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과 카드 2개까지 사라졌다. 슈퍼마켓 갔다 왔더니 모두 없다. 더 황당한 건 내가 나한테 전화할 수 없다는 거다. 집에 전화기가 없다. 동네에서 공중전화를 본 적이 없다. 혼자 사니 부탁할 사람이 없다. 25년 된 아파트로 이사 온 지 2년이 넘었지만 옆집 사람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졸지에 이 세상에 내 존재도 없는 거 같다. 슈퍼마켓까지 두 번 왕복하고 온 집을 뒤집어엎은 뒤 분홍색 종량제 봉지 앞에 널브러져 앉아 있었다. 개 몽덕이가 내 발가락을 핥았다.
옆집, 경비실, 편의점… 아는 사람이 없다
일단 나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 누군가 받을지도 모른다. 컴퓨터에 카카오톡을 내려받아 친구들에게 부탁해보려 했다. 거의 다 됐는데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나라는 걸 인증하란다. 휴대전화로. 통신사 사이트에 들어가 분실 신고하고 위치추적을 하려 했다. 회원 가입하란다. 나라는 걸 인증하란다. 휴대전화로. 인증받지 못한 나는 정신이 혼미했다. 누군가 카드를 긁고 있을지 모른다. 통장에 얼마 없는 건 이럴 땐 다행이다. “어떻게 하지, 몽덕아?” 개가 고개를 갸웃했다. 집을 다 뒤지니 현금 5천원이 나왔다.
옆집 문을 두드릴 생각은 못했다. 아는 얼굴이 간절했다. 아! 경비아저씨. 경비실에 달려갔다. 빈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아! 편의점 주인아줌마. 매일 아침 여기서 캔커피를 사며 안면 튼 이 동네 유일한 지인이다. 저녁 7시, 야간 알바생이 컵라면을 정리하고 있다. “청년” 입만 달싹거리다 나왔다. 그 말고 부탁할 사람이 없다는 게 창피했던 거 같다. 관리사무소에 갔더니 문이 잠겼다. 더럽게 외로웠다. 촉감이 만져지고 무게가 느껴지는 외로움이었다.
멀리 사는 사람들은 도움이 안 됐다. 연락할 방법이 없다. 지금, 여기 당장 손잡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개 몽덕이가 ‘이 여자, 왜 이리 서성이나’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맞다, 개! 이 동네엔 나는 몰라도 몽덕이를 아는 사람들은 있다. 웰시코기 팡이, 사랑이 지극한 보호자가 쐐주는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즐기는 여왕이다. 언제나 행복한 비숑 뭉치, 벤치에 앉아 있는 걸 좋아하는 뽀미…. 일단 개에게 목줄을 채웠다. 몽덕이가 갈색 엉덩이를 흔들며 아파트 복도를 걸어나갔다.
보인다. 저 길 끝에서 그토록 바라던 아는 얼굴이 걸어왔다. 장군이다. 20㎏짜리 잉글리시불도그 장군이는 완력을 부리기는커녕 걷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개다. 얼굴에 주름이 잔뜩 잡혀 있고 머리가 크다. 얼룩덜룩한 덩치가 헥헥거리며 느리게 걷는다. 침을 질질 흘리며 내게 오고 있다. 생긴 것만 용맹해서 억울한 개다. 그 억울한 개를 향해 나는 달렸다. “장군아!” 장군이 엄마 휴대전화로 카드를 정지했다. 사라진 휴대전화로 전화했는데 신호음만 울렸다. 하소연했다. 하소연은 뒷담화만큼 정신건강에 좋았다. ‘얼마나 놀랐냐’는 말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50대인 장군이 엄마는 개를 째려보는 시선 때문에 속앓이가 심하다고 했다. 장군이는 부정교합 탓에 잘 씹지 못한단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불안이 줄었다. 이 동네에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줄 사람이 한 명은 있는 거다.
허기는 먹방으로 채워지지 않아
이튿날엔 장맛비가 쏟아졌다. 누구에게라도 가닿으려면 휴대전화가 필요했다. 대리점 청년은 심드렁했다. “이 폰 못 찾는다고 보시면 돼요. 그냥 새로 하시죠.”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러겠다고 했더니 동사무소에서 임시 주민등록증을 받아오란다. 우산 속으로 비가 들이쳤다. 동사무소에서 발열 체크하고 명부에 이름을 썼다. 번호표를 받고 앉으니, 사진을 가져오란다. 빗방울로 따귀를 맞으며 집에 돌아와 사진을 챙겨 다시 동사무소로 갔다. 발열 체크해주는 직원이 쳐다봤다. “또 오셨어요?” 창구에 앉아 가방을 열었다. 사진 대신 개 몽덕이 똥봉지가 나온다. 다른 가방이다. 장맛비처럼 울고 싶었다.
임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아 대리점에 다시 가니, 청년이 이번엔 친절했다. 어마어마한 화소로 사진을 찍는다는 전화기, 어마어마한 줌으로 먼 거리 물체를 끌어당긴다는 전화기들을 보여줬다. 바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신발 속으로 들어갔다. 그냥 그가 추천하는 전화기를 골랐다. 새 전화기는 5세대(5G) 이동통신이라 요금이 올랐다. 나라는 걸 인증받으려면 내야 하는 세금이 됐다. 청년이 이것저것 휴대전화 설정을 해줬다. 아무래도 못할 거 같았나보다. 앱까지 깔아주겠다고 구글 계정을 물었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넣었다. “본인 인증을 위한 질문”이 나왔다. 언젠가 내가 설정해놓은 질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돈, 땡. 개, 땡. 나는 대체 뭘 좋아하는 걸까?
수도권에서만 평생 산 나는 ‘우리 동네’를 가져본 적이 없다. 2년마다 전세금에 쫓겨 이사 다녔다. 회사 다닐 땐 오피스텔에서 잠만 잤다. 그 오피스텔에서 옆집 사람을 만난 적은 없는데 그의 TV 시청 취향은 안다. 벽이 얇았다. 예전엔 장이라도 자주 봤는데 코로나19 때문에 그마저도 줄어 택배를 받는다. 오다가다 안면 트기는 더 어려워졌다. 내가 사는 곳에서 관계 속 나를 물리적으로 확인할 기회가 점점 사라졌다. 그런데 슬프게도 사람이 위로받는 순간, 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관계를 손으로 만져볼 수 있을 때다. 카톡으로 대신할 수 없다. 허기가 유튜브 먹방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어른이나 애나 똑같다. “우리 뇌의 회로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기능에 집중되어 있다. 트라우마로부터 회복되려면 같은 인류, 다른 사람들과의 (재)연결이 필요하다. …우리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진정시키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다른 사람과 접촉하고, 포옹하고 가볍게 달래주는 손길을 느끼는 것이다.”(베셀 반 데어 콜크, <몸은 기억한다>)
새로운 이웃의 번호를 입력하다
새 휴대전화 연락처에 장군이 엄마 전화번호와 주소를 입력했다. 장군이 엄마가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달려오라고 동호수를 적어줬다. 며칠 뒤 몽덕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왔는데 동그란 안경을 쓴 동네 꼬마 준우가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며 물었다. “개 몇 살이에요?” “제가 공 던져봐도 돼요?” 준우가 노란색 테니스공을 던지자 몽덕이가 달려가 잡아왔다. 그 뒤부터 준우는 몽덕이를 ‘공 잡은 개’라고 부르며 나한테 인사한다. 동네 아이랑 말을 트고 나니 이 동네에 사는 사람으로 인증받은 기분이 들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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