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활동보조인하고 10년째 거의 같이 살고 있어요. 우리 활동보조인은 장애운동을 전혀 모르는 분이었어. 시위는 저 때문에 처음 가봤대요. 경찰이 쫙 둘러치고 있으니 너무 무서웠대요. 지금은 경찰이 장애여성들 끌어내면 자기가 나가서 싸워. 제가 제발 연행되지 않게 조심 좀 하시라 그래요.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니 맞춰가는 게 쉽지 않았죠. 저는 배고픈 거 잘 못 느끼는데 보조인은 배고픈 거 못 참고, 이런 작은 거로 싸우죠. 존중하는 관계는 서로 많이 얘기하고 들으며 만들어가는 거 같아요.
65살이 겁나요2007년 활동보조를 처음 받았을 땐, 하루 4시간이었어요. 잠자리에 눕혀주고 갔어요. 저는 무슨 일이 생겨도 피할 수 없잖아요. 전화기만 꼭 쥐고 있죠. 온 신경이 민감해져요. 그때 집이 반지하였어요. 비가 많이 오는 날은 무서웠어요. 2005년 겨울, 경남 함양에서 한 중증장애인이 집 수도관이 터져 자기 집에서 동사했거든요. 그 공포를 그대로 느끼는 거예요.
장애등급에 따라 활동보조 시간이 결정돼요. 장애 정도를 1~6급으로 나누는 장애등급제가 있었죠. 지난해부터는 경·중증으로 나눠요. 경계가 있다는 건 그전과 같아요.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불안하죠. 의사한테 내가 뭘 못하는지 증명해야 해요. 나는 혼자 밥 먹을 수 없는데 의사가 할 수 있다고 하면 할 수 있는 게 돼버려요. 몸은 사회적이에요. 예산이 줄고 활동보조 기준이 강화되면 저는 할 수 없는 게 더 많은 몸이 되죠.
2018년 죽기 직전까지 갔어요. 제가 폐기능이 약해요. 점심 먹다 가래가 기도에 걸려 숨을 못 쉬었어요. 활동보조인이 119에 신고했죠. 인공호흡기 쓰고 중환자실에 있다 한 달 만에 퇴원했어요. 그 뒤부터 인공호흡기를 쓰고 자야 해요. 그런데 제가 65살이 되면 24시간 활동보조를 못 받을 가능성이 커요. 65살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이 적용돼요. 방문요양 지원만 하루 최대 4시간 받을 수 있죠. 노인은 사회활동이 없는 사람 취급하니까요. 제 몸은 더 중증일 건데요. 지금 이걸 바꾸려고 싸우고 있어요.
당신은 아프지도 늙지도 장애인도 되지 마요2018년 중환자실에서 깨어나 창밖을 봤어요. 10월이었어요. 나는 뭘 위해 다시 살게 된 걸까 생각했어요. 12월 경찰서에서 조사받으러 오래요. 2017년 6월 서울 지하철 신길역에서 리프트 사고로 한 장애인이 추락해 숨졌어요. 그때 제가 지하철 점거 투쟁에 참여했거든요. 아파서 경찰서 못 간다니까 경찰 두 명이 집으로 왔어요. 내 인생이 참, 어쩌다 죽다 살아나도 여전히 조사를 받고 있나. 경찰이 “시민들 발을 묶고 폐를 끼치면서 해야 하냐” 그래요. 제가 그랬어요. “불편했던 분들한테 미안하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들 모르니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 죽어야 하니까, 우리는 해야 한다.”
얼굴에 침 뱉는 사람들도 있었죠. 2001년 지하철 오이도역에서 노인이 추락해 숨지고 2002년부터 장애인 이동권 보장 투쟁이 벌어졌어요. 우리가 지하철 연착 투쟁을 했어요. 휠체어 타고 줄줄이 타니 한 역에서 30분씩 걸렸죠. 그때 인텔리로 보이는 한 남자가 우릴 보고 말했어요. “우리나라는 집단이기주의가 문제야.” 제가 그랬어요. “선생님, 제발 아프지도 말고 늙지도 말고 장애인도 되지 말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 있나요?
동지들이 연행당하는 날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어요. 집 근처 다 와서 맥주 사서 혼자 마셨어요. 맥주는 집에서 5분 거리에서만 마셔요. 아이고, 오줌 마려워서 다른 데선 안 돼요.
