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공부가 머니?>에 나온 한 부모는 14살 아들의 영어 성적이 걱정이다. 빵점이다. 세 살 때부터 영어유치원 보내고 개인교습도 시킨 애다. 국어, 영어 등 학원 8곳을 돌리며 키웠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알파벳을 떼고 미국인과 대화했던 아이는 어느 순간 말문을 닫아버렸다. 부모는 그때 다 내려놓았다고 했다. 아닌 거 같다. 아이가 나은 뒤 부부가 직접 가르친다. 아이는 “영어라면 하얗게 잊어버렸다”며 “아무래도 내가 리셋해버린 거 같다”고 말했다.
공부 못하면 사람대접 못 받을 것 같은 불안
왜 그렇게 일찍 사교육을 시작했느냐 물으니 엄마는 이렇게 답했다. “시댁이 다들 박사까지 공부해 교수예요. 얘가 장손이에요. 태어나자마자 시어머니는 집안에 판사가 없으니 얘를 판사로 키우자고 하셨어요. 제가 노력하면 될 거 같았어요.” 아이는 군인이 되고 싶다. 엄마는 군대에서 판사 하란다. 전문가 패널들은 아이를 지지하고 기다려주라더니 곧 영어 공부법과 계획표를 제안한다.
이승욱·신희경 등이 쓴 책 <대한민국 부모>엔 자기 불안과 욕망을 자식에게 투사하면서 사랑이라고 말하는 부모가 수두룩이 등장한다. 옛 엄마들이 시가에서 사람대접 받으려면 아들이 필요했듯이, 가부장제 안에서 지금 엄마들의 지위는 아이 성적에 따라 달라진다. 집안 전체의 욕망을 대리해 엄마들은 사감의 책임을 진다. 어디서부터 아이의 욕망이고 어디까지 부모의 욕망인지 한 몸으로 얽혀든다. 아이가 집안에 판사 만들어주려고 태어났나? 당신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로 대접받을 때 사랑이라고 느끼나? 존엄한 존재라고 느끼나?
그 부모의 불안, 이해한다. 공부 못하면 사람대접 못 받을 것 같은 불안에 나도 학창 시절 내내 시달렸다. 부모가 압박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학원을 5개씩 다니는 한 초등학교 4학년 아이에게 “네 마음대로 시간표를 짤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래도 학원은 다녀야죠. 그것도 안 하면 나중에 취직 못해요.” 그 애를 붙들고 내 설움에 울고 싶었다. “경쟁사회니 어쩔 수 없어.” <공부가 머니?>에서 부모가 아이들을 대안학교에 보내겠다니 할아버지는 공부를 시켜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 사회 누가 만들었나? 왜 어른이 만들고 아이보고 고통을 감내하라고 하나? 만들었으면 바꿀 수도 있지 않나? 바꾸기 위해 뭘 했나?
인간 뇌의 가장 큰 특징은 유연성이라고 뇌과학자 게랄트 휘터는 책 <존엄하게 산다는 것>에 썼다. 인간이 지닌 어마어마한 학습 능력의 비결이기도 하다. 망아지는 말이 되는 데 필요한 뉴런(신경세포)의 패턴(양식)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니 자궁 밖에 나오자마자 일어서고 뛴다. 막 태어난 아기 뇌엔 고정된 패턴이 없다. 양육자, 공동체와 교류 속에서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된다. 자주 쓰는 뉴런의 연결망은 강화되고 패턴을 형성한다. 패턴들이 모여 상위 패턴을 만든다. 그게 자아상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가리키는 자아상은 불확실한 세계 속에 내적 질서를 잡을 수 있도록 나침반이 된다.
타인과 연결 속에서만 안전
“인간은 ‘존엄의 감각’을 가지고 태어난다.” 휘터는 이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아기의 뇌 안에 ‘존엄의 씨앗’이 이미 있다고 했다.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려면 불일치 상태를 비교할 정상 상태를 알아야 한다. 아이는 그 ‘정상적인 상태’를 알려주는 미세한 감정, 주관적인 감각을 가지고 태어난다. (중략)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 할 인간이 하나의 수단으로 취급받을 때 몸에 문제가 생기면 활성화되는 영역과 같은 곳이 활성화된다.” 존엄의 씨앗은 아이가 공동체 안에서 애정과 안전을 느끼고 자신의 주체성과 몸의 자율성을 경험하며 ‘자아상’으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반대로 그 씨앗은 말라죽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무엇을 배우고, 어떤 능력을 가져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지시받으며 자라온 사람이 대체 무슨 능력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에 관심이 있고 즐거워하는지, 인생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더 나아가서는 어떤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지를 스스로 알아내겠는가.” 자신의 존엄을 잃으면 타인도 존엄하게 대할 수 없다.
30년 넘게 트라우마를 연구해온 베셀 반 데어 콜크는 책 <몸은 기억한다>에서 “정신건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한 가지만 꼽는다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썼다. “중요한 것은 ‘상호 의존’으로, 주변 사람들이 나와 나의 말을 제대로 보고 듣고 있으며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마음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지독히도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타인과 연결 속에서만 안전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은 그 연결을 타인의 몸짓에 조응하며 몸으로 느껴야 한다. 춤, 노래, 연극으로 인류는 오랜 세월 함께 두려움을 넘어왔다. “합창과 체육 수업, 쉬는 시간, 몸을 움직이고 뛰놀고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은 아이들 교육과정에서 절대 배제되지 말아야 한다.”
보건복지부가 9~17살 2219명에게 행복도를 조사한 ‘2018년 아동실태조사’를 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만족도는 7.6점인데 한국은 6.6점으로 꼴찌다. 응답한 어린이와 청소년의 70.2%가 “시간이 부족하다”고 했다. 공부 때문이란다. ‘방과후 희망 활동’으로 32.7%가 ‘친구들과 놀기’를 꼽았지만 그중 13.8%가 실제 그렇게 보낸다고 답했다.
단지 아름다움만을 강조한 노인
게랄트 휘터는 열한 살 즈음에 처음 배움의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동네 숲에서 길 잃은 한 노인을 만났다. 만날 오는 숲인데 그 노인과 함께 걷는 길은 달랐다. 노인은 잡초 이름까지 하나하나 알려줬다. “다른 어른들 역시 그 동식물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해줬다. 다만 그들은 주로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중략) 이 신사는 달랐다. 그는 똑같은 동식물을 가리키며 우리가 보고 듣는 이 모든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단지 그 아름다움만을 강조했던 것이다.”
아이는 자기 자신으로 살며 세상의 아름다움을 탐험하려 태어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탐험은 타인과 연결 속에 안전하다고 느낄 때 시작된다. 중년이 된 지금도 나는 도둑맞은 내 유년을 돌려달라고 누구라도 붙들고 소송이라도 내고 싶다.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대신 이기는 데만 골몰했던 나는 여전히 삶이 무섭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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