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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의 사회학

설렁썰렁
등록 2019-09-21 15:41 수정 2020-05-03 04:29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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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올드만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9월16일 청와대 앞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며 삭발식을 한 뒤 온라인 극우 사이트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머리를 짧게 자른 황 대표의 사진에 “잘생겼다”는 찬사를 쏟아냈다. 일베 누리꾼들은 여러 방법으로 황 대표 사진을 합성한 뒤 영국 영화배우 ‘게리 올드만’을 닮았다며 한국을 의미하는 김치와 올드만을 합성해 별명을 붙여줬다. 게리둥절 이들이 합성한 황 대표 사진의 공통점은 턱수염과 콧수염 등을 붙였다는 것인데 남성성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여성혐오 게시물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는 사이트의 성격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문제는 한국당의 반응이었다. 민경욱 의원은 일베에서 공유된 사진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고 “기분도 꿀꿀한데 이 멋진 사진에 어울리는 캡션을 다는 댓글 놀이나 한번 해볼까요?”라며 추임새를 넣었다. 한국당 내부에서도 일베의 패러디가 흥행 요소로 작용했다는 목소리가 컸다. 황 대표의 삭발식에서 장관 임명 강행에 맞서 싸우는 야당 대표의 결기 대신 ‘투블록 커트’의 멋이 보였던 건 왜일까?

‘머리카락의 사회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캐나다 컨커디어대학 앤서니 시놋 교수(사회학)의 논문 요지는 간단하다. 남성스러움을 상징하는 곳의 털이 여성에게는 수치스러운 털이 된다는 거다. 겨드랑이 털과 콧수염을 예로 들 수 있다. 털의 길이 또한 성(性)에 따라 다른데 남성에게 짧은 머리는 남성성을 상징하지만 여성에게는 긴 머리가 여성성을 의미한다. ‘머리카락의 상징성’은 성뿐만 아니라 정치 성향을 놓고도 갈린다고 논문은 설명한다. 정치 성향이 진보적인 남성은 장발일 가능성이 크고, 진보적인 여성은 단발일 가능성이 크다. 시놋 교수는 논문에서 “머리카락은 단지 머리카락이 아니라 사회적 메시지를 함축한 하나의 상징물”이라고 강조했다. 똑같이 조국 장관의 임명에 반대하며 머리를 깎았지만 황 대표와 무소속 이언주 의원의 삭발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건 이 때문이다. 이 의원은 삭발식 도중에 눈물을 흘렸는데 수치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삭발식을 한다면 역시 황 대표의 그것과는 다른 분위기일 것이다. 남성이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은 그리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면, 전통적으로 노동계와 야당에서 단식과 삭발식으로 투쟁 의지를 다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황 대표의 삭발식에선 단호한 ‘결의’보다 ‘쿨함’이 느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삭발’이라는 행위뿐만 아니라 삭발하는 행위의 ‘주체’를 함께 봐야 한다. 다시 시놋 교수의 논문으로 돌아가면 남성이 머리를 짧게 깎는 것은 사회 통제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고, 반대로 남성이 긴 머리를 유지하는 것은 자신의 소신을 지킴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노동운동의 삭발식에선 보통 긴 머리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 머리를 깎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 통념에 맞서 자신의 소신을 지켜왔으나 더는 버틸 수 없을 때 최후의 선택으로 머리를 깎음으로써 결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저항할 힘도 없으니 머리카락도 가져가라’는 삭발식은 속으로 ‘머리카락까지 빼앗겨도 뜻한 바만큼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황 대표 삭발식에서 처절함보다는 ‘힙함’이 느껴졌던 것은 그가 가진 사회적 지위 때문일 것이다. 제1야당의 대표인 그는 전 정권에서 법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지냈다. 그 전에도 공안검사로 일한 황 대표는 권력의 울타리 밖으로 나간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그의 삭발식은 더 큰 권력을 향한 강한 집념으로 읽힌다. 한국당 의원 10여 명이 릴레이 삭발을 했는데, 한국당 내부에서 “공천용 삭발”이라는 자조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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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DNA) 감식 기술이 비밀의 베일을 걷고 있다. 화살머리 고지 전투에서 2018년 5월 완전한 형태로 발굴된 병사의 신원이 유전자 감식 기술로 9월19일 밝혀졌다.
6·25전쟁이 정체 상태에 들어간 뒤에도 남과 북이 맞닿은 전선에서는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대표적인 전투가 화살머리 고지 전투다. 1951년 11월부터 1953년 7월까지 네 차례 빼앗고 빼앗기는 격렬한 고지전이 펼쳐졌다.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펼치던 시기에는 국군이 굴을 파서 들어가 있고 중공군이 밀려올라오면 포격하는 ‘자살 작전’도 벌였다. 국군 쪽 전사자는 400명, 북한 쪽은 3천 명에 이른다. 이곳은 남북 분단 뒤 비무장지대에 포함되었고 남북은 지뢰를 심어 서로의 접근을 막았다.
‘판문점선언’(2018년 4월27일)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 첫 번째 걸음이 화살머리 고지 군인의 유해 발굴이다. 지역에 접근하는 도로를 세우고 지뢰 제거 작업 등을 남북군이 함께했다. 올해 5월2일 국군 하사 철제 계급장과 철모 등 온전한 유해가 발굴되었는데, 이때도 유전자가 누구 것인지 확증했다. 9월19일 발견된 유해는 김기봉 이등중사로 밝혀졌다.
화성 연쇄살인의 유력 용의자를 지목한 것도 유전자였다. 공소시효는 완료되었고 새롭게 밝혀진 사실도 없지만 변한 것은 유전자 감식 기술이다. 이제 와서 유력 용의자가 체포된 사건에서 스타킹으로 매듭을 지은 것이 화성 연쇄살인과 비슷하다고 하지만, 당시 지역이 다르고 3년 만에 발생한 사건과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을 연결하기는 힘들었다. 유전자는 모든 추정과 수사를 제치고 가느다란 끈을 이어 ‘진실’이라고 썼다. 화성 연쇄살인범 수사에서 8차 수사(1988년)에서부터는 유전자 검사도 병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 검사 기술이 발달하면서 작은 흔적만으로도 빠르고 정확하게 감식할 수 있다. 2001년 10년 걸리던 검사가 현재는 3시간이면 된다. 연인원 205만 명의 수사 인력이 투입되고 2만1천 명이 용의선상에 올랐고 수많은 프로파일러가 분석했지만, 유전자 앞에서 모든 스토리는 무화되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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