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언니, 남편이 교순데 이혼하잔데. 객관적으로 봤을 때 언니가 문제야. 열심히 사는 건 좋은데 여자로서 도통 꾸미지 않아. 쉰 된 여자가 화장도 안 해. 그러니 남편 입장에선 싫증 안 나?”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 <결혼작사 이혼작곡>에서 이 ‘작가 언니’와 함께 일하는 아나운서 부혜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게 무슨 쌍팔년도 대사인가, 욕하면서 보고 있다. 이 대사는 내 이성으로는 창피해서 인정할 수 없는, 하지만 내 안에 깊숙이 스며든 두려움을 자극한다. 못생기면 사랑받지 못할 거고, 사랑받지 못하면 내 가치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공포 말이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 같은 말을 듣고 자란 세대라 더 그럴 테다. 그런 협박이 사라진 거 같진 않다. “아이고, 딸이라 더 속상하시겠어요.” 한 프로그램에서 여자아이가 사촌오빠랑 놀다 얼굴을 긁혔더니 진행자가 이렇게 말했다. 왜 ‘더’ 속상한가?
사랑은 언감생심, 멸시만 당하지 않아도 다행이다. 나는 때로 마스크가 좋다. 가릴 수 있어서다. 얼굴에 여드름이 돋으면 주변 호의의 온도가 바뀐다. 나에 대한 내 친절도 달라진다. 뾰루지 따위에 내 가치가 휘둘릴지 모른다는 불안을 드러내선 안 된다. ‘그런 사소한 것’에 발끈하는 찌질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 사소한 것’ 때문에 20년 동안 잊지 못하는 말을 들어도 그렇다.
바다로 엠티 가는 길, 차 안에서 한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창문 열고 얼굴 소독 좀 해.” 내 마음속 ‘데스노트’에 20년간 자기 이름이 있다는 걸 그는 모를 거다. 개 몽덕이 맹견으로 교육 중이고 언젠가 그에게 파견할 거다. 그런데 나는 피해자이기만 한가? 나도 남을, 또 나 자신을, 바로 그 시선으로 훑고 줄 세운다.
‘기준’을 맞추지 않았을 때 당할 모멸을 알기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그 시선으로 통제한다. 통제당했던 사람이 통제하는 사람이 된다. 김정은(25)씨는 미간을 찡그리는 엄마의 표정을 알고 있다. 딸들의 몸무게가 늘거나 피부에 뾰루지가 났을 때다. 정은씨가 지독히 싫어하는 표정이다. 엄마는 “여자는 머릿결, 피부, 귀티가 중요하다”고 정은씨가 어릴 때부터 말했다. “대학에 들어간 뒤 ‘탈코르셋’을 했어요. 자유로워지고 싶어서요. 그런데 제가 그만두지 못한 게 있어요. 샤워하면서 제 배를 확인하는 거요. 제 가치가 체중과 연결된 거 같아요. 뚱뚱해지면 사회에서 열외로 될 것 같아요.” 정은씨는 공기에 밥을 많이 펐다 싶으면 반을 덜어낸다. “화장을 쉽게 그만둘 수 있었던 건 제 피부가 좋은 편이기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해요. 또 꾸미면 진지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겼는데 그 또한 가부장적 시선을 내면화한 것은 아닌지 고민돼요.”
자의적일수록, 일상적일수록, 욕망이 될수록‘아름다움’만큼 효과적인 통제 도구가 없다. 모멸만큼 강력한 협박 도구도 없다. 기준이 자의적일수록, 일상적일수록, 욕망이 될수록 통제 효과는 커진다. 통제당하는 사람이 알아서 스스로 일상을 감시해주니 말이다. 왜 44사이즈여야 하나? 이유가 없다. 뭐가 됐든 기준을 어길 경우, 처벌은 강력하다. 책 <말하는 몸>에서 “뚱뚱하다”는 대학생 이나연은 중학생 때 몸이 닿기만 해도 더럽다는 듯 털어내던 같은 반 아이를 기억한다. 음식을 먹는 모든 순간, 내면에 장착돼버린 CCTV가 돌아간다. 기준이 유동적일수록 맞추는 데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어떤 사람이 무서운가? 언제 화낼지 모를 사람이다.
몸은 자아의 전시장이라 ‘개성’이 드러나야 하지만 ‘기준’을 벗어나선 안 된다. ‘관리 실패’는 무능을 드러내는 것이니 모욕과 자기혐오를 할 거리가 된다. 그런데 또 너무 관리하면 ‘성괴’라고 욕먹는다. 자기관리 하라고 옥죄면서 최고 미덕으로 꼽는 건 ‘자연미인’이다. 어쩌라고. 공포는 ‘돈’이 된다.
함인희는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몸의 ‘식민화’ 현상 연구를 위한 탐색’이란 글에서 몸이 자본의 ‘식민지’가 됐다고 썼다. 1960년대부터 2003년까지 월간지 <여성동아> 광고를 훑어보니, 피부 등 몸 관리 관련 광고가 1972~73년에 18개이던 게 2001년엔 220개로 늘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다이어트 광고가 폭발해, 1991년 12개에서 2001년에는 104개로 뛰었다. 나오미 울프는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라는 책에서 “아름다움의 이미지는 여성의 진보를 가로막는 정치적 무기”라고 썼다. “외부의 승인에 취약한 상태”가 된다. 이젠 남성도 자기 전시의 압박에서 예외가 아니다.
치장하고 싶은 게 잘못인가? 나오미 울프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치장해야만 한다면 치장하는 자유도 잃게 된다는 거다. 문제는 선택의 권리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오미 울프나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쓴 김원영이 제시하는 ‘해법’은 모호해 보인다. ‘결단’이다. ‘아름다움’을 재정의하겠다는 결단, 내가 내 아름다움을 발견하겠다는 결단, 세상이 나를 존엄하지 않게 대하더라도 나를 존엄한 존재로 선언하겠다는 결단, 내 몸의 자유를 누리겠다는 결단, 그리고 이런 결단을 서로 부추겨주는 연대라고 한다. 멋있는 말이지만, 그 결단은 매 순간 흔들릴 거다. 매 순간 질 거 같다. 그런데 질 줄 알면서도 애써보는 수밖에 뾰족한 방법이 없다. 자기한테까지 미움받으며 살기는 싫으니까.
무엇보다, 내가 갈망하는 건 내 고유함을 알아봐주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개별성을 봐주지 못하는 사랑이 사랑인가? 44사이즈가 되어서만 얻을 수 있는 사랑이라면 애초에 사랑인가? 개별성을 알아보는 데는, 몸에 스민 그 사람의 이야기를 탐지해내는 데 집중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두 여자의 사랑은 서로를 오래 바라보는 데서 시작한다(두 사람은 맹인이 아니므로 시각을 이용한다).
화가 마리안은 엘로이즈를 집중해서 관찰할 수밖에 없다. 엘로이즈 몰래 초상화를 그려야 한다. 마리안이 처음 완성한 초상화를 보고 엘로이즈는 “이건 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마리안은 “그림에는 관습과 규칙이 있다”고 답한다. 둘이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은 이럴 때다. 마리안이 엘로이즈에게 말한다. “너는 당황할 때 입술을 깨물고, 화가 나면 눈을 깜박이지 않아.” 엘로이즈가 마리안에게 말한다. “너는 평정심을 잃으면 눈썹이 올라가고 당황하면 입으로 숨을 쉬지.” 시간이 지날수록 초상화는 엘로이즈를 닮아간다. 두 사람의 시선은 평등하게 오고 가고 사랑은 “평등함이 주는 평화” 속에서만 가능하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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