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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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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끝판왕

뒷담화·음식 강요·휴일 전화·CCTV 감시

반성문 거부했더니 ‘해고 통지서’를 보내
등록 2019-08-17 15:28 수정 2020-05-03 04:29
회사 대표는 대표실에서 CCTV 화면을 보며 직원들을 감시했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회사 대표는 대표실에서 CCTV 화면을 보며 직원들을 감시했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천호(가명)씨는 군대에서 장교로 10년 근무하고 사회로 나왔다. 채용 사이트 ‘잡코리아’에서 장교 출신을 우대한다는 민간 연구원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서를 냈다. 3개월 수습 기간이 있고, 식대와 퇴직금까지 포함한 연봉은 최저임금 수준이었다. 대신 정규직이었고 사무관리 업무였다. 천호씨는 중소기업의 발전을 위한 연구소 설립과 연구 활동을 지원하는 업무가 마음에 들어 근로계약서에 서명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날마다 불러 한 시간씩 다른 직원 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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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 집이 멀어 출퇴근에 두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늘 8시에 출근했다. 가장 먼저 사무실에 나와 바닥을 닦고, 책상을 정리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 신입사원으로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부서는 영업직과 관리직으로 구분됐다. 영업사원들이 중소기업과 계약하면 관리직이 연구소나 연구개발 전담 부서 설립과 관련된 지원 업무를 했다. 2009년부터 중소기업 연구인력개발비 공제 비율이 15%에서 25%로 늘었고, 2014년부터 연구소 설립 관련 인적·물적 신고 요건이 완화됐다. 지식 기반 서비스업에 출판업, 영화·오디오 기록물 제작업, 부가 통신업, 광고업, 창작·예술 관련 서비스업이 추가됐다.

조세특례제한법 등에 따라 연구개발 설비 투자금액의 10% 세액공제, 기술취득금액 7% 세액공제 등 정부가 지원하는 혜택이 상당했다. 천호씨는 자신이 하는 일이 중소기업에 의미 있는 지원을 하는 업무라고 생각해 일을 열심히 배웠다.

입사한 지 일주일이 지날 무렵 대표가 천호씨를 불렀다. 한 시간 동안 앉혀놓고 관리부 직원들 ‘뒷담화’를 했다. 젊은 남자니까 노처녀를 조심하라고 했다. 여직원들과 어떤 얘기를 나누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고,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그날만이 아니었다. 날마다 오후 한 시간씩 불러 다른 직원들 욕을 했다. 다른 직원들도 호출해 비슷한 질문을 하고 직원 뒷담화를 했다. 그런 자리가 불편했지만 평소에 대표가 소리를 지르고 강압적인 태도를 보여 천호씨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동료들 욕하는 얘기를 들어야만 했다. 동료들과 잘 지내고 싶었던 천호씨는 퇴근 후 차 한잔 마시는 것도 대표 눈을 피해 몰래 했다.

제주도로 1박2일 워크숍을 다녀온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이었다. 대표는 개인 톡으로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의 개인 프로필 사진을 보냈다. 업무와 관련된 내용이 아닌 것 같아 따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 대표는 직원들을 불렀다. 상급자가 보낸 메시지에 답장 안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호통을 쳤다. 잔뜩 흥분한 대표는 답장을 안 한 직원에 대해 “사회성이 부족하고 예의가 없다”고 했다. 화가 날 때면 “씨팔~”이라는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대표는 퇴근 후, 주말, 휴일을 가리지 않고 카톡과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지 못하면 대표 번호라서 안 받는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직원 휴대전화로 했다. 크지 않은 사무실에 감시카메라(CCTV)가 10대가 넘었다. 온종일 대표실에서 CCTV 화면을 보며 직원들을 감시했다. 심지어 화장실 앞에도 CCTV를 설치했다.

대표는 회사에서 음식 먹는 걸 좋아했다. 김밥, 치킨, 피자, 빵을 시켜 직원들에게 먹으라고 했다. 음식점이나 집에서 먹다 남은 음식을 포장해 직원들을 불렀다. 천호씨는 치아에 문제가 생겨 딱딱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데도 억지로 먹어야 했다. 배탈이 난 직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폭염에 지친 직원들이 에어컨을 켜놓으면 어느새 대표가 와서 춥다며 온도를 높이거나 송풍으로 돌려놓았다. 직원들을 불러 에어컨 온도를 내리지 못하게 교육도 했다.

대표는 영업부와 관리부를 차별했다. 근속 5년이 지난 직원이 차장으로 있는데 업계 경력도 없는 직원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부장 직책을 주고 깍듯이 모시라고 했다. 야근수당을 주지 않으려고 퇴근을 강요해 밀린 업무를 집에 가져가서 하는 직원도 있었다. 월급날만 되면 대표는 소리를 지르고 책상을 치면서, 관리부 직원에게 주는 월급이 아깝다고 했다. 직원들을 거명하며 일을 잘하냐, 얼마나 하느냐고 했고, 개나 소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모욕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정규직 인사 뒤 컴퓨터에 한글 프로그램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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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6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통과됐지만 대표는 달라지지 않았다. 취업 규칙도 고치지 않았다. 대표는 자신의 행위가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인크루트에서 직장인에게 전자우편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는 자신이 직장에서 겪은 괴롭힘으로 설문조사에 답했는데 대부분이 해당했다. 하지만 회사 이름을 쓰면 문제가 될 것 같아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수습 기간 3개월이 지나고 정규직으로 발령 나는 날이었다. 대표의 괴롭힘이 힘들었지만 정규직이 되면 월급도 오르고, 대우도 좀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표는 수습 기간이 지나자 근로계약서에 없는 섭외 파트 부서로 발령을 냈다. 천호씨 자리는 사무실 입구였고, 칸막이도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누구든 천호씨 컴퓨터를 볼 수 있었다. 바탕화면 아이콘은 ‘내 컴퓨터’와 ‘휴지통’ 딱 두 개만 있었고 한글, 엑셀 등 업무에 필요한 프로그램이 깔려 있지 않았다. 명백한 직장 내 괴롭힘이었지만 대표를 신고할 수 없었다.

천호씨는 근로계약서와 다른 부당한 인사 발령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런데 대표는 천호씨를 피해망상에 빠진 사람이라고 했다. 천호씨와 다른 부서에 있는 상사를 통해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잘못한 일이 없었던 천호씨는 반성문 쓰는 것을 거부했다. 대표는 다른 직원을 보내 권고사직을 요구했고 천호씨는 이를 거부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회사는 해고통지서를 보냈다. 해고 사유는 ‘직장 분위기 훼손’이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됐지만, 천호씨는 대표의 갑질에 시달리다 신고조차 하지 못하고 쫓겨났다. 그는 정부기관에 회사의 불법행위를 신고하고,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할 예정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노동부, 근로감독 전환에 긍정적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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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 따르면 사용자의 괴롭힘도 회사에 신고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천호씨처럼 괴롭힘을 당하다 근로관계가 해지되면 회사에도 신고할 수 없게 된다. 고용노동부에 신고하면 어떻게 될까? 직장갑질119는 고용노동부에 직장 내 괴롭힘 진정 사건을 근로감독으로 전환해 사업장의 노동법 위반 여부를 감독해 처벌하라고 요구했고, 노동부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천호씨 회사를 근로감독할 경우 얼마나 많은 노동법 위반 건수가 나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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