지치기도 하죠.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아침엔 이동권 투쟁, 오후엔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투쟁, 저녁엔 활동보조제도 투쟁을 했어요. 경찰하고 대치하다 연행돼 경찰서에서 하룻밤 자고 그러면서 살았어요. 안 할 수가 없는 이유는, 너무 약이 오르는 거야. 공무원들 만나면 한 번도 “해봅시다” 한 적이 없어요. 요즘엔 공무원 만나면 제가 처음부터 이야기해요, 제발 안 된다는 말은 빼고 하자고요.
어디 갔다 왔는지 알려 하지 마라1남4녀 중 맏이예요. 3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대요.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다녔어요. 그때 장애인은 으레 그랬어요. 25살 때까지 강원도 동해 집에만 있었어요. 삼촌들이 읽던 옛날 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엄마가 동생들 보라고 할부로 세계문학전집을 들여놨는데 동생들은 안 보고 제가 다 읽었어요. 가을에 코스모스가 피면 ‘나는 내년에도 여기서 이걸 보고 있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죠. 톨스토이의 을 읽고 고민했어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서양문학을 이해하려면 성경을 알아야 할 거 같았어요. 성경 공부를 하다 부산에 있는 장애여성공동체 ‘사랑의 고리’를 알게 됐죠. 편지만 주고받았는데 어느 날 그곳 언니 두 명이 동해까지 왔어요. 저를 업고 부산에 갔죠. 처음 동해 밖으로 나가본 거예요. 그곳 신부님이 그랬죠. “존재하는 모든 것엔 이유가 있다.” 여기 인연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빗장을 여는 사람들’로 이어졌고요. ‘빗장’에서 만난 정영란, 박순천과 함께 서울 고덕동에 반지하방을 얻어 부모님 집에서 독립했어요. 셋 다 중증장애인이죠. 1997년, 제가 36살 때였어요.
우리를 제일 힘들게 한 건 “왜 나와 살아?” “왜 시설에 안 들어가?” 이런 질문들이었어요. “내 인생 내 맘대로 살고 싶다.” 그 말 말고는 답할 말이 없었어요. 셋이 약속했어요. ‘오늘 내가 연락 안 하고 늦게 들어오더라도 어디 갔다 왔는지 알려고 하지 마라.’ 하하. ‘나를 관리하려고 하지 마.’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독립이었어요. 셋 다 중증이라 밥 한 번 차려먹기도 힘들었죠. 밥 겨우 먹으려는데 물컵이 없어요. 물컵 가져오는 데 30분 걸려. 그 와중에 텔레마케터로 일하고 검정고시 공부도 했어요.
그 고덕동 집에 사람들이 계속 들고 났어요. 너~무 외롭지 않았어요. 하하. 장애여성 6명, 비장애여성 3명이 여성학 세미나를 시작했어요. 장애여성들 이야기 들으며 알게 됐죠. 여성이라 더 교육 못 받는구나. 성폭력 당해도 어디 가서 호소할 데도 없구나. 출산하러 병원에 가면 그 몸에 애를 가졌다고 욕먹어요. 아이 둘과 장애인 남편이 있는 한 장애여성은 일상적으로 비장애인 남성들한테 이런 말을 들었어요. “밤일 어떻게 해?”
나는 뭘 할 수 있지? 전화 잘 걸잖아!장애여성 조직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고덕동 모임이 1998년 장애여성공감으로 이어졌죠. 저는 실무 능력도 없고 아주 중증이잖아.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전화 걸고 얘기 듣는 거 잘하더라고요. 집 안에만 있는 장애여성들을 불러내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누가 어떤 상황인지 다 알고 회원 담당 간사를 하다 대표까지 맡게 됐어요. 장애여성공감을 알려야 하니까 여기저기 토론회 쫓아다니고 손 들고 질문했어요.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녔는데 지하철 리프트가 그렇게 무서웠어요. 리프트는 수동휠체어에 맞춘 거라 손가락 까딱 잘못 조정했다간 휠체어가 쭉 미끄러져요. 벌벌 떨면서 다녔어. 절실했어요.
