 알려진 텔레그램 집단 성착취·성폭력 사건에 대한 사회적 공분에 수사기관은 신상 공개를 내세우며 ‘강력처벌’하겠다고 대응해왔다. 그러나 2020년 10월 현재 수사 단계에서 신상이 공개된 가해자는 조주빈(24), 강훈(19), 이원호(19), 문형욱(24), 안승진(25), 남경읍(29), 배준환(37) 등 7명에 그친다. 앞으로도 수사·재판 진행 과정에서 신상이 공개되는 가해자를 더 보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신상이 공개된다고 하더라도 유죄가 확정된 이후, 그것도 가해자가 교정시설에 수감되면 출소 뒤에나 가능하며, 실제 신상 공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여전히 n번방을 드나들던 ‘26만 명’은 우리 주변에서 함께 살아갈 것이다.
성범죄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신상 공개는 수사 단계와 재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중 수사 단계에서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25조에 따라 검사와 사법경찰관이 성폭력범죄 피의자가 죄를 범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고 국민의 알 권리 보장, 피의자의 재범 방지 등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피의자의 신상정보 공개 처분을 내릴 수 있다. 신상 공개 처분이 내려지면 일반적으로 경찰에서 검찰로 송치되는 과정에서 피의자 신상을 외부에 공개한다. 피의자의 반발은 심하다. 강훈(19·일명 ‘부따’)은 신상정보 공개 처분 취소소송을 했다가 그 집행정치 신청은 기각됐고, 본안 소송이 진행중이다. 그는 헌법재판소에서 그 위헌 여부까지 따지려 한다.
언론에 알려지기 전 기소된 디지털성범죄자들의 신상정보 공개 여부는 법원이 판단한다. 법원은 선고할 때 성범죄자에 대해 부수적인 처분을 내릴 수 있다. 외부에 성범죄자 신상이 알려지는 보안 처분이 바로 ‘신상정보 공개·고지 명령’이다.
‘신상정보 공개’는 ‘성범죄자 알림이(e)’ 사이트에서 일반인 누구나 성범죄자의 각종 정보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신상정보 고지’는 성범죄자가 실제 거주하는 읍·면·동의 19살 미만 아동·청소년을 보호하는 세대주에게 우편이나 모바일(2020년 11월 시행)로, 아동청소년 보호기관에는 우편으로 고지하는 것을 말한다. 해당 정보는 열람만 되고 공유 등은 금지하지만 성범죄자의 이름, 주소 등 검색 조건이 다양해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성범죄 재판 때 피고인 쪽이 면제받기 위해 가장 애쓰는 처분인 이유다.
‘잼까츄’ 강아무개(20)의 1심 공판 중 피고인 가족과 변호사가 일반인 방청인의 기록물을 강탈하고 폭언했던 이유나, 강제추행 범죄로 재판받던 마아무개(49) 전 서울중앙지검 검사가 기자를 피해 법원에서 얼굴을 가리며 달리기하고 결심공판에서 재판부에 자식들을 위해 신상정보 공개·고지만은 말아달라고 읍소한 것 모두 신상정보 공개를 두려워해서였다. 가해자들도 자신의 신상정보는 소중하다.
그렇다면 피해자 입장은 어떠한가. 내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는 2011년부터 성인 대상 성범죄자에게도 적용된 신상정보 공개·고지 대상이 돼 출소 뒤 3년 동안 성범죄자 알림e에서 그 정보가 공개됐다. 스토킹 등 민형사상 소송이 여전히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나는 가해자 정보가 필요했는데, 성범죄자 알림e가 큰 도움이 됐다. 피해자 구제를 위해 가해자의 신상정보 공개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의견도 있지만 실제 피해자 입장에서는 유용할 수 있다.
‘복붙’한 재판부 판단에 관리 부실까지
그러나 재판부는 피고인 신상정보 공개·고지 명령에 소극적이다. 미성년자라면 그 대상이 아니고 성인이라 하더라도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판단하면 신상정보 공개·고지 명령을 면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이어지는 디지털성범죄 재판에서 피고인 대다수가 그렇게 면제받고 있다. 하지만 판결문에는 그 ‘특별한 사정’이 구체적으로 적시되지 않는다. 복사한 듯한 내용만 반복되는데 내용은 이렇다.
“피고인은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전혀 없고, 피고인에 대한 형벌과 신상정보 등록 및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만으로도 어느 정도 재범을 방지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밖에 피고인의 연령, 직업, 환경, 가족관계, 사회적 유대관계, 이 사건 범행의 경위와 수단 및 결과, 공개 명령 또는 고지 명령으로 인하여 피고인이 입을 불이익의 정도와 예상되는 부작용, 그로 인해 달성할 수 있는 성폭력범죄의 예방 효과와 피해자 보호 효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피고인의 신상정보를 공개·고지하여서는 아니 될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판단된다.”
10월12일 국정감사에서 신상 공개 대상 성범죄자 관리에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김진애 의원실(열린민주당)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2020년 9월 말 기준 신상정보 등록 대상 성범죄자는 9만1141명이고, 그중 공개 대상자는 4260명이다. 문제는 13.9%에 해당하는 595명이 ‘성범죄자 알림e’ 서비스 시도별 총합에서 찾아보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실명 검색이 아닌 이상 해당 성범죄자의 신상정보를 확인할 길이 없다. 해외출국, 주거불상, 주거부정의 경우에는 신상 공개가 사실상 무의미하다. 공개 대상 성범죄가 아닌 다른 범죄로 수감 중일 때도 공개 명령이 중단되지 않아 그 취지를 살리지 못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게다가 신상정보 공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법무부와 여성가족부가 맡지만, 정보가 부정확하거나 변경 사유가 즉시 반영되지 않기도 한다.
신상 공개 대상 정보 범위와 성범죄 종류 등은 계속 변한다. 올해 출소하는 조두순은 현재 성범죄자 신상 공개 시스템에 상세 주소를 공개할 수 없다. 그는 과거 법률을 적용받기 때문이다. 그의 신상정보 열람 범위는 읍·면·동 수준이다. 성범죄자의 상세 주소(건물번호 등)가 공개 대상에 포함된 것은 2013년이다. 손정우는 신상정보 공개·고지 명령 대상에서 제외됐다. 당시만 하더라도 성착취물을 구매·소지·시청·배포·판매한 사람은 신상정보 공개·고지 대상이 아니었고 2020년 11월부터 가능해진다.
가해자의 신상정보 공개의 의미
현재 진행 중인 디지털성범죄 사건 대부분은 피고인 신상정보 공개·고지가 면제된 상태에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다. 공개·고지가 된다고 하더라도 출소 뒤에나 가능해질 것이기에 그때쯤이면 대중의 뇌리에서 가해자들은 지워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전국을 돌며 방청하고 피고인 정보를 기억·기록하고 있다. 가해자들은 잊힐 권리가 없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 여성긴급전화1366으로 연락하면 불법 영상물 삭제, 심층 심리치료, 상담·수사, 무료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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