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뼈 빼고 다 빼드립니다.” 동네 전신주마다 광고 전단이 붙어 있다. 살은 자기 관리 실패의 은유가 됐다. 몸무게뿐만 아니라 존재의 가치까지 재버리는 체중계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나는 이곳에서 배척당하지 않을 수 있는 몸인가? 불안은 강력한 통제 수단이다. 미술비평 쪽 박사과정을 밟는 신지유(39·가명)씨는 거식증이라는 “몸과의 전쟁, 실은 마음과의 전쟁”을 오래 치렀다. 치료에 9년이 걸렸다. 이제 “자신과 친구가 됐다”고 말한다. 그는 지성으로 자신을 분석했고, 용기로 대면했으며, 결국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 지난했던 과정을 솔직하게 나눠줬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가락뼈부터 봐요. 관절이 살에 얼마나 파묻혔나, 혈관이 뚜렷하게 보이나. 체중계에 올라가면 되는데 객관적 지표를 보는 게 두려워서 이러는 거예요. 이제는 여기 머물러 있지 않아요. 손가락 살이 쪄 보여도 “괜찮아” 할 수 있어요. 생각의 경직성이 풀어진 거 같아요. 거식증에 완치란 없다고 생각해요. 재발률도 높고요. 문제를 일으킨 사고방식이 쌓여온 시간보다 치유의 시간이 짧으니까요. 다루며 살아가는 거죠. 내가 극복해간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괜찮아’란 개념이 들어왔기 때문이에요. 마르지 않아도 괜찮아. 마른 몸에 초연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괜찮아. 완치되지 않아도 괜찮아….
살 자격을 묻다
마른 몸은 상징이었어요. 처음엔 사랑받을 수 있는 자격이었어요. 나중엔 모든 것의 자격 조건이 돼버렸어요. 사회에서 존재해도 되는 자격, 말할 수 있는 자격… 그런 자격을 획득하는 데 방해가 되는 식욕은 반드시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살 자격이란 질문 자체가 틀린 건데, ‘소중한 존재가 아닌 나는 왜 살아야 하지’ 같은 생각이 드니 자격 조건을 찾았던 거 같아요.
다섯 살 때 이미 알았어요. 부모님에겐 사랑받을 수 없구나. 사랑받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이니까 다른 곳에서 찾아봤어요. 신데렐라같이 동화에 나오는 남녀의 연애를 사랑의 전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사랑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엄마는 뚱뚱했어요. 그래서 아빠가 싫어하나보다 생각했죠. 큰언니는 연예인 하라고 명함 받을 정도로 예뻤어요. 편지, 선물도 많이 받았죠. ‘날씬하고 예쁘면 사랑받는구나’ 그런 도식이 생겼어요.
게다가 음식과의 관계가 좋지 않게 설정됐어요. 가족 안에서 소통으로 관계를 다질 수 없었어요. 대신 음식을 주고, 먹으면서 가족이란 걸 확인했죠.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빠는 쭉 외도했어요. ‘아빠가 떠나면 어떻게 하지’ 불안한데 모른 척 연기해야 했어요. 엄마는 정서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쭉 키웠어요. 집에 전화가 오면 엄마가 예민해져요. 아빠 애인일까 해서요. 예닐곱 살 때 전화를 받았는데 누가 걸었는지 확인하지 못했어요. 엄마가 “왜 놓쳤냐”면서 때렸어요. 그러고는 울지 말라며 엄마가 만두를 줬어요. 그걸 거절하면 안 돼요. 음식은 관계 회복을 위해 먹어야 하는 거였어요. 동시에 힘들 때 즉각 위안을 주는 유일한 것이기도 했죠. 그렇게 열 살 때 47㎏까지 쪘어요.
학교에 가니 부모에게서 받을 수 없는 사랑을 어떻게 하면 선생님이나 아이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지 알게 됐어요. 공부 잘하기와 아이들 웃기기였어요. ‘내가 뭘 하고 싶은가’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하면 사랑을 얻겠구나’를 알게 된 거예요. 점점 내가 뭘 원하는지 못 듣는 사람이 돼갔어요. 그때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겠지만요.
