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아이들이 궁금했던 까닭은 외롭기 때문인 거 같다. 이제 어른이 됐겠구나. ‘집콕’이 전문 분야인 나도 몇 주째 개랑만 지내다보니 사람이 그립다. 40대 중반이 되니, 누가 내 시간을 뭉텅이로 훔쳐간 것 같다. 황당해서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뭔가 ‘중요한 것’을 놓쳤다.
이 사람들은 그 ‘중요한 것’을 고3 때 배웠다. 2017년 다큐 <땐뽀걸즈>에 나왔던 거제여자상업고등학교 ‘땐뽀’(댄스스포츠) 동아리 학생들이다. 수학 시험 시간에 몇 번으로 다 찍고 잤는지는 헷갈려도 차차차, 자이브 스텝을 외는 데는 철저했던 아이들과 동아리를 이끈 이규호 선생님이 경진대회에서 입상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별 이야기 아닌 거 같은데, 보다보면 눈물이 줄줄 난다. 세 번 볼 때마다 그랬다. 그때마다 개가 달려들어 짭짤한 내 눈물과 콧물을 간식으로 핥아먹었다.
“내가 학교에서 제일 웃는 시간이 뭔지 아나? 체육 시간에 춤출 때가 제일 재밌다. 엄청 재밌어. 근데 엄청 힘들어.” 새벽 2시30분,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18살 김현빈은 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큐 속 김현빈은 보증금 200만원, 월세 65만원짜리 집에서 언니와 둘이 살았다. 친구들은 현빈이 왜 연습에 자주 빠지는지 몰랐다. 현빈은 수업 시간에 잤고 수학여행을 가지 않았다. 그가 사정을 털어놓은 한 사람이 이규호 선생님이었다. 올해 21살 어른이 된 현빈은 고깃집 실장으로 일한다. 보증금 300만원, 월세 35만원짜리 원룸에 혼자 산다. “저는 행복해질 사람이에요.”
<땐뽀걸즈>에서 내가 어김없이 우는 순간은 이규호 선생님이 현빈에게 숙취해소제를 건네는 장면이다. “친구는 옆에 있을 뿐이고 제 삶은 제가 짊어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사정을 이야기할 사람이 없으니 술로 풀었던 거 같아요. 숙취해소제를 받으며 선생님이 저를 이해하고 생각해주시는 걸 느꼈어요. 선생님은 제 이야기를 친구이자 부모처럼 받아주셨어요.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론 네가 만들어가면 된다’고 말씀해주셨어요.”
할머니 손에 자란 현빈은 중학교 3학년부터 아르바이트했다. 일, 학교, 일, 학교… 사는 일이 급했다. 학교를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그랬던 그가 서빙하는 틈틈이 스텝 연습을 했다. “땐뽀 시간은 저만의 희락이었던 거 같아요. 조금 더 해보고 싶고, 조금 더 잘하고 싶고. 제가 김현빈이라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시간. 일 압박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아이처럼 보낼 수 있는 시간. 사람 때문에 제일 소중했던 시간.”
쉽지 않았다. 현빈은 아르바이트와 연습 둘을 놓고 24시간 저글링을 해야 했다. 대회가 가까워지면서 멤버들은 지치고 예민해졌다. 하루는 반장 시영이 화가 났다. 대회를 이틀 남긴 밤, 연습이 부족한데 현빈이 아르바이트를 가야 했기 때문이다. 시영 아버지가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이기도 했다. 거제 조선업이 기울면서 아버지는 창업 준비를 하려고 서울 조리학원에 등록했다. 그날 밤에도 시영은 연습하는 데 남았던 터였다. 쓴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울다가도 시영과 아이들은 현빈의 깜짝 생일파티를 준비했다. 나는 울고 개는 눈물맛에 좋다고 날뛰는 장면이다. “최대한 연습해서 아이들한테 미안하지 않을 정도로 해야 하는데…. 저한테 화도 많이 났어요. 몸은 하나인데 두 가지를 해야 하니까 저 자신과의 싸움이었던 거 같아요. 동아리 애들하고 선생님 때문에 버텼어요. 저 하나 때문에 다 무너질 수 있으니까요. ‘내가 이 정도도 못하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겠니’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선생님이 항상 잘할 수 있다고 해주셨어요. 저를 믿는 걸 알고 있었어요. 경진대회 입상했을 때 ‘선생님이랑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잘했구나’ 그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현빈은 이제 춤추지 않는다. “저는 춤보다 그때 그 사람들을 좋아했던 거 같아요.” 낮 12시부터 밤 12시까지 하루 12시간씩 일한다.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밤 9시 이후엔 배달용 포장을 한다. “계획이 있어요. 열심히 배워서 이 고깃집 2호점을 내는 게 제 목표예요. 어릴 때는 부모님 손 잡고 다니는 아이들 보면 마음이… 이제는 그런 생각이 안 들어요. 제가 단단해졌어요. 더 행복하게 열심히 살 거예요.” “어리광 피울 시기를 놓쳤다”는 현빈은 여전히 웬만한 일은 혼자 짊어지고 간다. “선생님한테는 힘든 일 이야기하기도 해요. ‘이미 닥친 일, 이겨내면 되는 거니까’라고 그러세요.”
땐뽀 동아리 멤버였던 박지현(21)은 여섯 달 전부터 부산에서 영업직으로 일하고 있다. 땐뽀 동아리 활동을 하기 전에는 지각, 조퇴, 결석을 많이 했다. “원래 인문계에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 뜻에 따라 상업고등학교에 갔어요. 낙이 없었어요. ‘늦게 일어났네, 어쩔 수 없지’ 이런 마음이었어요. 학교 그만둘까도 고민했어요. 땐뽀 동아리는 이력서에 한 줄 써볼까 해서 들어갔는데 갈수록 저한테 소중해졌어요. 점점 더 책임감을 느끼겠더라고요. 사실 남들이 보면 별거 아니잖아요. 학교 동아리일 뿐인데. 그런데 그때 우리는 정말 진심이고 최선이었어요. 누구도 대충 하지 않는다는 거, 그렇게 뭘 같이 하면서 무대를 채우는 게 뿌듯했어요. 다 힘들고 노력했던 거 우리가 제일 잘 아니까 입상했을 때 정말 행복했어요. 동아리 시작하면서 지각, 조퇴도 안 했어요. 제가 그러면 그 말이 동아리 담당인 이규호 선생님한테 전해질 텐데 그게 싫었어요. 우리 모두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항상 우리 편에서 이해해주셨거든요.”
그가 졸업하고 이규호 선생님이 학교로 부른 적이 있다. 후배들 연습을 봐달라고 했다. “‘너 잘하니까 봐줘’ 그러시는 거예요. 후배들한테 저를 이렇게 소개하셨어요. ‘멋진 언니.’ 별거 아닌데 이런 기억이 마음에 깊이 남더라고요.”
“저한테 선생님은 햇빛 같은 사람이에요.”(김현빈) 이들은 타인의 스텝을 읽고 내 몸을 맞추는 법, 나를 믿어주는 너를 위해 춤추는 법을 배웠다. 학창 시절 내내 문제 하나 더 맞히겠다고, 너보다 더 잘난 내가 되겠다고 발버둥쳤던 나는 40년 넘게 허방 짚었다. 결국 불안하다. 새해 소망이 있다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면 나도 ‘땐뽀’ 할 수 있기를.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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