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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영수증] 비로소 알코올 ‘플렉스’

파도 소리 들으며 하이볼 한 잔, 무엇이 아까우랴
등록 2020-07-12 21:04 수정 2020-07-17 09:33
부산에서 공수해 온 라임과 텃밭에서 딴 민트로 만든 모히토.

부산에서 공수해 온 라임과 텃밭에서 딴 민트로 만든 모히토.

최근 우리 부부는 새롭게 취미 생활을 시작했다. 바로 집에서 칵테일 만들기. 둘 다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맛있는 음식에 어울리는 술을 곁들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대중교통이 잘 발달하지 않은 시골에선 술을 마신 뒤 직접 운전해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하니, 술 한잔 밖에서 마시기 어렵다. 젊은 사람들이 즐겨 찾을 만한, 매력 있고 분위기 좋은 감성주점도 많지 않다. 그러니 밥이든 술이든 집에서 해결할 때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칵테일 만들기에 푹 빠졌다. 영상을 보며 하나씩 따라 해보니 만드는 법이 의외로 간단했다.

그러나 시골에선 술을 구하는 일부터 도전이다. 다양한 수입 주류를 취급하는 대형마트나 주류 전문 매장이 없다. 주류라서 인터넷 구매도 불가능하다. 어렵사리 술을 구했다고 한들, 갈 길이 멀다. 칵테일 부재료로 자주 쓰이는 레몬이나 라임 역시 찾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파는 곳이 거의 없다. 칵테일마다 그에 어울리는 잔을 구하는 게 사치로 느껴지기도 한다. 예쁜 잔을 사려고 읍내 ‘천원숍’을 둘러봐도, 도시보다 매장 규모가 작고 상품이 다양하게 있지 않아 개중에 그나마 괜찮은 잔을 고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볼일 보러 부산이나 순천 등 인근 도시에 갈 때마다, 칵테일 재료를 사기 위해 대형마트를 찾는다. 당연히 가계 지출이 커졌다.

따져볼수록 ‘칵테일 만들기’는 시골 생활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취미지만, 그 덕에 칵테일 한잔에 더 큰 즐거움이 담긴다. 도시에 살 때는 칵테일을 마실 수 있는 곳이 도처에 있지만 정작 마셔본 일은 몇 번 없었다. 그런데 칵테일이 귀해지고 나서야, 그 한잔에 담긴 맛과 재미를 제대로 찾아 즐기게 됐다.

해가 지고 나면 별달리 할 게 없어 심심한 시골에서, 우리 부부는 거실 테이블에 앉아 하이볼·진토닉·다이키리 등 생전 처음 마셔보는 칵테일을 하나씩 직접 만들어본다. 얼음 상태나 재료 배합 비율에 따라 맛이 미묘하게 달라지니, 나에게 맞는 레시피를 찾아가며 내 취향을 알아간다. 칵테일마다 담긴 역사를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매일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에선 일하느라 바빠 ‘취미’라고 할 게 없던 무색무취의 생활이었는데, 이제는 둘이서 함께 즐기는 취미가 생겼다. 어설프고 서툴지만, ‘취미’라는 단어가 가진 뜻 그대로 완벽하고 멋질 필요 없이 그저 우리가 즐거우면 충분하다. 그러다 언젠가 능숙해지면 누군가를 초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걸어서 집에 갈 수 있는 분들만 맘 편히 찾겠지만 말이다.

시골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재미-예를 들어 산에서 직접 고사리를 캐어 고사리파스타를 만들어 먹는 일, 더운 날이면 잠깐 걸어서 계곡이나 바다에 가는 일 등-를 맘껏 즐길 뿐만 아니라, 칵테일 만들기처럼 시골에서 손쉽게 누리기 어려운 일을 만들어가는 것도 시골 생활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지 않을까. 해가 지고 나면 가로등 불빛과 파도 소리만 남는 시골 마을에서 나만의 칵테일 한잔을 만드는 시간이 더 즐거울 뿐이다.

글·사진 권진영 생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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