내가 사라져버린 공허감
중학교 때부터 폭식과 절식을 반복했어요. 거식증은 폭식증과 하나이니까요. 링도넛 12개를 10분 안에 먹어요. 창피하니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먹어요. 맛을 느끼는 게 아니에요. 식이장애는 전반적으로 흐르는 공허감 때문에 발현되는 거라서 언제든 먹을 수 있어요. 폭식은 절식으로 이어지는데 절식할 땐 하루 50㎉ 이하로 먹어요. 시금치, 양배추 데친 것 정도만 먹어요. 키가 168㎝인데 몸무게가 37㎏까지 떨어졌어요. 스물다섯 살 때 어머니가 심장수술을 하셨어요. 11층 1인실에 계셨는데 병실에 앉아 있지 않고 1층부터 거기까지 계속 왔다 갔다 해요. 대학원 강의 들을 때도 몸의 한 부분을 계속 움직여요. 조금이라도 칼로리를 소모하려고요.
대학원 다닐 때 식이장애가 심각해졌어요. 사회로 나가야 하는 두려움이 생겼던 거 같아요. 불특정 다수에게 어떻게 사랑받을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뭐든 극단적으로 했어요. 몸무게 줄이기도 극단적으로 가버렸어요.
생각의 왜곡이 심해졌어요. ‘먹는다/먹지 않는다’와 연결된 이분법과 강박증이 생활 전반에 스며들었어요. 엄마가 때를 밀어달라고 하면 등껍질을 밀어버려요. 자꾸 밀면 뭐가 나오니까. ‘이게 나오면 안 되는데’에 매달리는 거죠. 글을 쓰려 해도 노트북을 못 열어요. 일단 열면 되게 잘해야 해요.
사랑받지 못했을 때 오는 불안이 있어요. 얼마나 예뻐지면 안 불안할까. 판빙빙 정도 돼야 할 것 같아요. 얼마나 부자가 돼야 안 불안할까. 일론 머스크 정도 돼야 안정감이 들 것 같은 거예요. 사람의 욕구는 스프링 같은 거라 눌러놓으면 더 튀어올라요.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려고 극단적으로 노력하다보니 동시에 반사회적이 되고 싶은 마음도 커졌어요.
비밀이 너무 많았어요. 몰래 먹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숨겨야 해요. 멋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니까. 분노도 숨겨야 해요. 내가 지키고 싶은 이미지에 위배되는 것은 다 감춰야 해요. 살이 빠지니 인기가 생겼는데 관계는 왜곡됐어요. 내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착취했어요. 상대한테 ‘이래도 사랑할 거야’ 같은 정신적 차력을 요구하고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거는 굉장히 비굴하다고 생각했어요. 도도해 보이지만 사실 버려질 걸 항상 준비했던 거예요. 내 자리가 없으면 잃어버릴 것도 없으니까요. 진짜 나와 외부의 내가 분리됐어요. 내 자신이 흐릿해지는 느낌이 실제로 들어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비굴한 것
주변 사람들이 내 욕구의 샌드백이 돼갔어요. 내 안의 공허나 분노를 인정하기 싫으니까 상대가 그렇다고 투사해요. ‘네가 분노하는 거잖아, 나 아니야 너야’ 이렇게 반사하는 거예요. 남을 지적하면 나는 순수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으니까요. 결국엔 그 공격을 다 자신에게 퍼붓게 돼요. 상대를 비난해봤자 이게 투사라는 걸, 뻥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죠.
강박증, 예민함, 불안… 중심엔 통제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내 몸, 사람들이 날 대하는 방식, 모든 걸요. 그 바탕엔 공허함이 있었어요. 내가 없는 듯한 느낌이에요. 내가 뭘 해야 할지, 뭘 느껴야 할지 몰라요. ‘내가 되고 싶은’ 나보다 ‘남이 원하는’ 내가 되려 했기에 기준이 외부에 있었어요. 그래서 내부를 알아차릴 수 없게 돼버렸어요. 생리적인 거까지 못 알아차릴 정도였어요. 예전엔 누기 직전까지 오줌이 마려운 줄 몰랐어요. 신발 때문에 발에 피가 나도 하루 종일 걸어요. 공허해서 나를 못 알아차리고 내가 없어서 공허해지는 사이클을 돌아요. 먹는 순간엔 내가 존재하는 걸 확인할 수 있으니 배가 터지게 먹어요. ‘뭘 하고 싶다’가 없으니 ‘실수하면 안 돼’만 남아요. 이 삶은 실수 아니면 통과인 거예요. 타율에 따라 살다보니 자율이 사라져버렸어요.