그때만 해도 장애여성 성폭력은 아예 없는 얘기 취급당하던 시절이에요. 장애여성하고 하룻밤 자면 놀음판에서 돈을 딴다는 이야기가 돌아, 시장에서 일하는 장애여성을 갑자기 차에 실어가는 일도 벌어졌어요. 우리가 처음 장애여성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했어요. 제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상담원 교육을 받았어요. 아, 그때도 화장실을 못 가서 종일 오줌을 참았네요. 2001년 ‘공감’이 장애여성성폭력상담소를 전국에 열었어요.
저 어릴 때 엄마가 점을 한 번 봤는데, 역마살 있다 그랬대요. 그땐 말도 안 된다 그랬는데 맞았어요. 하하. 제가 할 수 있는 거 하다보니 자꾸 대표를 맡게 됐어요.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에서 공동대표를 했어요. 사람들이 처음엔 절 대표로 잘 인정하지 않았어요. 경찰들도 그냥 예쁘장한 여자, 얼굴마담인가보다 그런 식이에요. 그래서 제가 보통 땐 수다 좋아하는데 협상 들어가면 말을 잘 안 해요. 말할 땐 악역을 맡아요. 나중에 경찰들이 저보고 “제일 못됐다”고 했어요. 하하.
2007년 장애여성공감을 떠나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가 됐는데 민주노동당이 갈라지면서 무산됐고요. 이후 진보신당 부대표를 했어요. 제도를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느껴 시작했는데 참 힘들었어요. 정치가 뭔지 몰랐거든요. 다양한 계층이 정치를 훈련할 기회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제일 감사한 건 관계예요. 그 속에서 제가 성장했어요.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일 수 있는 거 같아요. ‘웬수’ 같아도 동지는 서로 봐주게 돼요. 좋은 사람 많이 만났어요. 제 삶을 지지해주고 함께 같은 길을 가주는 사람들 말이에요. 제가 사람을 많이 사랑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누가 아프면 제 마음이 아파요. 공감력이 제 장점인 거 같아요. 그걸 계속 지키려고 노력해요. 존재감이 없을 때 제일 힘들어요.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를 때. 저는 닥치는 대로 열심히 하려고 했어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제 마음이 가는 곳에 갔어요.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
머리 하얘진 동지들과 뒷담화하고 싶어요“네가 비장애인이었다면” 이런 말 많이 들어요. 그런데 제가 비장애인이었다면 무슨 역할을 했을지 잘 모르겠어요. 제 몸이 제 정체성이에요. 장애를 가진 여성의 몸이기 때문에 지금 제가 된 거예요. 장애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죠. 저는 계단을 못 올라가니 계단 있는 길은 저한텐 없는 거예요. 저는 산책 나가려면 30분 이상 걸려요. 그걸 너무 지겨워하면 저는 못 사는 거예요. 몸을 사랑한다, 안 사랑한다 없이 그냥 살아요. 나는 나가려면 30분 이상 걸리는 사람이다, 지금 상황은 이렇다, 그리고 나갈지 말지 결정하는 거죠.
나이 들수록 몸이 변하는 걸 매일 느껴요. 저는 뒷담화하는 노인이 되고 싶어요. 하하. 사무실 구석에서 머리 하얘진 동지들과 뒷담화하고 싶어요. ‘저 노인들 또 왔네’ 욕해도 이면지도 걷어주고 하면서. ‘우리 땐 안 그랬는데 젊은것들은’ 이러면서.
김소민 자유기고가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크레인 동원해 ‘관저 차벽’ 치운다…경호처 저항 땐 장기전 돌입
‘윤석열 체포’ 운명의 날…경호처, 충돌 불사
설 민생지원금 1인당 50만원까지…지자체, 내수경제 띄우기
경호처 강경파·국힘 ‘관저 사수’ 최후 응전…직원들은 ‘동요’
‘KBS 이사장 해임 취소’ 항소한 윤석열…최상목 패싱했나
추미애 “윤석열 2022년 여름 휴가 때 김건희 해군함정서 술파티”
윤석열 ‘고발사주’ 무혐의, 내란의 싹 키웠다
민간인 윤갑근의 경호처 직원 ‘집합’…“경호관이 경찰관 체포 가능”
‘명태균, 윤석열·김건희와 소통’ 담긴 107쪽 검찰 수사보고서 공개
[단독] ‘월 500’ 김용현 군인연금 재수령 신청…사직하자마자 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