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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규의 시험과 답] 인간이 바이러스와 싸우는 법

바이러스는 약자를 드러냈고 인간이 본래 가진 보살핌의 마음도 같이 드러냈다
등록 2020-04-13 23:16 수정 2020-05-03 04:29
우리 집 창문에 붙은 무지개와 앞집 무지개. 

우리 집 창문에 붙은 무지개와 앞집 무지개. 

3월 23일 영국은 록다운(이동 제한)을 선언했다. 정부는 다음 네 경우가 아니면 집에 있으라고 명했다. △생필품 구입 △1일 1회 운동 △치료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필수 직종 업무. 이런 이유로 외출하더라도 타인과는 2m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식료품점과 약국을 제외한 모든 가게가 폐쇄됐다. 나는 장기간 봉쇄에 대비해 쌀을 사고 김치를 담갔다.

창문에 뜬 무지개

앞집 창문에 무지개 그림이 붙었다. 초등학교 다니는 그 집 딸이 그린 게 틀림없다. 나도 무지개를 그려서 창문에 붙였다. 그 집에서 우리 집 창문이 보일 테니, 아이는 곧 내 무지개를 볼 것이다. 그 아이도 즐거웠으면 좋겠다.

한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아서 보지 못했다. 창문에 무지개가 떠 있는 집이 한두 곳이 아니다. 다들 어린이 솜씨다. 어른이 그린 것은, 각도기와 자를 써서 색깔별로 등간격을 유지하는 우리 집 무지개밖에 없는 것 같다.

알고 보니 우리 골목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영국 전역에 무지개가 떴다. 영국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와 다른 유럽의 도시에서도 아이들이 붙여놓은 무지개를 볼 수 있단다. 밖에 나가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시작한 일이 운동처럼 번졌다. 사람들은 정부 구호를 함께 붙였다. “집에 있어라. NHS(국가보건서비스)를 지켜라. 생명을 구하라.”(Stay Home. Protect the NHS. Save Lives.) 영국 정부는 표어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이 구호도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유명한 말 “침착해라, 그리고 견뎌나가라”(Keep Calm and Carry On)처럼 언젠가 역사적인 인용문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 지금 의료진을 돕고 생명을 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돌아다니지 않고 집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 집에 있으면서 다른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을 궁리한다. 감사, 격려, 연대의 의지를 보여주는 작은 일들은 무지개 그림 말고도 여럿 있다.

박수와 환호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갔다. 어스름한 저녁, 집집마다 문 앞에 사람들이 나와서 힘차게 박수를 쳤다. 각자 현관 위 센서등이 켜지는 바람에 박수 치는 사람들이 마치 무대 위 배우처럼 보였다.

뉴스에서 들은 것이 생각났다. 매주 목요일 저녁 8시 집 앞에 나와서 NHS 의료진을 지지하는 박수를 치자고 한 것 같다. 이것도 누군가 제안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빠르게 제안이 번졌고, 나처럼 아날로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조차 텔레비전 뉴스로 전달됐다.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집들에서 사람들이 나와 박수를 치는데 마치 의사, 간호사, 응급요원, 앰뷸런스 기사 등 수많은 병원 근무자가 길 한가운데 서서 인사를 받는 것 같았다.

이웃 노인 안부 묻기

다음날 뉴스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이 박수갈채를 보도했다. 주택가뿐만 아니라 대형 슈퍼마켓, 소방서, 경찰서, 요양원, 심지어 해군 함정에서도 사람들은 8시 정각에 박수를 쳤다. 나는 잠깐 1987년 봄, 서울 종로 거리가 생각났다. “독재 타도”를 외치는 시위대를 위해, 차량은 오후 6시 동시에 경적을 울려주었다. 연대의 마음만 있으면 방법이야 얼마든 찾을 수 있다.

NHS는 1948년부터 운영한 영국의 무상 공공의료 서비스다. 영국에 거주하는 사람은 모두 NHS 혜택을 받을 수 있다. 1년 예산이 1200억 파운드(약 184조원)가 넘는 대표적인 공공기관이다. 그동안 영국의 공공산업이 대부분 민영화될 때도 NHS는 공공의료를 견지해왔다. 최근 10년 동안 보수당 정부로부터 개혁이 필요하다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았다. 이번에 사람들은 NHS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이제 NHS를 축소하려는 시도는 정치적 협상 테이블에서 사라질 게 틀림없다.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공공정책 없이 내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사람들은 매일 학습하고 있다.

편지함으로 인쇄한 종이 하나가 사르르 들어왔다. 우리 골목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보내는 옆집 아주머니의 편지다. 거기에는, 혹시 몸이 아프거나 연로해서 식료품을 사기 어려우면 대신 장을 봐줄 수 있으니 부탁하라고 전화번호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이 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온라인 단체대화방을 만들었으니 원하면 들어오라고도 했다.

우리 골목 단체 대화방에 들어가니, 이미 스무 명쯤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이참에 인사를 나누었다. 자기소개를 하면서, 자기가 뭘 도와줄 수 있는지를 적었다. ‘나는 수학교사인데, 혹시 아이들 수학 공부와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이런 식이다. 거기에도, 이 골목에 혼자 사는 노인이 있는지, 그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는지, 서로 물었다. 뉴스에선 코로나19가 기저질환이 있는 노인들에게 치명적이라는 소식을 계속 전하고 있다.

얼마 전 NHS가 전국적으로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주요 활동은 노인들의 안부를 확인하고, 장을 봐주고, 약을 배달하는 것이다. 50만 명이 목표였는데 하루 만에 신청자가 70만 명이 넘었다. 바이러스는 약자를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본래 지닌 보살핌의 마음도 같이 불러냈다. 인간은 지금 의학과 함께 이 마음을 무기로 싸운다.

이 시간이 역사가 된다면

언젠가는 이 봉쇄가 풀리고 아이들은 학교로, 어른들은 일터로 돌아갈 거다. 그러면 세상은 ‘정상’으로 돌아가게 될까? 많은 사람이 코로나19 이후 세계는 우리가 아는 이전 세계와는 다를 것이라고 예측한다. ‘새로운 정상’이 어떤 모습일지는 어렴풋하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우리가 이 과정을 어떻게 겪어나가는지에 따라 꽤 달라질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가 GCSE(중등교육일반자격) 역사과목 시험 준비를 하면서 이런 질문에 에세이를 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중세시대에 흑사병은 어떻게 시작됐나, 당시 사람들은 무엇을 믿었고 어떻게 행동했나, 흑사병 이후 유럽 사회는 어떻게 변했나?’ 언젠가 학생들은, 현대사회와 코로나19에 대해 같은 질문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 답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궁금하다.


이스트본(영국)=글·사진 이향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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