키 168㎝에 체중 37㎏이 되면 너무 추워요. 형광등 불빛이 너무 눈 부셔서 방에 촛불을 켜고 있어요. 어느 날 물 마시러 가는데 눈을 떠보니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요. 제가 “엄마 너무 아파” 울면서 웃고 있는 거예요. 울면서 웃는 이 상태가 내가 생각해도 정말 이상했어요. 그래서 정신과에 가게 됐어요. 그동안엔 거식증을 인정하기보다 의지력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뭔가 주도권을 놓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병원을 네 번 옮겨다녔어요. 9년에 걸쳐 시행착오를 겪었어요. 살이 가리는 그 아래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트라우마가 있어요. 하지만 이제 시간이 흘러 그 결핍은 부모의 사랑으로 채울 수 없어요. 심리적 왜곡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된 핵심 명제는 세 가지였어요. ‘나는 이대로 충분하다. 법을 어기거나 악의를 실현하는 일이 아니면 나는 무엇이든 해도 된다. 나는 나다.’
인지행동치료로 현재에 머물며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요. 뭘 알아차리냐 하면 전부 다요. “괜찮아?” 나한테 계속 물어요.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욜로’랑은 달라요. 의지를 발휘하는 게 마음에 드는지, 그 정도는 괜찮은지도 물어요. 몸이 어떻게 느끼는지 그저 바라보는 명상을 했어요. 핵심은 가치판단 없이 보는 거예요.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가치판단도 일단 유보하려고 해요. 그러니 자신과 타인을 수용하는 게 덜 어려워졌어요. 판단을 덜 하니 용서할 일 자체가 줄었어요.
정신과 선생님께 이런 걸 물은 적이 있어요. “대상포진에 걸렸는데 수영 강습에 갈까요? 안 가면 수영 선생님이 실망할 거 같은데.”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아무렇게나 하셔도 돼요.” 내가 그랬죠. “잘못되면 어떻게 해요.” “그때 바로잡으면 돼요.”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왜 해요.” “바보 같은 짓 하면 안 돼요?” 뭐든지 해도 되는데 뭘 해도 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하여간 그날 수영 강습에 안 갔어요. 사소한 것부터 해보니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도 큰일이 벌어지지 않더라고요.
바보 같은 짓 하면 안 돼요?
여전히 내 목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제 느끼고, 생각하고, 화장실 가고 싶고, 배부르고, 배불러도 더 먹고 싶고, 살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내가 있다는 걸 아니까 살 자격이란 문제도 해결됐어요. 아무거나 해도 되니까 아무 존재여도 되는 거예요. 현재의 나로 머물 자격이 있는 거예요. 진짜 작은 것들이 쌓이며 알게 됐어요. ‘이게 어쩔 수 없는 나구나. 어쩔 수 없는 나라도 괜찮구나.’ ‘나라는 게 있는 거야’라고 생각하니 공허감이 사라져갔어요. 사랑받지 못한 공허감 때문에 내가 누군지 몰랐는데 내가 누군지 알게 되면서 굳이 사랑에 연연하지 않게 된 거예요. 나를 인정하니까 욕구에 솔직해져요. 내 한계를 수용하니 타인의 한계도 수용하게 돼요.
내가 나랑 친하지 않을 때 외로운 거 같아요. 나랑 친하다는 게 내가 뭘 원하는지, 뭘 필요로 하는지, 그걸 못 해주면 왜 못 해주는지 아는 정도예요. “괜찮아?” “어때?” 물어보고 얘기 많이 나누고 그러면 친구인 거죠. 나 자신과 친구가 되니 관계에 여유가 생겨요. 왜냐면 나한테는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줄, 나라는 친구가 있거든요.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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