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 달 전 겨울, 할머니가 쓰러졌다. 경기도 용인 20평 빌라에서 홀로 사는 94살 할머니는 목욕하고 나오다 정신을 잃었다. 뇌졸중이었다. 반신마비가 왔다. 비누 냄새가 나던 깔끔한 할머니는 기저귀를 찼다. 할머니가 누리는 공간은 의료용 침대로 좁아졌다. 언어장애로 발음이 흐물흐물해졌지만 할머니 뜻은 명확했다. ‘병원에 가지 않겠다.’
이른 목련이 피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용인까지 길이 막혔다. 세 시간 넘도록 도로에 갇혔다. 72살 엄마는 오줌을 참느라 진을 뺐다. 요양보호사는 한 시간 전 퇴근했다. 홀로 우리를 기다리던 할머니는 화가 났다. “엄마, 점심 드셔야지.” 69살 이모가 손바닥만 한 접시에 반찬 두어 가지를 담았다. 밥은 한두 숟가락만 펐다. 할머니는 밥상을 밀쳤지만 접시만 반 바퀴 돌았다. “엄마, 그럼 만두 드실래?” 분노보다 만두다. 할머니는 만두를 두 개 먹었다. “엄마, 다음에 또 만들어 올까?”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가 방에서 나오며 웃었다. “엄마가 애가 된 거 같아.” 내가 방으로 들어가니 틀니를 빼서 입이 홀쭉해진 할머니가 뭐라고 한다. 웅얼웅얼하는 소리지만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안다. ‘밥 먹어라.’
할머니는 바뀌었지만, 바뀌지 않았다. 처음 취직하고 10년 동안 할머니랑 둘이 살았다. 그동안 할머니랑 나눈 대화는 거의 이 두 문장을 맴돌았다. “밥 먹어야.” “배불러요.” 할머니는 의지가 강하다. “밥 먹어야.” “배불러요.” “감자 먹어야.” “배부르다니까요.” “고구마 먹어야.” “아이 씨, 배부르다니까요.” 내가 뭔가를 먹을 때까지 조삼모사를 멈추지 않았다. 하루는 할머니랑 부모님이랑 중국집에 갔는데, 나랑 부모님 사이에 날 선 말들이 오갔다. 나는 씩씩거리며 자장면을 하나도 먹지 않았다. 그 자리에 맨숭맨숭 앉아만 있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말했다. “자장면 안 먹었지. 집에 가서 밥 먹어야.”
할머니는 여전히 할머니였다. 내 옷장엔 할머니가 짜준 목도리가 10개는 넘는다. 겨울마다 떴다. 어깨가 결려 아파도 떴다. 레이스뜨기로 별도 만들었다. 할머니가 뜬 수많은 별은 이집 저집 식탁 유리 밑에 깔렸고 옷장에 처박혔다. 가족이 이제 그만 뜨라고 무안을 줘도 떴다.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인 할머니는 지금도 매주 조금씩 더 움직였다. 보조변기를 쓰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도전’에 자식들은 위험하다고 정색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기저귀를 벗고 보조변기 앉기에 성공했다.
두 달이 가기 전 하나둘 손든 자식들72살 요양보호사는 “할머니가 좋다”고 했다. 보조변기 도전 때, 요양보호사와 할머니가 같이 넘어진 적이 있었다. “저한테 미안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이지은 등이 쓴 책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를 보면, 돌봄을 받는 사람은 대상이 아니라 이 관계의 한 주체다. 그래서 보건 전문가 알라나 샤이크는 ‘어떻게 나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준비를 하고 있는가’라는 테드(TED) 강연에서 좀더 관대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는 연습을 미리 한다고 했다. 기억을 잃은 뒤에도 그 태도가 드러날 만큼 자기 삶 속에 깊이 뿌리박히도록 말이다.
할머니 방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모, 엄마와 나는 좁은 거실에서 사과를 깎아 먹었다. 우리끼리 이야기하다 웃기도 했다. 서향집으로 오후 햇살이 깊숙이 들어왔다. 정전협정에 따른 평화다. 할머니가 쓰러진 직후엔 자식들이 돌아가며 간병했다. 정부 보조로는 요양보호사가 하루에 4시간밖에 머물지 못했다. 두 달이 가기 전에 60대 후반~70대인 자식들이 하나둘 손들었다. 의견은 둘로 갈렸다. 할머니 뜻에 따라 끝까지 집에서 돌봐야 한다는 쪽은 그나마 젊은 축이었다. 나머지는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전문 인력이 있는 요양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코로나19 탓에 요양병원 쪽이 밀렸다. 요양보호사 근무를 하루 8시간으로 늘리고 비용은 자식들이 갹출하기로 했다. 엄마는 이 ‘평화’가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묻는다. 한 달에 내야 할 요양보호사 임금만 150만원, 비용이 걱정이다.
할머니가 쓰러지고 얼마 안 돼 처음으로 기저귀 찬 할머니를 봤을 때, 나는 화가 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할머니의 유일한 소망은 자기 손으로 밥해 먹다 죽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매일 기도했다. 공부하고 싶었던 할머니는 여자라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다. 6·25전쟁 통에 피란하다 큰딸을 낳았다. 아이 여섯을 키웠다. 남편은 모든 사람에게 지나치게 호인이었다. 할머니는 딱 하나를 신에게 빌었지만 할머니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욕창 방지 매트 위에 누운 할머니 다리가 앙상했다. 그날 나는 침대 위로 기어올라 할머니 옆에 누웠다. 할머니가 움직일 수 있는 오른팔을 휘휘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더니 내 어깨 위로 내려놓았다. 나는 그 품에 몸을 동그랗게 말아 넣었다. 할머니는 할머니이고 손녀는 새치가 나도 손녀다.
죽음학의 대가이자 호스피스 운동의 어머니로 불리는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삶의 목표는 성장”이라고 했다. 그 최종 목표 지점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임사 체험 증언 2만 건을 분석한 그는 사람이 죽은 뒤 맞닥뜨리는 마지막 질문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고 또 받았는가”라고 했다. 곤경에 처할 때마다 그 어려움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던 그는 마지막 역경을 겪으며 책 <생의 수레바퀴>를 썼다. 70살에 뇌졸중 발작을 여섯 차례 겪고 24시간 간호를 받아야 했다. “나는 지금 인내와 순종을 배우고 있다. 우연은 없다.”
할머니는 어떤 성장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화가 난 나는 성장 따위는 하고 싶지도 않다. 아마 나는 상실 연습을 하는 중일 거다. 사실 평생에 걸쳐 상실을 소화하는 법을 연마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40년 넘게 유급 중이다. 어쩌면 그 기간 중년에 몰려올 상실에 대처하도록 맷집을 길러야 했는지 모르겠다. 한 번도 부재를 상상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친구는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 친구 아버지 장례를 치르던 지난 3월 눈이 내렸다. 친구가 말했다. “마음이, 마음이 텅 비어버린 거 같아.” 나는 상실을 받아들이는 데 성공하지 못할 거다. 할머니 품에서 여전히 아이처럼 운다. “절대로, 절대로 내 곁을 떠나지 말아요.”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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